[잊혀지는 우리 것] 마광남 주주통신원

우리들은 자연산 청각을 김장할 때 사용하거나 냉채로 먹어왔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양식을 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이런 청각을 언제부터 식용으로 사용하였을까?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세종10년(1428,1,28)에 첨절제사(僉節制使) 박유(朴牖)가 선군(船軍)을 시켜 청각(靑角) 두어 말을 싸가지고 좌의정 황희(黃喜)에게 증정(贈呈)하다가 금란리(禁亂吏,벼슬이름)에게 잡혀 감수자도율(監守自盜律)로써 논죄하여 장(杖) 80대에 처하소서.”하니, 임금이 박유는 공신(功臣)의 아들이라 하여 다만 관직만 파면시켰다는 기록이 최초인 것 같다.

자산어보에는 감촉이 매끄러우며 빛깔은 검푸르고 맛은 담담하여 김치의 맛을 돋운다고 기록되어 있어, 예로부터 김치의 맛을 내는 재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바다 속에 사는 소나무라는 뜻으로 미루(ミル)라고 부른다. 또한 청각에는 구충 성분이 있어 예전에는 회충약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며, 수용성 추출물은 세균에 대한 강한 항생 작용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문헌상의 기록들을 찾아보면 중추원조사자료 연중행사 편에는 10월은 김치(침채,沈菜,지물,漬物)를 담그는 달로, 무와 배추에 젓갈, 후추, 마늘, 생강, 파, 배, 밤, 청각(靑角), 조기젓, 수고(水苽), 고춧가루(개자채,芥子菜) 등을 버무려 항아리에다 절여, 1년의 먹을 것을 준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세조 1년(1455년 7월 24일)의 기록에는 의정부에서 명년 구황에 대하여 아뢴다는 제목으로 청각(靑角)·석맥(石脈)·우모(牛毛)·해홍(海紅) 같은 먹을 만한 해채(海菜)를 당번 선군(當番船軍)을 동원시켜 이를 채취해서 햇볕에 말려서 저축, 대비케 해야 한다고 흉년을 대비했던 기록도 보이며, 동춘당집 별집 제9권 부록 황세정(黃世楨)편에 태지(泰之 이유태(李惟泰)는 유독 청각채(靑角菜)를 즐겨 먹었는데, ‘내가 염병을 앓을 때 겨우 열은 물러갔으나 입맛이 없어 어떤 음식이고 모두 싫었는데, 베개 가에 청각채가 있는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손으로 뜯어 입에 넣어 구미를 돋았다고 하였다.

또 통감부문서 한국정부와의 교섭사항(1907년 경)이란 기록에는 한국 경리원(經理院)에서는 全羅道 내 도서(島嶼) 연안에서 산출되는 청각채 등의 해초 매입에 대한 독점권을 한국인 남정우(南正祐)에게 부여하였는데 이것은 통상의 자유를 저해하고 상인 상호간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독점권을 취소함과 동시에 이 상업을 일반에게 개방한다는 명령을 관계 군수에게 발령하여 이 상업을 자유롭게 행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당시에도 청각이 상당히 많은 량이 거래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정부가 개입할 정도의 거래가 있었다면 그 값은 얼마나 되었을까? 동학농민혁명 자료총서 도인경과내역(道人經過來歷) 상정질[常定秩]편에는 청각 1되(升)의 값은 1전(당시 햅쌀(新稻米)은 한 되에 6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청각을 두고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說部) 5 도문대작(屠門大嚼)편에는 해주(海州)와 옹진(瓮津)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정한 바다에서 생산되는 우리 완도의 청각을 나라에서 제일가는 청각으로는 만들 수는 없는지 우리 모두는 고민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마광남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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