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마광남 주주통신원

도량형은 우리일상에서 때어 놓을 수 없는 하나의 기준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고무신을 사려면 그 크기를 말할 때 몇 문이라고 했다. 즉 107문(대략250mm정도)등으로 그 크기를 말했었고, 쌀을 사고팔 때도 한 되 또는 두되라고 하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모두가 미터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미터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오랜 세월 써온 것을 하루아침에 고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옛날의 치수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미터법에 적용을 하면 정확하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조선시대의 도량형은 어떠하였는가? 경국대전의 공전(工典)에 도량형이 기록되어있다. 이를 관리하는 소속관청은 상의원(尙衣院), 선공감(繕工監),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 전연사(典涓司), 장원서(掌苑署), 조지서(造紙署), 와서(瓦署)이고 여러 고을의 도량형을 본조에서 제정하고 불도장을 찍어서 속임수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옛날의 되(升)나 말(斗)에 불도장이 찍혀있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에 길이를 재는 제도(度之制)를 보면 10리(釐)를 1푼(一分), 10푼을 1치(寸), 10치를 1자(尺), 10자를 1발(丈,옛날에는 배의 크기를 말할 때도 몇 장대 배라고 하였음)로 하였는데 주척(周尺1)을 황종척(黃鐘尺2)에 맞추어보면 주척의 길이6치6리가 황종척 1자에 해당되고, 영조척(營造尺3)을 황종척에 맞추어보면 영조척의 길이는 8치9푼9리에 해당되며, 예기척(禮器尺4)을 황종척에 맞추어보면 예기척의 길이는 8치2푼3리에 해당되고, 포백척(布帛尺5)을 황종척에 맞추어보면 포백척의 길이는 1자3치4푼8리에 해당된다.

또한 용량을 재는 제도(量之制)를 보면 10작(勺)을 1홉(合)으로, 10홉을 1되(升)로, 10되를 1말(斗)로, 15말을 소곡평석(小斛平石6), 20말을 대곡전석(大斛全石7) 으로 한다고 기록되어있다. 성호사설4권 만물문 척(尺)에는 주척이 바로 황종척인데, 포백척에 준하면, 주척은 네 치가 조금 더될 뿐이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영묘(英廟, 세종의 묘호,廟號)가 율려(律呂)를 만들려고 할 적에 진이(陳理)ㆍ명승(明昇)이 우리나라에 귀양 와 있었다. 영묘는 그가 가져온 신주(神主)를 기준해서 길고 짧은 척수를 마련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의 신주는 주척의 치수를 쓴 것이 아니었던가?

유반계(柳潘溪,유형원(柳馨遠)의 호)는, “지금 서울 수표교(水標橋)에 세운 수표석(水標石)에 새긴 주척이 바로 이것이다” 했다. 또, “지금 강원도 삼척부(三陟府)에 소장된 구리로 만든 포백척에 새긴 연호(年號)와 월일(月日)이 다 있다. 이는 영묘 때 각 고을과 명산(名山)에 감추어 두라고 명했던 것인데, 지금 〈딴 데 것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오직 여기의 것만이 다행히 보존되었다.” 지금 공사 간에 통용하는 포백척은 이와 비교하면 일곱 치가 넘게 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간추려보면 조선전기의 황종척 길이는 약 34.48(±)cm 이였다. 세종 4년(1422)에는 1척을 32.08㎝로 줄였고 다시 1440년에 명의 표준 영조척을 가져다가 31.24㎝로 개정했다. 세종 28년(1446) 황종관(黃鐘管)의 길이를 기준으로 하여 다시 만들었고, 이것을 기준으로 황종척(黃鐘尺), 예기척(禮器尺), 주척(周尺) 등을 청동으로 주조하여 각 지방관청에 배포하여 표준 척으로 삼게 하였다.

그 길이는 덕수궁에 소장되어 잇는 황종척의 길이로 환산하여 볼 때 30.65㎝이다. 이후 영조척의 길이는 계속 축소되어, 세조 12년(1466)에 31.22㎝로 한차례 통일되었다가 성종(1469∼1494) 때에는 31.19㎝로, 광해군(1608∼1623) 때에는 31.07㎝로 줄었다. 영정조(1724∼1800)때 1주척이 20.83㎝, 1영조척이 31.22㎝로 알려져 있다.

마침내 광무(光武) 6년(1902)에 지금과 같은 1尺=30.303㎝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1910년대의 기록인 어선조사보고서를 보면 도량형에서의 척(尺)이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에서 조선 초기까지는 32.21cm를 1자로, 세종 12년의 개혁 시에는 31.22cm로 바꾸어 사용해 오다가 광무(光武) 6년(1902) 일제의 곡척으로 바뀌면서 30.303cm로 통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

마광남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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