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았다, 여기!”

눈이 번쩍 뜨이고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난다.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본 피뿌리풀을 찾았다. 앞이 툭 트인 제주도 동쪽 한 오름 중턱 풀숲에서 내가 제일 먼저 찾아낸 것이다. “피뿌리풀을 제일 먼저 찾아내는 사람이 오늘 저녁 술을 쏘기로 합시다.” 거의 직선에 가깝게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느라 헉헉대면서 내가 제안한 말이다. 꼼짝없이 내가 오늘 저녁 술을 쏘아야 할 판이다. 그래도 좋다, 돈이 대수인가! 그 드넓은 오름 사면 풀숲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피뿌리풀을 찾아낸다는 게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 처음 대면한 피뿌리풀

은퇴한 지 벌써 6년이 지났다. 은퇴만 하면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살아야지. 한 달도 좋고, 일 년도 좋다. 민박도 좋고, 여인숙도 좋다. 그곳에 머물면서 내가 만나보고 싶은,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한 식물들을 만나보자. 만나는 대로 하나하나 사진을 찍고 정리를 해 보자. 그렇게 해서 누구나 쉽게 들어와서 구경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관속식물 웹도감을 만들어야지. 이런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벌써 6년이 덧없이 흘러가 버렸다. 왜 이렇게 내 발목을 잡는 일들이 자꾸만 생길까? 왜 과감히 떨쳐 버리지 못하는지 내 자신이 한심한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지난해 겨울, 맘에 맞는 꽃동무 넷이 만나 저녁을 함께 하면서 내가 먼저 제안했다. “우리 꽃 피는 봄이 오면 제주에 가서 한 주일 머물면서 식물탐사 해봅시다.” 이구동성으로 화답한다. “좋지요!” 그렇게 해서 지난 2월 초에 꽃동무 막내가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내가 1주일간 숙소 예약을 주선하여 추진되었다. 그런데 떠나기 전날 밤 일기예보, 낼 날씨가 심상치 않다. 비가 오고, 바람이 드세어 비행기 결항이 예상된다고 한다. 공항에서 노는 한이 있더라도 우린 이튿날 아침 예정대로 7시 반 약속 시간에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우리가 탄 비행기는 8시에 이륙하여 무사히 제주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5월 초순 1주일간은 어린이날에 어버이날까지 끼어 있어서 가는 곳마다 인파가 장사진을 이루었지만 보고 싶은 식물 개화기에 맞추어 많을 꽃을 볼 수 있었다. 1주일이 어떻게 지나간 줄 모르게 지나가 버렸다.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이맘때쯤이면 꽃이 피는 몇 가지 희귀한 제주도 자생식물들이 있다. 지인을 통해서 받은 문자 메시지만 가지고 자생지에서 가서 꽃을 찾아내 대면한 것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물론 그 꽃을 만나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았다.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서고 싶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기어이 만나보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찾고 찾아내 만난 그 감격, 그 기쁨은 직접 몸으로 느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그 중의 한 가지가 바로 어느 오름에서 만난 피뿌리풀이다. 첫 대면한 곳에서 혹 또 다른 개체가 있는가 하여 우리는 주위를 샅샅이 찾아보았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단념하고 정상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정상에 오르자마자 올라온 사면과는 반대쪽에 누군가 화산석으로 에워싸 놓은 곳이 보인다. 가까이 가 보니 아까보다는 줄기 수는 더 적지만 햇볕이 더 좋은 곳이라서 그런지 훨씬 실하고 꽃 색깔도 선홍색이라 보는 순간 사람을 매료시킨다. 탄성을 지르는 우리의 인기척을 듣고선지 조그마한 캐비닛 같은 시설물 안에서 한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천천히 나오신다. 깜짝 놀라서 우리가 먼저 인사를 하면서 “우린 멀리 서울에서 왔는데 피뿌리풀을 만나보고 싶어서 물어물어 예까지 찾아왔습니다. 식물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절대 훼손하거나 캐 가지 않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번갈아 정성 들여 사진을 찍었다.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찾아보아도 역시 다른 개체는 보이지 않는다.

▲ 두 번째 맞은 피뿌리풀

보아하니 지자체에서 피뿌리풀 도채(盜採)를 막기 위해 감시하는 분을 상주시킨 것 같았다. 빈말 삼아 “이 근방에 더 볼 수 있는 게 없을까요?” 여쭤 보았다. 할아버지께서도 우리의 됨됨이를 파악하셨는지 자상하게 반대쪽 능선 어디쯤 가면 여기보다 더 많은 한 포기를 더 만날 수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신다.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우리는 휘파람을 불면서 그쪽으로 이동하였다. 정말로 지금까지 본 두 포기보다도 훨씬 많은 줄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역시 보호를 위해서일까 화산석으로 곱게 에워싸 놓았다. 역시 근방을 더 찾아보았으나 다른 개체를 더 볼 수 없다. 혹 분화구에 가면 또 다른 어떤 식물을 볼 수 있을까 싶어 내려가 보았으나 별게 없다. 우리가 찾아간 오름 전체에서 딱 3군데 3개체를 만난 것만으로도 대만족, 우린 발걸음도 가볍게 하산하였다.

▲ 세 번째 만난 피뿌리풀

산림청 국립수목원의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는 ‘피뿌리풀’을 국명으로 추천하고 있다. 이 추천명은 이창복의 “우리나라의 식물자원(1969)”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뿌리 빛깔이 피처럼 새빨간 데서 유래한 것이다. 뿌리를 직접 캐서 확인해 볼 수는 없었지만 구굴에서 학명으로 검색해 보면 뿌리 모양이 마치 고삼(苦蔘)의 뿌리처럼 장대하고, 색깔은 진도 홍주를 만드는 데 쓰는 지치처럼 붉은색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식물에 대한 최초의 도감정보는 정태현 외 3인의 “조선식물향명집(1937)”에서 ‘피뿌리꽃’이란 이름이 나온다. 아마도 민간에서는 오래 전부터 ‘피뿌리꽃’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다운 꽃에 주목한 이름이리라. 그 후 박만규는 “우리나라식물명감(1949)”에서 ‘서흥닥나무’라 하였다. ‘서흥’은 지금의 황해북도 서흥군 지명으로 자생지를 밝힌 것이다. 그런데 서흥군의 북쪽 지역은 제주도 오름처럼 용암지대가 발달한 화산지형을 이루고 있어 이 식물의 생태적 특성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꽃 모양이 같은 팥꽃나무과의 ‘두메닥나무’와 비슷한 데서 ‘닥나무’를 차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피뿌리풀은 일반적인 초본과는 달리 뿌리가 나무질이라서 그렇게 부를 수 있겠다 싶다.

한편 북한에서는 ‘처녀풀’이라 부르는데 뿌리가 핏빛이라든가 하는 특징적 형질보다는 식물 전체의 아름다운 외양에 주목, ‘처녀처럼 예쁜 풀꽃’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명은 ‘서향낭독(瑞香狼毒), 단장풀(斷腸草)’이라 하는데 유독식물이며, 주로 설사 약재로 사용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영명은 ‘Bloody-root stellera, Chinese stellera’라 한다. 학명으로는 Stellera chamaejasme L. 라고 한다. 속명 ‘Stellera’는 독일의 식물학자 Georg Wilhelm Steller(1709-1746)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종소명 ‘chamaejasme’는 '작은 자스민의, 지면에서 자라는 자스민의'라는 뜻이다. 학명은 꽃 모양이 자스민처럼 생겼는데 키가 작다는 뜻으로 풀이 된다.

팥꽃나무과에 속하는 피뿌리풀의 뿌리는 붉은색을 띠는데 굵으며, 나무질이고, 땅속으로 40~50cm까지 깊게 들어간다. 줄기는 뿌리에서 여러 대가 모여나와 높이 25~45cm까지 자라며, 털이 없고, 윤기가 있다. 잎은 다닥다닥 어긋나게 달리고, 피침형, 길이 1.7~3.0cm, 폭 0.4~0.9cm,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잎자루는 거의 없거나 매우 짧다. 꽃은 5~7월에 줄기 끝에서 15~25개가 머리모양꽃차례를 이루어 달린다. 꽃자루는 길이 1mm쯤으로 굵다. 꽃받침통은 붉은색으로 길이 8~12mm, 줄이 10개 있다. 꽃받침 갈래는 5개, 길이 2~3mm이다. 수술은 10개, 2줄로 꽃받침통 위쪽에 붙는다. 열매는 수과(瘦果)로 타원형이며, 꽃받침에 싸여 있다.

피뿌리풀은 중국, 몽골, 부탄, 티베트, 러시아 동부 시베리아 등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는 주로 황해북도 서흥, 함경북도 백두산, 평안북도 강계 등의 양지바른 산야에 자란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북쪽 분포지로부터 뚝 떨어진 바다 건너 제주도 동부지역 일부 오름에만 극히 드물게 자생한다. 몽고의 침입을 받은 고려시대에 몽고의 말과 함께 들여온 사료에 씨가 섞여 들어왔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고, 설사하는 말의 치료제로 피뿌리풀을 먹였는데 그 배설물에 씨가 들어 있어 번식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추측에 지나지 않을 뿐 아직까지 학술적인 연구는 없다. 또는 한라산 정상 암벽에 붙어사는 암매처럼 빙하기에 남하한 것이 제주도 오름에 적응하여 잔존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몽골 초원에는 잡초처럼 자란다는 피뿌리풀이 한반도 남녘, 그것도 바다 건너 제주도 동부지역 몇몇 오름에만 자란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런데 6~7년 전만 하더라도 오름 사면을 온통 붉은빛으로 수놓았던 피뿌리풀이 날이 갈수록 점점 그 개체수가 줄어든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생지 주변의 난개발이나 생태환경의 변화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멸종위기의 주된 원인은 우리 인간의 무분별한 행동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뿌리가 깊이 박히고 생육지가 특이한 환경에서만 자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캐간다 해도 한두 해 안에 고사할 것이 뻔하다. 오죽하면 도채를 막기 위해 감시인까지 배치하여 상주시킬까?

국립산림과학원에서는 피뿌리풀을 증식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한다고 한다. 그러나 결실률이 낮아 실생법도 어렵고, 잔뿌리의 발달이 저조하고 활착이 잘 안 되어 포기나누기 방법도 어렵다고 한다. 다행히 최근 조직배양에 의한 번식 방법을 성공시켜 자생지 복원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피뿌리풀을 법정보호종으로 지정한 적이 없다. 산림청에서는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 후보종으로 지정 보존에 힘쓰고 있다. 자생지가 보존될 수 있도록 국가관리 법정보호식물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이호균 주주통신원  lee1228h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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