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에서는 동학란보다 10년이나 앞서 농어민 중심의 민중봉기가 있었다. 완도 가리포 농민항쟁은 1883년 당시 강진현에 속해있던 가리포진의 섬사람들이 첨사 이상돈과 下吏(하리)들의 탐학에 분노하여 일으킨 봉기다.

이상돈은 부임하자마자 간악한 관속들과 야합하여 戰艦(전함) 건조를 빙자하여 날마다 주민들을 동원하여 소나무(황장목)를 베어다가 상선을 만들어 팔아 사리사욕을 채웠다. 또한 비자나무 등, 완도 특산물을 징발하고, 매일 주지육림에 빠져 사슴, 노루 등을 사냥하면서 많은 민폐를 끼쳤다. 자기 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곤장으로 다스려 백성들의 원망이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이러한 탐학에 맞서 화흥리 출신의 최도일, 당인리 출신의 허사겸, 그리고 문사순, 채운집 등은 첨사와 하리들에 대한 응징을 결의하고 거사계획을 세웠다. 11월 18일 자시에 나팔소리를 신호로 군중들이 모이도록 하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관청에 몰려가 옥문을 파괴하고 억울하게 갇혀있던 죄수들을 풀어주고 첨사를 포박하여 객사 아래에 무릎 꿇게 하였다.

이상돈 첨사는 겨우 죽음을 면하고 11월 19일 추운 날씨 속에 군중들에 의하여 원동나루를 건너 달도(당시에는 섬)에 유배되었다. 첨사와 관속들에게 핍박을 받던 강진 사초리 어부들도 합세하여 방면된 죄수들과 동헌을 부수고 禁松吏(금송리)의 이방의 집 등을 습격 파괴하였다.

이상돈을 쫓아냈으나 새로운 첨사가 부임하지 않는 무정부상태였던 완도는 점차 무질서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유지들이 모여 島民大會(도민대회)를 열어 鄕道廳(향도청)을 설치하여 최여안을 향도유사로 선정하고, 박일지, 김보국, 조내익에게 각 부분을 담당하게 하는 향촌자치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민란의 범주를 벗어나 갑오동학농민항쟁 단계에 나타나는 집강소보다 선구적인 성격을 띠는 것으로 향촌민 스스로가 질서를 회복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 높은 민주주의의 단계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조정에서는 점차 치안이 회복되고 사태가 수습되자 장흥부사 송기노로 하여금 사태의 전말을 조사하도록 하였고, 주모자인 허사겸을 전라병영으로 압송하여 효수하였다. 허사겸은 모든 것은 저 혼자서 한 일이라고 주장하여 한사람의 희생으로 끝난 것이 다른 지역의 민란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왕조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침탈을 일삼던 이상돈을 의금부로 압송하여 엄중히 국문하고 그가 빼앗은 錢穀(전곡)은 모두 백성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향도청이라는 명칭으로 향촌자치를 스스로 하였던 점을 높이 사야 할 것이다.

국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역적이라 할 수 있으나 완도인들은 그 정신만은 높이 평가 하고 있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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