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지난 2015년 10월 31일부터 11월11일까지 12일간 진행되었던 <그리스 터키 문화기행-유럽 문명의 뿌리를 찾아서>의 동행 강사 강응천선생의 답사기를 편집한 것이다.

▲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찍은 단체사진

2015년 10월 31일 (토)

테러 공포

수없이 많은 비행기를 탔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10월 10일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128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 탓이다. 여행사 말로는 그 소식을 듣고 여행 신청을 취소한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더욱이 다음날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터키 총선이다.

그러나 열두 시간을 날아 이스탄불의 케말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한 다음 순간, 모든 염려는 사라졌다. 무사히 착륙했을 뿐 아니라 총선을 하루 앞둔 나라의 공항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한가로운 분위기 때문이었다.

바가지 알림

터키 말은 아는 것이 없었다. 우리말과 어순이 비슷하고 발음이 같은 단어도 꽤 있다고 들은 정도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장을 걸어가다 보니 안내 전광판의 ‘수하물 찾는 곳’이 ‘Bagaj Alim’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Bagaj야 영어 Baggage와 같은 뜻일 텐데, Alim은 꼭 우리말의 ‘알림’을 떠올리게 해 실소를 머금게 되었다. ‘수하물 알림’이라 해도 말이 되고 ‘바가지를 씌울 수 있으니 조심할 것을 알림’이라 해도 생뚱맞지만 말은 되지 않는가? 나중에 가이드에게 물어 보니 Alim이 터키어로 ‘찾다, 얻다’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예니보스나

공항 부근 예니보스나 지역에 있는 고넨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예니보스나는 1923년 터키공화국 출범 때만 해도 주민이 350명밖에 안 되는 한가로운 마을이었으나, 보스니아 일대로부터 이주민이 몰려들면서 덩치가 커졌다고 한다. 본래 이름은 보스니아 도시 사라예보의 터키식 표현인 ‘사라이보스나’였다가 지금의 ‘예니보스나(신 보스니아)’로 바뀌었다. 이름처럼 이곳 주민은 대부분 보스니아와 그 주변 지역 출신이다. 최근에는 이스탄불에서 가장 빨리 발전하는 곳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서머타임

저녁 먹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라 잠시 호텔 방에서 쉬다가 모이기로 했다. 터키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처럼 3월 마지막 일요일부터 10월 마지막 일요일(2015년은 25일)까지 서머타임을 시행한다. 따라서 이미 서머타임이 해제되어 한국보다 7시간 늦은 것이 정상이었다. 휴대폰의 현지 시간도 그렇게 표시되어 있었다.

일곱 시에 모이자고 했는데 여섯 시가 조금 넘자 전화벨이 울렸다. 시간이 지났다고 한다. 알고 보니 여전히 서머타임이 적용되고 있었다. 터키 정부가 11월 1일 총선 때 유권자들이 좀 더 밝은 시간에 투표하도록 서머타임 해제를 8일까지 2주일이나 늦췄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유권자에 대한 배려였을까? 예년처럼 서머타임이 끝난 줄 알고 있는 유권자들이 여유 있게 투표소로 갔다가 투표 마감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태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정부 시책을 삐딱한 시선에서 보던 버릇 때문이겠지.

2015년 11월 1일 (일)

팔색조의 도시

지도로 보는 터키의 형상은 두 날개를 좍 펴고 발칸 반도를 향해 달려드는 괴조(怪鳥)의 머리통 같다. 오른쪽 날개는 조지아와 러시아, 왼쪽 날개는 시리아와 요르단이다. 이 괴조가 발칸 반도로 쭉 내민 뾰족한 뿔 같은 곳에 터키 수도 이스탄불이 있다.

이스탄불의 북쪽에는 흑해, 남쪽에는 마르마라 해가 있고, 두 바다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도시를 동과 서로 나누고 있다. 인문 지리적으로 동쪽은 아시아, 서쪽은 유럽이다. 그래서 이 도시를 두 대륙에 걸쳐 있는 도시라 한다.

오랜 역사에서 볼 때 이스탄불은 비교적 새로운 이름이다. 이 도시는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의 식민 도시 비잔티온으로 역사에 데뷔했다. 서기 196년 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자 비잔티움으로 발음이 바뀌었고, 326년 기독교로 개종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그의 도시(콘스탄티노폴리스)가 되었다. 그 무렵부터 다신교 전통이 풍부한 로마 시를 대신해 이곳이 제국의 중심지로 군림했다.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어 이스탄불(‘이슬람의 도시’)이 된 것은 1453년의 일이다.

800년 이상 헬레니즘의 땅이었고 1100년 동안 기독교(정교회)의 중심이었으며 500년 넘게 이슬람의 보루였던 곳. 역사 문화적 관점에서 이스탄불보다 더 매력적인 도시는 유럽에 없다. 그래서 흔히들 유럽 여행을 할 때는 이스탄불을 마지막에 가라고 한다. 이스탄불을 첫 기착지로 삼으면 나머지 일정이 시시해질 거라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소 주둥이 구역

보스포루스 해협은 남쪽으로 흐르다가 마르마라 해와 합류하기 직전 이스탄불의 유럽 지역을 파고 들어가 이 지역을 둘로 갈라놓는다. 8킬로미터쯤 되는 이 좁은 만은 뿔처럼 생긴데다 황금빛 물결을 자랑해서 ‘할리치(금각만, 金角灣)’라 불린다. 영어로는 골든 혼.

금각만,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로 둘러싸인 소 주둥이 같은 곳이 이른바 ‘구 이스탄불’로, 이스탄불 역사 관광의 핵심 구역이다. 로마 시대 대전차 경주장이던 술탄 아흐메트 광장이 있고, 성 소피아 박물관과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가 광장을 사이에 둔 채 마주보고 있다. 성 소피아 박물관은 로마 시대 정교회의 대성당이고,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오스만 제국이 자존심을 걸고 성 소피아에 도전장을 내민 이슬람 사원 건축의 정수이다.

광장 바로 북쪽에는 로마 시대 지하 물 저장소인 예레바탄 사라이, 성 소피아 박물관 너머 해협 연안에는 오스만 제국 술탄의 거처였던 톱카프 궁전이 자리 잡고 있다. 이스탄불에서 딱 하루밖에 시간이 없다면 소 주둥이 구역에서 노니는 것이 정답이다. 이스탄불을 다 돌아봤다는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술탄 아흐메트 광장

‘히포드롬 광장’으로도 불리는 이 광장의 백미는 오벨리스크.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 신앙의 상징물로 만들어지던 오벨리스크가 이슬람의 도시에, 그것도 세 개나 세워져 있다. 가장 규모가 크고 멋진 것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무려 기원전 15세기에 만들어졌다. 서기 479년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뱀 머리의 오벨리스크, 940년 콘스탄티누스 7세가 만든 오벨리스크도 도열해 있다.

세계 제국을 두 차례나 보유했던 도시다운 모습이다. 요즘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문화재의 원산지 반환 운동이 성사되면 이 광장도 한동안은 몹시 썰렁할 듯하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제14대 술탄인 아흐메트 1세가 성 소피아 사원에 대한 경쟁심으로 1609년부터 7년 간 지은 이슬람 사원. 지름이 27.5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돔에 수많은 작은 돔을 얹은 모양이 안정감을 준다. 수많은 기둥이 받치는 각각의 아치 위에 작은 돔이 둥글게 솟았고, 돔이 점점 줄어들다가 마지막 거대한 중앙 돔에 이른다. 돔 주변에는 수많은 창을 내 자연의 빛이 내부로 비치게 했다. 돔 위에는 황금색 장식을 달고 꼭대기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별과 초승달을 얹었다.

이 모스크의 외관을 대표하는 것은 여섯 개나 되는 미나레(첨탑)이다. 미나레는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한 암송을 하는 곳으로, 전 세계에서 여섯 개의 미나레를 가진 모스크는 이곳이 유일하다. 일반적인 모스크의 미나레는 넷이라고 한다.

오스만 제국 때의 모스크는 주변에 신학교, 목욕탕, 시장, 병원 등 사회 시설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런 시설을 ‘퀼리예’라 한다. 술탄들이 매주 금요일 예배를 본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가 퀼리예를 거느리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다섯 개 문 가운데 모스크 정면으로 들어가는 문은 셋. 안뜰에는 ‘샤드르반’이라는 분수대가 있고, 모스크 옆에는 신자들이 기도하기 전에 손발을 닦는 육각형 모양의 수도 시설이 있다. 지금은 밀려드는 신자들을 위해 정원 바깥에 따로 대규모 세정 시설을 마련해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라는 평가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약 2만 1000개에 달하는 파란색 도자기 타일과 260개의 푸른빛 유리창으로 장식되어 ‘블루 모스크’란 애칭을 얻었다. 돔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세운 네 기둥은 지름이 5미터가 넘어 ‘코끼리 다리’라 불린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설교단(‘민바르’)에는 정교한 아라베스크 문양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 술탄의 전용 기도실이 있다. 여름에는 모스크 내부를 더 한층 아름답게 밝혀 주는 조명이 켜진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스크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2층 회랑은 현재 방문이 금지되어 있다.

성 소피아 박물관

 

▲ 성 소피아 박물관은 오늘날 비잔틴미술의 최고 걸작이란 찬사를 받고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에서 광장을 가로질러 5분만 걸어가면 술탄 아흐메트의 경쟁심을 촉발한 성 소피아(Αγία Σοφία, ‘성스러운 지혜’) 박물관이 나온다. 이곳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인 537년 세워져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본산으로 군림했다.

총대주교는 전 세계 3억 명의 신자를 거느린 정교회의 명예 수장으로, 지금도 금각만 앞에 새로 지어진 성당에서 예배를 집전하고 있다. 도시 이름이 이스탄불로 바뀐 지금도 그의 공식 명칭은 ‘새로운 로마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이자 세계총대주교(ο Αρχιεπίσκοπος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 Νέας Ρώμης και Οικουμενικός Πατριάρχης)’이다.

십자군전쟁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기습 점령한 십자군 일당이 성 소피아를 로마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해 사용하기도 했다(1204~1261). 1453년 동로마 멸망 뒤에는 1831년까지 모스크로 쓰이다가 1935년부터 박물관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동로마 건축의 대표작으로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이다.

시리아 난민

광장 근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한 소녀가 영어로 ‘시리아 난민’이라 쓴 종이를 들고 달려왔다. 그리고 또렷한 한국말로 “시리아 난민!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현지 가이드는 그 아이를 가리키며 “2년 전엔 조그맣더니 많이 컸네.”라고 했다.

터키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난민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거쳐 가는 곳이다. 그래서 이스탄불 거리에는 저 소녀와 같은 난민들이 곳곳에서 관광객의 동정을 구하고 있었다. 부부가 어린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소녀처럼 종이를 들고 이 거리 저 거리를 떠돌기도 했다.

2016년 1월 12일 술탄 아흐메트 광장의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앞에서 자폭 테러를 한 범인은 시리아 여인이었다. 이후 이스탄불에서 시리아 난민들이 처할 운명은 정말 생각도 하기 싫다.

톱카프 궁전

▲ 톱카프 궁전은 400년 동안 오스만 투르크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소 주둥이 모양의 끝에서 세 바다(금각만,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를 내려다보고 있는 궁전. 이 궁전에는 1465년부터 1856년까지 400년 가까이 술탄이 살았다. 중국의 자금성이 황제의 궁성이었던 시기(1421~1912)와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둘 다 규모도 대략 70만 평으로 비슷하다. 단, 엄정한 좌우 대칭의 사각형을 이루며 북경 전체를 거느린 위용의 자금성에 비해 비뚤배뚤한데다 바닷가에 치우친 톱카프 궁전은 황성의 위엄이 좀 떨어져 보인다.

톱카프는 처음에는 예니사라이(‘신궁전’)라 불리다가 나중에 궁전 내 한 구역의 이름을 따 ‘대포의 문’을 의미하는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 궁전은 비룬(외정), 엔데룬(내정), 하렘의 세 곳으로 나뉘어 있다. 각각 여러 개의 안마당이 있고 그 안마당들을 연결하는 문을 만들어 복잡한 미로를 조성해 놓았다. 처음에는 지금보다 규모도 더 크고 건축적 조화도 갖췄을지 모르나, 술탄들이 즉위할 때마다 뜯어 고친데다 대화재가 네 번이나 일어나면서 지금처럼 건물들이 불규칙하게 퍼진 꼴로 변했다고 한다.

보스포루스 해협

▲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이스탄불에서는 사진이 예쁘게 찍힌다. 조형적으로 멋진 모스크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기도 하지만, 도시 전체가 색의 배합에 능하다는 느낌을 준다. 해협을 오가는 유람선에서 그러한 색감은 정점을 찍었다. 다소 우중충한 날씨에 유람선을 탔는데도, 흰색과 빨간색을 적절히 안배한 유람선들과 양안 건물들이 마치 광합성을 하듯 음산함을 빨아들이고 산뜻함을 내뱉는다. 그에 비하면 한강변은…….

유람선은 금각만을 출발해 아타튀르크 교와 갈라타 교를 지나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나간 뒤 해협을 따라 흑해 방향으로 북동진한다. 해협 총 길이는 약 30킬로미터. 이스탄불을 유럽과 아시아로 갈라놓고 있는 해협 치고는 폭이 좁아 어떤 곳은 750미터밖에 안 된다.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고, 18세기 이후 다르다넬스 해협(마르마라 해~에게 해)과 더불어 항행권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보스포루스(Βόσπορος)’는 터키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다. 이는 소(βοὸς)가 건넌 여울(πόρος)을 뜻하는 말인데, 영어의 ‘Ox-ford’도 같은 뜻이다.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중 한 명인 아이스킬로스의 <사슬에 묶인 헤라클레스>에는 이와 관련된 신화가 나온다. 제우스가 강의 님프 이오와 바람을 피우자 헤라가 질투한다. 제우스는 헤라의 질투로부터 이오를 구하기 위해 암소로 변신시켰다. 헤라는 암소를 선물로 달라고 한 뒤 파리를 보내 이오를 괴롭히고, 이오는 이를 피해 바다를 건너고 해협을 건너 이집트로 도망간 뒤 그곳에서 왕비가 된다. 이오가 건넌 바다가 ‘이오니아’, 해협이 ‘보스포루스’란 이름을 얻었다. 이 신화는 이스탄불이 고대에 그리스인의 식민 도시(비잔티온)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스 신화가 워낙 유명하니까 터키에서도 ‘보스포루스’란 말은 통용된다. 그러나 터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명은 아니다. 터키에서는 이곳을 그냥 해협을 뜻하는 ‘보가지치(Boğaziçi)’나 ‘이스탄불 해협(İstanbul Boğazı)’으로 부른다. 해협을 횡단하는 두 개의 대교 가운데 하나도 ‘보가지치 교’다. 다른 하나는 ‘파티(Fatih) 술탄 메흐메트 교’. ‘파티'는 정복자라는 뜻으로,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메흐메트의 별칭이다. 한편 2013년에는 해저 터널을 통과해 이 해협 아래를 지나는 마르마라이 철도도 개통되어 운행 중이다.

총선

터키의 총선은 2015년에만 두 번째다. 6월 7일 총선에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집권 정의개발당(AKP)이 의회를 해산하고 5개월 만에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정의개발당의 창립자인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총선에서 개헌 선을 확보해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는 것이 목표였다.

터키 국민은 국부 케말 아타튀르크를 매우 존경하기 때문에 현재의 집권 세력도 그의 후계자들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케말의 당인 공화인민당(CHP)은 오늘날 야당으로 밀려나 있다. 케말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세속주의를 추구했으나, 현 집권 정의개발당은 이슬람교의 가치를 내세워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의개발당이 서구를 죄악의 근원으로 보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아니다. 이슬람의 가치를 중시하면서도 서구적 가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 하루 빨리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스탄불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카페에서 포도로 증류한 라키, 세계 수준의 맥주 에페스 등을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케말은 서구적 근대화로 진로를 잡았지만, 터키가 우러러본 서구와 미국은 이 나라를 소련의 위협에 대한 방파제로 여겼다. 터키가 유럽연합에는 가입하지 못하면서도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일원으로 미국의 전진 기지 역할을 해 온 것이 이를 증명한다. 터키 현대사는 민중의 이익을 구현하려는 노력과 이를 억누르고 서구의 이익에 부응하려는 군사 쿠데타의 빈발로 얼룩져 왔다. 냉전 종식 후 군부 독재의 유산을 청산하려는 노력 속에 도입된 것이 현재와 같은 유럽식 내각책임제였다.

정의개발당은 그 기반 위에서 10여 년 간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을 탄압하고 부패한 모습을 보여 6월 총선에서 패배한 것이다. 외신은 이번에도 정의개발당이 패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달랐다. 정의개발당이 49%의 득표율로 과반인 316석을 확보해 단독 정부를 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스탄불에는 지난 10월 10일의 테러가 터키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그나마 정의개발당이 개헌 선에 미달한 것이 야당에게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공화인민당은 25%의 득표율로 134석을 얻어 제1야당의 자리를 지켰다. 참고로 007영화에 나올 것 같은 외모의 우리 버스 기사는 여당에 표를 던졌다고 한다. 밤늦게까지 그들의 총선 승리를 축하하는 폭죽 소리가 요란했다.

글/사진 강응천 역사저술가 및 출판기획자,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한겨레테마여행  themetou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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