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마광남 주주통신원

미역이 우리 완도의 경제를 흔들던 때가 있었다. 대일 수출로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기도 하였고, 당시에는 미역을 가지고 21가지의 음식을 개발하여 개발자가 신양파크 호텔에서 강의까지 하기도 하였다. 그러든 미역이 이제는 전복 먹이로 절대적인 해조류가 되었다.

미역을 두고 경세유표 제14권 균역사목추의(均役事目追議) 제1어세(魚稅)편에는 미역을 해대(海帶)라고 하는데 방언으로 미역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감곽(甘藿) 황곽(黃藿)이라고도 한다.

또한 곽세(藿稅)에 관한 기록을 보면, 호남에는 탄환만하고 주먹만 한 작은 섬들이 헤아릴 수도 없는데, 이러한 섬들을 미역밭(곽전,藿田)으로 분류하여 사가(私家)에서 세(稅)로 200~300냥을 징수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에도 미역이 있는 바위를 사고, 여기에서 생산되는 미역에 대해 세금을 내도록 하고 있었다. 그 세금을 보면 1등 90냥, 2등 80냥, 3등 70냥, 4등 60냥, 5등 50냥, 6등 40냥, 7등 70냥. 8등 20냥, 9등 10냥을 받고 있었다.

고종 1년 갑자(1864, 동치3) 1월 3일(을사)의 기록에는 경모궁에 천신할 미역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걱정했던 것으로 보아 미역이 궁중의 제사에도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한편 중국의 배가 표류하여 온(정조즉위년 병신(1776,건륭 41) 12월9일(병오) 사람들이 고향으로 가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갈 때 먹을 쌀, 소금, 간장, 생선, 미역 등의 물품을 넉넉하게 헤아려 지급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때에 미역은 1근에 1냥이었으며, 미역귀(곽이,藿耳) 또한 1근에 1냥에 거래가 되고 있었다.(정조10년 병오(1786,건륭 51)5월19일(신유)

그러나 한일통상협정에 의한 대일 수출은 미역의 경우, 자료 대한민국사에는(수산경제신문 1949년 05월 31일) 대일수출 추정수량을 118톤에 4만 5,000불로 보고 있었다.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의 기록을 보면 이곳의 포시에트(Посьет)해안지역 주민들은 주로 수수와 미역, 바다표범을 주식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우리 옛 풍습을 기록한 중추원조사자료 연중행사 편에는 산후병(産後病)이 있는 부인은 삼복(三伏)에 강변의 모래사장으로 가서 모래 속에 전신을 묻고, 얼굴만을 내놓고 땀을 낸 후 집으로 돌아와 미역국(곽갱탕,藿羹湯)을 먹으면 완전히 치료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출산(出産)이 시작되면, 즉시 방의 한 귀퉁이에 삼신(三神,産神)을 제사하는데, 백반 3그릇, 미역국 3그릇을 바치고 안산(安産)을 기원한다. 7일이 되면 생후 셋째 날과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에 미역국, 쌀밥을 각각 세 그릇씩 올려놓고 태신(胎神)에게 제사를 지낸다.

100일이 되면 흰떡을 만들고, 쌀밥과 미역국을 마련하여 친척 및 지인을 초대한다. 또 흰떡을 이웃집 및 친지들 집에 나누어 보낸다. 그러면 떡을 받은 집에서는 떡을 담아 온 그릇에 금전을 넣어 돌려보낸다. 금전이 없을 때는 쌀을 대신 사용한다. 집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도 연회 후에 금전을 증여한다. 이것을 병대(餠代,떡값)라고 한다.

돈을 증여하는 원래 방식은 홍사(紅絲,붉은 실)로 돈을 묶어 증여하는 것인데, 이는 갓난아기를 축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는 오랜 옛날부터 미역과는 땔 수없는 관계가 있었다.

마광남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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