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우리 것] 이상직 주주통신원

庸質臨臣十載回 용렬한 자질로 보위에 오른 지 10년이라
未敷寬政愧難裁 너그러운 정사 펼치지 못해 부끄럽다오.
朝無勉弼思宗社 보정에 보필해주고 나라 걱정하는 사람 없는 것은
都自沖吾乏德恢 모든 것 이내 몸에 덕이 없어서라네

이 한시(漢詩)가 연산군이 지은 것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연산군일기》 10년(1504) 3월 24일 치에는 위처럼 자신이 용렬하며 너그러운 정사를 펼치지 못해 부끄럽다고 하고 있습니다. 피비린내를 풍기던 시대 이전의 연산군은 이렇게도 뜻밖에 한시를 즐겨 썼다고 합니다. 또 《연산군일기》 41권(1502) 8월 21일 치에도 다음과 같은 한시가 보입니다.

金風無處淡 가을바람은 곳곳마다 맑은데
黃菊滿階香 황국의 향기 뜰에 가득하여라
寂寞銀臺裏 적막한 승정원 안에는
須浮賜酒觴 내려준 술잔에 그 꽃이 뜨리니

이렇게 자연을 노래하고 그 자연 속에서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았지만 한 시 곳곳에는 문득문득 자신 만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한다는 독단을 내비치기도 합니다. 만일 연산군이 피 묻은 저고리를 보지 못했고 이렇게 한시를 즐기면서 마음을 다스렸다면 그 수많은 사람들의 피비린내는 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직  ysangl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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