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절규! 5·18 과 2·28

매년 5월이 오면 가슴은 갑갑해지고, 머릿속은 종잡기 어려운 상념들이 엉키어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5월이 가기 전에 누구에겐가, 어디엔가 한 번은 외치고 싶었던 이야기를 써보려 합니다.

유신헌법이 아니면 나라가 망할 듯이 떠들며 18년 장기 집권을 하던 권력자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고, 이제는 민주주의가 이 땅에도 활짝 꽃피우리라 믿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신군부가 12·12 하극상으로 군부를 장악하면서 모든 대학가는 “전두환 물러가라!“는 함성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의 최루가스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최대의 대학생이 모여 시위를 했습니다.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대학교는 휴교령이 내리면서 교문 안은 군인, 교문 밖은 학생들이 있는 상식을 벗어난 상태가 되었습니다.

당시 모든 대학가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위에 참여하였고, 참여 학생들의 수나 시위 강도에서 서울이 당연히 셌습니다. 계엄령이 내려지기 전 학생들은 비상시국으로 돌입하리라는 것을 짐작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계엄령이 내려져도 각 대학은 도심에 모여 항의 시위를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17일 계엄령이 내려진 후 서울과 다른 도시는 엄격한 통제 탓인지 학교에 남아있던 학생들은 잡혀갔지만 도심은 비교적 조용했습니다. 광주 전남대학생만이 그 약속을 지켰죠. 일부러 광주를 '시범케이스'로 치려고 통제를 허술하게 했을지도 모르지만요.    

계엄령이 내려지고 단 하루 만인 5월 18일 군 공수부대는 광주에 진입하였습니다. 그 무자비한 진압을 본 격분한 시민들이 학생들과 연합하면서 시민항쟁으로 발전합니다. 당시 광주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뉴스를 통해 아는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그저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었고, 국가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줄 우리 군인이 비무장의 자국민에게 총칼을 휘둘러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공포와 무기력하게 파괴되었을 광주 시민들의 한과 슬픔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겠지요.

어느 잡지에선가 읽은 기억에 의하면, 전두환이 박정희의 눈에 띄게 된 건, 공수부대 연대장 시절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불시에 시찰을 한 부대에서, 털보 전두환 연대장 휘하의 군기가 살아있는 장병들을 보고 전두환을 총애하기 시작했답니다.

당시 전두환은 유명한 군인이었다더군요. 장병들보다 더 솔선수범하였고, 유격훈련이건 낙하훈련이건 더 열심히, 더 잘했답니다.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모든 통신 및 기밀을 관장했던 전두환은 왜 살아있는 전설로 자신을 만들어 준 공수부대를 하필 광주로 보냈을까요?

대만에서도 40여 년을 언급 자체만으로도 처벌이 되었던 슬픈 역사가 있습니다. 2·28 사건입니다.

일본의 패망으로 영토를 회복한 장개석 중화민국 정부는 공산당과의 국공내전으로 대만에 정예관료나 군인들을 파견할 수가 없어 천이를 행정장관에 임명하여 관리합니다.

일제하에 이등국민으로 차별을 받아오던 대만인들은 기대와는 다르게 새롭게 완장을 차고 중국에서 내려온 외성인들에 의해 통치를 받게됩니다. 마치 독립군을 때려잡던 친일 경찰이, 해방 후에 대한민국 경찰이 되어 또다시 권력을 유지하며 독립운동하던 사람을 공산당이라고 잡아 죽이는 그런 기막힌 현실처럼!

일제하의 대만인들은 일본인과 동종 근무조건에서 60% 수준의 임금을 받았는데, 국민당 치하에서는 외성인들에 비해 50%도 안 되는 차별을 받았고, 아예 고위직에는 발도 붙이지 못했습니다. 또한 일본인들의 가옥도 대부분 외성인들이 차지했고요. 그들에게 대만은 전쟁수행을 위한 인력 및 군수물자 보급기지였을 뿐입니다.

1947년 2월 27일 밤, 타이베이 한 빌딩에서 전매 품목이던 담배를 불법으로 판매하던 여인을 단속반원들이 총으로 내려치는 등 심한 구타를 하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항의합니다. 그러자 경찰이 발포하고 한 학생이 사망합니다.

다음날 2월 28일 분노한 군중들이 발포한 경찰을 처벌하라고 시위하자 오히려 타이베이에 계엄을 선포하였고, 이에 더욱 격분한 시민들은 경찰서를 습격하고 이 와중에 경찰이 사망합니다. 시위대가 천이의 집무실로 모여들자, 군인들이 기관총을 난사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 1947년 2월 28일, 타이완 시내에서 시위하는 시위대(출처 Wikipedia)

그러자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으로 성난 군중의 시위가 확대되고, 방송국을 점령한 시위대는 대만 전역에서 궐기하자고 외칩니다. 그동안 착취를 일삼던 개(일본)가 물러가니 돼지(외성인)가 들어와 재산마저 빼앗아 간다(狗去猪來,구거저래)고 외치며 대만인들의 시위가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3월 2일 행정장관 천이는 방송을 통해 4개 항을 공표합니다.

1. 계엄 즉시 해제

2. 체포된 시민 석방

3. 군인과 경찰의 발포 금지

4. 참의원에서 대표를 추천, 정부 관리와 공동으로 처리위원회 구성.

3월 4일 이후 사태는 진정되기 시작했고, 처리위원회는 국민의 지지를 받습니다. 처리위원회는 사태 수습을 넘어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면서, 대만의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 조 요구’를 내놓습니다.

대만 내부의 병력으로는 시위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천이 행정장관은 유화적인 태도로 시간을 끌면서 본토의 장개석에게 증원을 요청하고, 3월 8일 새벽 두 시에 국민당 군 21사단이 타이베이시로 진입해 시위대 진압에 나섭니다. 이로 인해 대만 출신 지식인과 주민대표들 상당수가 살해, 체포 또는 실종되었고 일부는 도망칩니다. 가오슝(高雄,고웅), 지룽(基隆,기융), 타이난(臺南,대남), 자이(嘉義,가의) 등 주로 남쪽에 진입한 국민당의 경찰과 계엄군은 무차별적인 학살과 약탈을 자행합니다.

▲ 2.28 운동 진압 사진 (출처 Wikipedia)
▲ 2.28 운동 학살 사진 (출처 Wikipedia)
▲ 2.28 운동 학살 사진 (출처 Wikipedia)

10여 일간 섬 전체는 초토화되었고, 그 기간 3만 여명이 살해· 실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장개석은 시민의 지지를 받았던 처리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하고, 상당수를 처형했으며 5월 16일 사태 종료를 선언합니다.

1949년 공산당에 패한 장개석의 중국 국민당은 12월에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로 옮기며, 약 60만의 군인·경찰과 그외 20~40만을 합친 외성인이 들어와 장개석 정권의 기반이 됩니다. 계엄하의 대만에서는 내전 반대나 평화회담 혹은 민생문제 개선을 요구하는 사람이나 언론은 무조건 공산당, 간첩, 파괴분자, 음모분자로 간주되어 처벌받았습니다.

1987년 7월 장개석 아들 장경국 총통의 명령으로 계엄이 해제되기 전까지 38년 동안 2·28 사건은 금기 중의 금기어였습니다. 1995년 리덩후이총통이 국가차원에서 희생자 가족들에게 사과하였고, 50년 만인 1997년 중화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타이베이에 기념공원이 세워졌습니다.

▲ 2·28 사건 공원 내에 있는 2·28 사건 기념관.(출처 Wikipedia)
▲ 2·28 사건 공원 내에 있는 2·28 사건 기념관.(출처 Wikipedia)

1980년 군에 입대하고 군 생활을 하면서 많이 듣게 된 단어, 군대용어라고 말하지요. 그중에 ‘시범 케이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상급자가 다수를 통솔하기 위해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지요. 여러 사람 중에 하나를 골라 폭력을 행사하거나 체벌을 가해서 자기가 의도한 효과를 얻는 것이지요. 군대뿐만 아니라 폭력조직이나 운동부 등에서 많이 사용하다가 종종 말썽이 일기도 하고요.

중국역사에서 이 ‘시범 케이스’를 사용한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漢나라 유방은 여러모로 楚나라 항우의 적수가 되지 못하지만, 최후의 승자가 됩니다. 대장군 한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지요.

유방이 한신을 만났을 때 변변치 못한 외모에 실망한 유방이 군사를 조련이나 할 수 있겠냐고 묻자, 가능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약간의 조소기를 머금고 궁녀들도 조련시킬 수 있는지 묻습니다. 역시 가능하다고 하자, 당장 시범을 보이라고 합니다.

궁녀를 연병장에 모아놓고 군대식으로 편제합니다. 유방의 애첩을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그 휘하에 궁녀들을 두었으며 한신은 단상에 올라 조련합니다. 궁녀들은 소풍이라도 나온 듯 깔깔거리거나, 아니면 짜증을 부리며 한신의 명령을 누구도 따르지 않습니다.

한신은 군령은 따르지 않는 자는 참수를 하겠다고 하였지만 마찬가지! 그러자 한신은 유방이 말릴 틈도 없이 유방의 애첩인 지휘관의 목을 칩니다. 시범 케이스였지요. 그리고 다시 단상에서 명령을 하자 정규군 저리가라 질서 정연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명령을 따릅니다.

오월도 다 가는 이 밤, 구천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시범 케이스’로 죽어간 억울하고 원통한 영령들에게 삼가 머리 숙여 사죄를 올립니다. 재수를 하면서까지 원하던 서울 법대에 들어갔다가, 군부독재를 반대하면서 피우지도 못하고 떨어진 꽃잎이 되어버린 고등학교 반장 친구의 이름도 마음속으로 불러봅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총통 취임사를 하던 차이잉원의 연설 중에 “새로운 개념의 민주주의는 국민 모두의 행복입니다.” 하던 말이 귓가에 맴돕니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동호 주주통신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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