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정문(肅靖門)

▲ 숙정문

숙정문의 이름들

소나무 숲을 내려오면 숙정문(肅靖門)에 이른다. 능선에 외따로 세워진 성문은 인가와 멀리 떨어져 좀 외로워 보인다고 할까? 낯설어 보인다고 할까? 그러나 정갈한 그 모습과 금방 친숙해진다.

숙정문은 다른 성문과 같이 태조 5년(1396)에 세워졌는데, 당시 성문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그 이름이 언제 바뀌었는지 알 수 없으나, 중종4년(1509) 6월 3일 기사에 숙정문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다.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다. 시장을 옮기며 북을 치지 못하게 하니 이는 한재(旱災)때문이었다.”

그 후로도 숙청문이란 이름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선조 9년에도 가뭄이 심하여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정조 때 ‘승정원일기’에도 쓰여 있다.

숙정문은 속칭으로 정북문 또는 북대문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그렇게 불리기보다 실제로 북정문(北靖門) 또는 북청문(北靑文)으로 더 많이 불리었다.

소외된 숙정문

숙정문은 도성 안 삼청동계곡에서 도성 밖 성북동으로 나가는 북쪽의 대문이다. 이 문을 나가면 한양에서 원산까지 가는 경원가도의 지름길에 이른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일반통로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숙청문 건립 후 18년째인 태종 13년 풍수지리가 최양선이 백악산의 양팔에 해당하는 창의문과 숙청문을 닫아서 지맥(地脈)을 보존해야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에 따라 숙정문은 폐쇄되었고, 창의문 가는 길과 숙정문 가는 길에 소나무를 심었다. 이로 인해 일반인의 통행은 어려워졌다.

숙정문을 폐쇄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문이 북문으로서 ‘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 문을 열어두면 상중하간지풍(桑中河間之風)이라는 부녀자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바람이 불어온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조선 현종 때 실학자인 오주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나오는데, 상중하간지풍이란 “고대 중국 주나라 선혜왕 때 귀족들이 매우 음란하여 뽕나무밭에서 남녀가 밀회하였다.”는 ‘시경’의 문구에서 유래한 것으로 부녀자의 풍기문란행위를 뜻한다.

실제로 숙정문 밖 성북동 일원에는 선잠단[先蠶壇 :사적 제 83호, 조선시대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왕비가 서릉씨(西陵氏)라는 잠신(蠶神)에게 제사모시고 친잠례(親蠶禮)를 행했던 곳]이 있었고, 양잠을 위한 뽕나무밭이 있었다. 뽕잎이 무성한 뽕나무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성추행이나 성폭행이 흔히 일어난다. 조선시대에도 사대부집 부녀자들이 숙정문 밖에 있는 뽕나무밭 안에서 은밀한 애정을 즐겼다는 소문이 퍼졌다.

한양 세시풍속 가운데 정월대보름 전에 부녀자들이 숙정문을 세 차례 다녀오면 그 해에 일어날 재난의 운수가 사라진다고 하여 도성 안 많은 부녀자들이 숙정문을 찾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와 함께 숙정문을 찾는 부녀자를 희롱하러오는 남정네들이 몰려들어 풍기가 문란해지자 성문을 닫았다고도 한다.

숙정문을 열 때도 있었다. 여름철 한발이 닥치면, 숙정문은 열고, 숭례문을 닫고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이런 행사는 북쪽은 음(陰)에 해당하며 남쪽은 양(陽)에 해당한다는 음양오행설에 근거한다. 말하자면, 가뭄에는 북쪽 숙정문을 열어 음기(陰氣)를 도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남쪽 숭례문을 닫아 양기(陽氣)는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가뭄에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여는 이유는 남문은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에서 화(火)에 해당하고, 북문은 수(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남문을 닫아 화기를 막고 북문으로 물 기운이 도성 안으로 들어와 가득 차게 해야 비가 온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기우제를 지낼 때는 시장을 옮기고, 인정과 파루(罷漏)를 치지 않았다.

숙정문이 다른 문과 다른 점

숙정문이 도성의 다른 문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다른 문이 모두 평지 또는 낮은 언덕에 있는데, 숙정문만 유일하게 산속에 있다. 4대문과 4소문의 격식을 갖추려다보니 실제로는 별로 필요 없는 문을 산속에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문 앞뒤로 길이 없는 문이 되었고, 문 구실을 못하는 성문이 되었다.

둘째, 현재 서울 성문 중에서 성문 양쪽으로 모두 성벽이 연결된 문은 숙정문뿐이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성문 양쪽 성벽이 없어졌고, 창의문과 혜화문, 광희문은 한쪽으로만 성벽이 연결되어있다.

셋째, 성문 이름에 유교의 덕목인 오상(五常)의 이념을 넣지 않은 유일한 대문이다. 동쪽의 ‘인(仁)’, 서쪽의 ‘의(義)’, 남쪽의 ‘예(禮)’를 각 대문의 이름에 넣어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이 되었으나 북문에는 그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 대신 탕춘대성의 성문인 홍지문(弘智門)에 반영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홍지문은 도성 축조시점으로부터 300년도 더 지난 숙종 때 일이고 보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다.

넷째, 현재 서울성곽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홍예문 천장에 그림이 없다. 숭례문과 흥인지문, 광희문의 천장에는 용이 그려져 있고, 창의문과 혜화문의 천장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다섯째, 서울성곽의 다른 성문에는 문루가 있으나, 숙정문에는 문루가 없었다. 숙정문에 문루를 올렸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영조 대의 지도에도 숙정문은 암문으로 표시해놓았다.

▲ 18세기 후반 도성도(都城圖)중 숙청문 부분

현재의 문루는 1975년 숙정문을 복원할 때 세운 것이다. 태조 때 문루가 있었을 것이라는 희박한 근거에 따라 이제까지 없었던 문루를 올렸을 것이나, 성문의 현판 글씨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 것이나 원형과 맞지 않는 서툰 모방은 늘 역겨움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문루가 있었다면, 현판은 肅靖門(숙정문)이 아니라 肅淸門(숙청문)이었을 것이고, 연산군 10년 (1504) 성문의 위치를 오른쪽으로 옮긴 것이라면, 지금의 위치보다 좀 더 서쪽에 위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 있었던 자리를 찾아 세워 성문을 복원했어야 사리에 맞는 일이다. 또 숙정문으로 부르기 시작했을 때는 문루가 없었으므로 현판도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사실에 맞지 않는 복원은 개운치 않는 뒷맛을 남길 뿐이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5년 10월30일 서울 북악산 등산길에 숙정문에 이르러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세옥 경호실장(맨 오른쪽), 조기숙 홍보수석(맨 왼쪽)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한겨레21 제764호). 2016년 4월 1일 38년만에 숙정문이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글 :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 이동구 에디터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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