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의 어제와 오늘
성북구 방향의 전망대는 도성 밖으로 나가도록 설치된 구름다리 위에 있다. 이곳에서 보면 성북동 부자촌이 한눈에 들어온다. 평창동과 마찬가지로 성북동도 오염되지 않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부자촌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부자촌이 들어서면서부터 무분별한 개발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언짢게 해왔다. 이를 안타까워하는 시 한편을 쓴 이가 김광섭 시인이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후략-----------------

                -------------전략-----------------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성북동 비둘기에서⟩

 조선시대에는 성북동을 북저동(北渚洞)이라 했다. 서민들이 성북동 언덕에 복숭아나무를 심어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복사꽃이 필 때는 꽃놀이하러 오는 사람들과 거마(車馬)가 성북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민간인들은 도성 북쪽을 ‘도화동(桃花洞)'이라고 불렀다. 어영청의 부대가 그곳에 주둔하여 ‘성북둔(城北屯)’이라고 불렀고, 옛날에는 ‘묵사(墨寺)’라는 절이 있어 ‘묵사동(墨寺洞)’이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사연 많은 그 이름들이 없어지고, 성북정(城北町)이라는 일본식 이름만 남았다. 성북정은 광복 후 성북동이 되었다.

▲ 성북동 전경(위쪽의 부자촌과 아래쪽의 달동네가 대조를 이룬다)

  성북동은 기념물이 많은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라 할 수 있는 간송미술관,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이 별장으로 지었다가 후에 의친왕(義親王, 1877-1955)의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성락원(城樂園), 만해 한용운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집을 지어 말년을 지냈던 심우장(尋牛莊), 조선 말기 젓갈상인 이종상의 별장을 대림산업 이재준 회장이 매입하여 이름이 바뀐 이재준가,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는 전통찻집이 된 소설가 이태준의 옛집,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시민문화유산으로 지정했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혜곡 최순우(1916-1884)의 옛집 등이 성북동에 있다.

▲ 최순우 가옥

이 기념물과 문화재들이 대부분 있는 곳은 그림처럼 펼쳐진 북정마을이다.

▲ 만해 한용운의 ‘尋牛莊(심우장)’

 이태준의 집
이 중에서 몇몇 기념물과 문화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는 서울특별시 민속 문화재 제 11호로 지정된 상허(常虛) 이태준(李泰俊)의 가옥이다.

▲ 이태준 가옥 입구

그는 1933년에 이사 온 후 1946년 월북할 때까지 이 집에 살면서 ‘황진이’, ‘왕자호동’ 등을 집필했다. 지금 전통찻집의 이름이 된 수연산방(壽硯山房)은 이태준이 지은 이 집의 당호이다. 그 당호는 ‘문인들이 모이는 산속의 집’이라는 뜻이다.

▲ ‘壽硯山房(수연산방)’이라는 당호

  이태준의 고택은 사랑채를 따로 두지 않고 사랑채와 안채를 합쳐 누마루를 붙여놓은 것이 특징이다. 그리하여 안채에서 맞은편 언덕의 성곽을 바라볼 수 있게 설계했다. 그것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전통한옥에서 개량한옥으로 변모해갔던 모습의 일단이다. 상허는 그 누마루에 앉아 성곽에 쏟아지는 아침햇살이며, 고즈넉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석양을 음미했겠지만, 지금은 높은 집들이 많이 들어차서 그가 탐닉했던 성곽을 볼 수 없다. 

▲ 이태준 가옥의 누마루


 그는 말했다. “석양은 햇빛이 아니라 고대미술품을 비추는 환등빛”이라고. 그의 후기 생애가 이념으로 얼룩졌다 할지라도 그는 어쩔 수 없이 골동품을 애호하는 복고주의자였다. 프로문학이 휩쓸던 시대에도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고독한 소설가였다.  

▲ 이태준 가옥의 뜰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과 간송미술관
휘문고보와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간송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서화와 골동품을 수집했다.

▲ 간송 전형필 흉상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하였고,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북단장 안에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과 불상 등도 수집했다. 그의 소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 신윤복, 김홍도, 장승업 등 회화작품과 서예, 자기류, 석불, 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간송미술관 정문 간판

 1940년에는 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힘썼고, 광복 후에는 문화재보존위원으로 고적 보존에 주력했다. 1962년 그에게 대한민국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보화각이라는 이름은 오세창이 지은 것으로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라는 뜻이다.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다. 리움미술관, 호림박물관과 더불어 대한민국 3대 사립박물관 중의 하나인 간송미술관에는 국보가 12점, 보물이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가 4점이나 보존되어있다. 1971년부터 봄, 가을로 일 년에 두 번씩만 일반에 무료로 공개했던 것과 같이, 그동안 전시보다는 연구 및 보존에 역점을 둔 미술관이었다. 그러나 2014년 3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개관전을 계기로 간송소장품 상설전을 열면서 지금까지의 운영형태를 바꾸려 하고 있다.

▲ 간송미술관 전경

 간송미술관에는 몇 번의 위기가 닥치기도 했다. 한국동란 때 미술관이 송두리째 사라질 위기도 있었고,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는 북한군이 간송미술관의 유물들을 평양으로 이송하려하여 개관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이때 짐을 싸는 척 늑장부리며 시일을 끌었던 최순우 등의 지혜로 그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간송미술관의 가치는 돈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며, 경매에 붙인다면 다 파는 데만 1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여담으로 리움미술관에 가서 간송미술관을 판다고 하면, 돈을 따지지 말고 우리한테 넘기란 말을 듣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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