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우리 것] 마광남 주주통신원

배중손은 원종(元宗) 때에 여러 관직을 거쳐 장군(將軍)에 이르렀다. 국도를 개경(開京)으로 다시 옮기면서 방(榜)을 붙이어 일정한 기일 내에 모두 돌아가라고 독촉하였던바 삼별초(三別抄)가 딴 생각을 가지고 복종하지 않았다. 그때 왕이 장군 김지저를 강화로 보내서 삼별초를 해산하고 그 명단을 작성해 가지고 돌아오게 하였더니 삼별초 성원들은 그 명단이 몽고에 보고되었을 것으로 우려하고 나라를 배반할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배중손은 야별초 지유(指諭) 노영희(盧永禧) 등과 반란을 일으키고 서울(강화) 거리로 사람들을 파견하여 “몽고의 대병이 침입하여 백성을 살육하니 나라를 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다 구정으로 모이라!”라고 외치게 하였으므로 순식간에 서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서 앞을 다투어 배를 잡아 타고 물을 건너다가 빠져 죽은 사람도 많았다.

이어 삼별초는 사람들의 내왕을 금지하고 강 언덕을 순찰하면서 외치기를 “양반으로서 배에서 내려오지 않는 자는 모조리 죽인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이 모두 무서워서 배에서 내렸다. 그 중에는 배를 띄워서 개경으로 향하려는 자가 있었으나 적이 작은 배를 타고 추격하며 활을 쏘았으므로 모두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성중 사람들은 놀라서 숲과 풀덤불 속으로 흩어져 숨었으며 아동과 부녀들의 곡성이 낭자했다.

삼별초는 금강고(金剛庫)의 병기를 꺼내서 군졸들에게 나누어 주고 성에 의거하여 수비를 공고히 했다. 배중손과 노영희는 삼별초를 데리고 시랑(市廊)에 모여서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협박하여 왕으로 삼고 관부(官府)를 설치했는데 대장군 유존혁(劉存奕)과 상서좌승(尙書左承) 이신손(李信孫)을 좌우 승선으로 임명하였다.

당초에 적이 반란을 꾸밀 때에 장군 이백기(李白起)가 불응했으므로 이때 이백기를 몽고에서 파견해 온 회회(回回) 사람들과 함께 거리에서 베어 죽였고 장군 현문혁(玄文奕)의 처와 직학(直學) 정문감(鄭文監) 부처도 모두 이 통에 죽었다. 참지 정사 채정(蔡楨), 추밀 부사 김련(金鍊) 도병마 녹사 강지소(康之紹)는 난을 피해서 교포(橋浦)로 나갔는데 적의 기병이 추격했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강화를 수비하던 병졸들이 대부분 도망하여 출륙(出陸)하였으므로 적들도 수비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강화에 있는 배들을 전부 모아서 그 배에 공사(公私)의 재물이며 자녀들을 싣고 남녘으로 내려갔는데 구포(仇浦)로부터 강파강(缸破江)에 이르는 어간에 무려 1천여 척의 배가 서로 꼬리를 물게 되었다.

당시 조정의 백관들은 모두 왕을 맞으러 나가고 그의 처자 권속은 모두 적에게 노략질 당하여 통곡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전 중서 사인 이숙진(李淑眞)과 낭장 윤길보(尹吉甫)는 노예를 모아 가지고 뒤떨어진 적을 추격해서 구포에서 5명을 죽이고 부락산(浮落山)에 이르러 해면을 향하여 시위를 했더니 적들이 바라보고 공포에 싸였다. 적들은 몽고병이 온 것으로 추측하고 드디어 먼 곳으로 도망쳤다. 이에 이숙진은 낭중 전문윤(田文胤) 등과 함께 부고(府庫)를 봉인하고 사람을 시켜 경비케 하였으므로 무뢰한들이 감히 도적질하지 못했다.

적들은 진도(珍島)로 들어가서 근거지로 삼고 인근 고을들을 노략질하였으므로 왕이 김방경(金方慶)에게 명령하여 토벌케 했는데 이듬해에 김방경은 몽고 원수 흔도 등과 함께 3군을 통솔하고 적을 격파했던바 적은 모두 처자를 버리고 멀리 도망쳤으며 적장 김통정(金通精)이 패잔병을 거느리고 탐라(耽羅)로 들어갔다.

당초에 수사공(守司空)으로 치사(致仕)한 이보(李甫), 판 태사국사(判太史局事) 안방열(安邦悅), 상장군 지계방(池桂芳), 대장군 강위보(姜渭輔), 장군 김지숙(金之淑), 대장군으로 치사한 송숙(宋肅) 소경 임굉(任宏)이 모두 적에게 잡혀 있었는데 적이 패배하자 이보, 지계방은 살해당했고 강위보, 김지숙, 송숙, 임굉은 죽음을 면하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신손은 적을 따라서 탐라로 가려다가 중도에서 돌아왔다.

안방열은 국도를 옮길 때에 봉은사(奉恩寺)의 태조(太祖)의 화상(眞影) 앞에서 점을 쳐보았는데 “반(半)은 생존하고 반은 멸망”할 것이라는 점괘를 얻었다. 그는 멸망할 자는 출륙(出陸)하는 자요 생존할 자는 삼별초를 따라서 섬으로 들어가는 자라고 생각하고 적을 따라서 남녘으로 내려가면서 적들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용손(龍孫)은 12대(代)에서 끝나고 남녘으로 향해 가서 새로 국도를 건설한다는 예언이 지금 여기서 실현되고 있다”라고 하면서 드디어 주모자가 되었다가 적이 패배하자 몸을 빼어 장차 김방경을 찾아가려 하였으므로 병사들이 때려 죽였다.

유존혁은 남해현(南海縣)에 근거를 두고 연해 지방을 노략질하다가 적들이 탐라로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도 또한 80여 척의 배를 영솔하고 따라갔다. 적들이 탐라로 들어 간 후는 안팎으로 성을 쌓고 때때로 나와서 노략질하면서 고을들을 횡행하고 고을 수령을 살해하니 연해 지방에 인연이 드물어졌다. 그래서 왕이 김통정의 조카 김찬(金贊)과 오인절(吳仁節) 등 6명을 보내서 귀순하라고 권유했더니 김통정이 김찬만을 남겨 두고 그 외는 모두 죽였다.

14년에 왕이 김방경에게 토벌을 명령하니 김방경이 흔도 등과 함께 탐라로 진공해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때 김통정은 70여 명의 수하를 데리고 산속으로 도망해 들어가서 목매어 자살했다. 이리하여 탐라도 평정되었다.

마광남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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