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테마여행: 강응천과 실크로드를 가다(9-2)

제 6~8일 신강(新疆) - 실크로드의 핵심 : 우루무치 한겨레테마여행l승인2016.05.23l수정2016.05.2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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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유목 제국 이야기

단군(텡그리)은 고대 유목민의 신이나 지도자였다. 유목민은 하늘을 숭배하고 정착민은 땅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군신화는 유목민인 환웅족이 정착민인 웅녀족과 융합해 국가 단계로 나아간 사실을 표현한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신화도 천신인 제우스를 섬기는 유목민 무리가 지모신인 헤라를 섬기는 정착민과 벌이는 투쟁과 정복의 역사를 담고 있다. 유목민의 지도자가 ‘헤라클레스(헤라의 영광)’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유목민과 정착민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유목민과 정착민의 충돌과 교류는 유라시아 곳곳에서 일어나던 일이다. 우리가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지역은 고대부터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지역에서 유목민과 반농반목의 종족들이 살아가던 터전이었다. 오래 전 이곳에서 살던 유목민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주기적으로 남하해 유라시아 각지의 문명에 큰 전환을 가져오곤 했다. 서지중해로부터 황하에 이르는 수많은 고대 문명 지대는 이러한 유목민의 이동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곤 했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집단은 기원전 8세기 무렵 흑해를 중심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이란계 스키타이였다. ‘초원의 전설’로 일컬어지는 스키타이는 승마용 바지와 장화, 말에 발을 고정시키는 등자, 순장 풍습 등 훗날 유목민들에게 이어지는 생활 문화를 확립한 뒤 사방으로 흩어져 소멸했다.

그 뒤를 이어 기원전 3세기경 몽골 초원부터 중앙유라시아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을 무대로 등장한 최초의 유목 제국이 바로 투르크계로 알려진 흉노였다. 그 무렵 타림 분지 주변에는 ‘서역 36국’이라 불리는 작은 오아시스 국가들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흉노는 이 나라들을 자신의 세력권 안에 넣으면서 서서히 남쪽으로 팔을 뻗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중국의 한나라와 충돌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흉노가 스키타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공동체에 머물렀던 스키타이와 달리 유목민 최초로 국가를 건설하고 제국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이처럼 강력한 국가를 이루고 초원을 지배할 뿐 아니라 때로는 문명 세계에까지 진출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흉노와 같은 투르크(터키계), 둘째는 유연이나 거란 같은 몽골계, 셋째는 여진 같은 퉁구스(만주)계이다. 청장고원에서 일어나 실크로드로 진출했던 토번, 서하 등은 중앙아시아 유목 제국의 큰 흐름에서 일단 열외로 두겠다.

흉노의 세력이 쇠퇴한 뒤 실크로드의 주인공이 된 것은 몽골계 유연이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 이래 독자적인 천하를 구축하면서 이 세상에 서로 대등한 ‘세 개의 천하’가 있다는 인식을 보였다고 한다. 그것은 고구려의 동북아시아, 중국, 그리고 유연이었다.

유연 다음에는 다시 투르크계인 돌궐이 부상했다. 흉노는 투르크계인지 몽골계인지 아니면 혼혈인지 설이 분분하지만 돌궐은 그 자체가 투르크의 음차이므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하고 동로마에서 고구려까지 유라시아 각국과 폭넓은 관계를 맺었던 돌궐이 쓰러지자 그 자리를 또 다른 투르크계 위구르 왕국이 차지했다. 오늘날 중국 내 위구르족의 조상을 이루는 이 왕국은 이전의 유목 국가와 달리 도시 문화를 동경했다. 그래서 고창고성 같은 성에서 살기도 하고 자신들이 성을 쌓기도 했다.

그 다음 유목 제국은 요하에서 발원한 몽골계 거란이었다. 거란은 남쪽으로 진출해 송과 맹약을 맺고 북중국을 지배하면서 요(遙)라는 중국식 왕조를 세웠다. 중국의 정사인 25사에는 요도 정통 왕조로 들어가 있다. 그래서 요는 이전의 유목 국가와 달리 ‘정복 왕조’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얻었다. 흉노, 돌궐 등은 문명국가를 침략해서 영토를 빼앗기는 해도 문명국가를 정복해서 스스로 문명화되는 길을 가지 않았다. 유목국가의 전통과 생활방식을 고수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요는 일부이긴 하지만 중국을 지배하면서 중국화의 길을 갔다.

물론 거란 내부에서는 전통을 지키자는 세력과 중국화를 지지하는 세력의 갈등이 있었다. 전자가 우세할 때는 국호를 ‘거란’으로 했고, 후자가 우세할 때는 ‘요’라고 했다. 이것이 몇 차례 엎치락뒤치락했다. 우리 교과서는 고려가 겪은 국난을 ‘요의 침입’이라 하지 않고 ‘거란의 침입’이라고 표기했는데, 그것은 고려가 큰 침략을 당한 993년부터 1018년까지 그들의 국호는 거란이었기 때문이다.

거란은 유목 세계뿐 아니라 중국에도 큰 자취를 남겼다. 거란인은 스스로를 ‘키탄’이라고 불렀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여기서 유래한 ‘키타이’를 중국이라는 뜻으로 쓴다. 거란이 중국의 정복 왕조로서 주변 세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홍콩의 항공사 이름인 ‘캐세이 퍼시픽’의 ‘캐세이’ 역시 ‘키탄’의 다른 발음이다.

요 이후 잇달아 정복 왕조가 등장했다. 요를 멸망시킨 만주계 여진족은 금을 세우고 송을 남쪽으로 밀어내 북중국의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오래 안 가 몽골족이 칭기즈칸의 영도 아래 정복 활동을 펼치면서 금과 송을 모두 지도에서 지워 버렸다. 그들이 지워 버린 것은 중국만이 아니라 유라시아 전역이었다. 몽골제국의 중심국가인 원은 사상 최초를 중국을 완전히 지배한 정복 국가였고, 4대 칸국 중 하나인 일 칸국은 이슬람 문명 세계를 지배한 정복 국가였다. 이 같은 몽골 제국의 치세 아래에서 육상과 해상의 모든 실크로드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통합되었다.

원 이후에 나타난 괄목할 유목민의 정복 국가는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청이다. 오스만투르크는 동로마를 멸망시키고 지중해 일대를 지배했고, 청은 명을 멸망시키고 중국 전역을 지배했다. 칭기즈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자임하는 티무르가 중앙아시아를 제패하고 오스만투르크를 떨게 한 적이 있지만 그 역사적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티무르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포위 공격할 때 다마스쿠스에는 이슬람의 역사학자 이븐 할둔이 있었다. 그는 『이바르의 서』라는 대작 역사서를 썼는데 그 안에 있는 ‘역사서설’에서 인류 역사는 유목민과 정착민의 투쟁의 역사라고 일갈한 바 있다. 정착민이 문명국가를 세우고 번영하다 보면 타락하고 쇠퇴하는 시기가 온다. 그러면 원시적 생명력과 연대의식으로 무장한 유목민이 흥기해 타락한 문명을 ‘정화’한다. 그런데 유목민이 문명화된 삶을 살면서 흥청거리다 보면 다시 타락하게 되고, 그때 또 다른 유목민이 나타나 이를 ‘정화’한다. 이븐 할둔은 이런 논리를 펴며 티무르를 위대한 유목민의 지도자로 찬양했다. 그 덕분에 다마스쿠스는 티무르의 잔인한 파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븐 할둔의 역사관은 음미할 만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유목민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의 통찰에 감탄하게 되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같은 투쟁의 역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유목민이었다. 동쪽에서는 청, 서쪽에서는 오스만투르크가 문명 세계를 정복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타락해 갈 무렵에는 더 이상 그들을 ‘정화’할 유목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바다에서 일어난 서구의 자본주의 세력이 나섰다. 제1차 세계대전은 그들이 세계의 분할과 재분할을 거의 다 마치고 두 유목 출신 제국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재앙이었다.

오늘날 세계는 자본주의라는 미증유의 ‘유목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자본주의가 생명력을 잃고 타락해 가면 그것은 누가 ‘정화’할 것인가? 오늘을 사는 모든 인류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

투르키스탄 이야기

터키에서 반중국 시위대가 한국인을 중국인으로 오인하고 공격한 사건이 있었다. 그 시위는 타이로 망명을 시도한 위구르족을 타이 정부가 중국으로 송환하면서 빚어졌다. 위구르족과 터키 사람들이 무슨 사이기에 위구르족이 중국에서 겪는 고난 때문에 터키 사람들이 시위를 할까? 이 질문에 오늘날 중앙아시아를 이해하는 열쇠가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돌궐(突厥)은 투르크의 음차이다. 돌궐 이전에는 철륵(铁勒)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남아 있는 돌궐 비문을 보면 철륵과 돌궐을 모두 투르크로 읽고 있다. 이러한 돌궐인, 즉 투르크인은 역사 속에서 아질(阿跌), 혼(渾), 설연타(薛延陀), 회홀(回纥) 등 다양한 종족으로 존재했다. 그들이 이합집산을 통해 오늘날 터키,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의 독립국가와 타타르스탄, 사하 등 러시아 연방 내의 자치공화국을 이루고 있다.

이 같은 투르크인의 나라를 ‘투르키스탄’이라고 한다. 이 말은 8세기 아라비아인이 펴낸 지리학 저작에서 중앙아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뜻으로 쓰였다. 이후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힌디-우르드어 각종 역사 문헌, 비문, 외교문서, 경제 문서, 문학 작품 등에서 이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18세기에 이르러 동부 투르키스탄이 청에 병합되면서 그 이전까지 한 덩어리로 인식되던 투르키스탄에 변화가 생겼다. ‘동투르키스탄’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까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던 서부는 ‘서투르키스탄’ 또는 ‘협의의 투르키스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 들어 히바(우즈베크), 부하라, 코칸트 세 나라가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때 서투르키스탄은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동투르키스탄은 중국령 투르키스탄으로 불리게 되었다.

▲ 1933년 수립된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의 병사들.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은 1910~20년대 위구르 근대 계몽운동의 영향을 받아 성립됐다. 그러나 민족적 정체성이 모호한데다, 중국·소련 등의 반대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스웨덴 국립문서고 소장(사진출처 : 한겨레 신문, 동서문명 교차로 ‘신장’ 둘러싼 파란만장 쟁탈사,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74116.html)

이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오늘날 신강위구르자치구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독립 국가의 이름을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으로 정해 놓고 있다. 그들이 제정한 국기는 터키 국기와 매우 유사하다. 이 같은 분리 독립의 지지자들은 동투르키스탄(신강위구르자치구)이 예로부터 독립 국가였다고 믿는다. 18세기 이전에는 중국에 직접 예속된 적이 없고 그나마 1881년까지는 조선, 베트남과 비슷한 지위였다고 생각한다. 본격적인 병합은 1881년에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반면 중국은 한 무제가 서역도호부를 설치한 이래 신강은 중국 통일민족국가의 불가분한 구성 부분이었다고 주장한다. 1884년 청나라의 좌종당(左宗棠)은 동치제에게 “타민족에게 핍박받던 고토에 새로 돌아가야 합니다(他族逼處,故土新歸).”라는 상주를 올렸다. 그에 따라 청 조정은 이곳에 신강성이라는 행정 기구를 건립했고, 그 후 오늘날까지 일시적인 급변기를 제외하면 신강은 중국의 일부로 자리 매김 되어 왔다.

이처럼 극단적인 역사관의 차이 때문에 최근 들어 신강의 분리 독립 운동은 폭력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1990년대 이래 심각한 폭동이 종종 일어났다. 1997년 2월에는 우루무치에서 연쇄버스폭발사건이 발생하고, 카자흐스탄 국경 가까운 이닝 시에서도 많은 사람이 희생된 충돌이 있었다. 위구르족 청년이 탈레반으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은 사례도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 직전인 8월 4일에는 카스 지구에서 테러가 일어나 경찰 16명이 죽고 16명이 다쳤다. 이듬해 7월 광동에서 위구르족이 구타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우루무치 시 등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탈리아 G8 확대정상회의에 참석하려던 후진타오 주석이 급거 귀국할 만큼 급박한 사건이었다.

과연 신강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우루무치 공항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두 중국 소녀와 동석했다. 둘 다 막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는 참이었는데, 한 명은 위구르족이고 한 명은 한족이었다. 그들은 둘 다 중국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컸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은 미국 대학이 더 좋아서가 아니라 다른 경험을 해 보고 싶어서라고 했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정도라면 상위 계층에 속하는 아이들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외부 세계에 갈등의 상대방으로 알려진 두 민족의 소녀가 두 손 꼭 잡고 유학을 떠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중국으로 돌아올 지 미국에 눌러 살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대학을 마치고 우루무치에 돌아온 이후의 삶이 무척 궁금해졌다. 그 삶의 양태는 몇 년 후 신강, 나아가 중국,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의 미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끝>

글/사진  강응천 역사저술가 및 출판기획자,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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