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우리 것] 이상직 주주통신원

청백리의 대표적인 조선의 선비를 꼽으라면 오리 대감 이원익(1547-1634)을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40년 정승을 지낸 사람이 두어칸 띠집(초가)이 고작이었다는 게 이원익의 청빈을 잘 말해줍니다. 이원익은 또한 목에 힘주고 거들먹거리지 않은 관리로도 알려져 있는데 한번은 그가 안주 목사로 임명된 다음날 혼자 말을 타고 임지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 시대 지방관에 임명되면 바로 이튿날 홀로 임지로 출발하는 일은 흔치 않았으며 대개는 정부기관의 유력자들에게 인사를 하는 동안 신임 수령을 모시러 현지에서 아전들이 서울에 도착하면 신임관은 그들과 함께 모양새 있게 내려가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지요.

낮은 관직에 있었던 젊은 관리 조익(1579-1655)도 백성을 끔찍하게 여긴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엄청난 책을 읽었으면서도 늘 읽은 글이 적어서 듣고 본 것이 고루하고 지식이 어둡다고 겸손해 합니다. 그러한 탐구적인 자세였기에 사교적이지 않아 승진도 남보다 느렸습니다.

그는 평안도 평사라는 관리로 내려가 백성들이 기근으로 굶주리는 것을 보고 《제기활민방》이라는 책을 짓게 되는데 이 책은 백성들이 기근 때 곡물 외에 향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먹거리를 정리해 놓은 책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흉년 따위의 기근 때 백성들이 장차 죽게 될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이 책을 지었다고 말입니다.

경기도 가평에서 한때 숯을 구워 팔던 김육(1580-1658)도 농촌의 현실을 몸으로 겪은 관리였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손수 하던 그는 새벽에 파루를 치면 동대문에 가장 먼저 들어온 숯장수였다고 전해질 만큼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백성들의 삶을 고스란히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효종의 부름으로 우의정이 되었을 때 (1649) “지방 토호와 부자들이 백성들을 함부로 대하고 땅을 차지하는데서 백성들이 곤궁해 졌다” 고 지적하며 국정에 이러한 불법을 엄히 다스릴 것을 주장하지요. 김육의 이러한 의지는 훗날 대동법의 기초를 마련하는 토대가 됩니다.

이와 같이 이원익, 조익, 김육은 언제나 백성 가까이 현장에서 그들의 삶을 직접 보살피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후대의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상직  ysangl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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