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이란 목재를 탄화시켜 만들어낸 물질인데 우리나라는 약 2600년 전부터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숯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의 탈해왕 편에 탈해가 어렸을 때 호공(瓠公)의 집을 빼앗기 위해 속임수로 몰래 숫돌과 숯을 묻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 (11권 신라본기 헌강왕 6년)에는 당시 경주의 민간에서 밥을 짓는데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숯을 사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관리를 하였으며 공신들이 죽었을 경우 부의품(賻儀品)으로 숯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상류층에서는 망자의 봉분을 만들 때 숯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숯이 오늘날에는 그 종류도 많아지고 사용하는 것도 다양해졌다. 숯을 이용한 장식들이 그런 것들이다. 숯을 굽는데 사용되는 나무가 주로 참나무로 알고 있는데 그건 그렇지가 않다. 충청지방이나 강원지방에서는 참나무로 숯을 굽고 있지만 유일하게 완도만은 9월에 섶(薪,가시나무)으로 숯을 굽는다. 지금이야 계절에 관계없이 굽지만 조선왕조실록 경세유표(經世遺表) 제10권 지관 수제(地官修制)를 보면 '9월(季秋)에 섶(薪)을 치고 숯을 만들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숯이나 땔나무를 보관하는 곳을 시탄고(柴炭庫), 탄소옥(炭小屋) 또는 영전(營纏), 탄막(炭幕)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제4권 지(志))

또한 이러한 숯을 굽는데 필요한 나무의 종류가 한정이 되었던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8년 무자(1408,영락 6) 10월16일(경인)의 기록을 보면 도내(道內)의 선척(船隻)이 덕적도(德積島)에 들어가서 각해[各年]의 미납(未納)한 숯을 구을 나무[炭燒木]를 싣고 오다가, 큰 바람을 만나 두 척이 깨어져서 선군(船軍)이 물에 빠져 죽은 자가 69인이고, 살아남은 자가 3인이라고 왕에게 보고하였던 기록으로 보더라도 숯을 굽는데 사용되는 나무가 따로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완도에는 자생하고 있는 나무가 숯을 굽는데 필요한 가시나무가 주 수종이어서 나무를 구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완도의 주산인 상왕산(象王山)은 해발 644m인데 90%이상이 가시나무이다. 완도에서 생산되는 숯의 량이 얼마나 많았던지 다른 진에까지 공급을 하였던 기록들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8년 갑인(1794,건륭 59) 12월25일(무인)일에 호남 위유사 서영보가 별단을 올려서 말하기를,

"완도에서는 우수영에 매달 15파(把)의 땔나무와 한 달 걸러 한 번씩 20석의 숯을 바쳐야 합니다. 땔나무는 1파에 2위(圍)의 길이를 격식으로 삼고 있는데 땔나무 묶음의 길이와 둘레는 모두 이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반드시 곧은 줄기를 골라서 가지와 잎을 잘라버리고 단단하고 빽빽하게 묶어야 하며 감히 짧고 가는 나무를 그 사이에 섞지 못합니다. 때문에 1파의 땔나무를 갖추려면 골라내고 버리고 하는 과정에서 잘라 버리는 것이 부지기수입니다. 숯은 또 2석을 1석으로 치기 때문에 들어가는 나무가 또한 매우 많습니다.

땔나무와 숯을 배정한 것이 어느 때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초의 정식은 썩은 가지와 떨어진 나뭇잎을 긁어모으는 데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속(營屬)들이 이를 틈타 농간을 부리고 퇴짜를 놓는 것이 나날이 심해져서 점차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길고 곧은 나무는 반드시 쓸 만한 재목이고 가서목(哥舒木)은 더욱이 단단하고 질긴 좋은 재목으로서 군기(軍器)의 중요한 수요인데 유독 이 섬에서만 생산됩니다. 그러니 이것은 모두 토산물 중의 기이한 보물입니다. 또 단단한 나무는 자라는 것이 매우 느려서 한 번 잘라 버리고 나면 금새 쑥쑥 자라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더욱 애석하게 여기고 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숯 굽기에 좋은 나무들도 가죽나무나 상수리나무 같은 쓸모없는 재목들과 마찬가지로 땔나무가 되어버리니 앞으로는 각별히 금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수영에서 쓰는 땔감과 숯을 급대(給代)해 주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장애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수량을 참작하여 마련해서 그 묶음 수를 줄이고 그 파와 위를 덜어야 합니다. 또 가서목(哥舒木)은 일체 소나무의 금지 규례에 따르고 경외에서 부득이하게 쓸 곳이 있으면 소나무의 규례에 의거하여 비국에 보고하고 낙인을 찍어 가져다 쓰도록 정식을 마련해 시행하소서. 보길도(甫吉島)도 땔나무를 나누어 정한 폐단이 있는데, 이 섬이 비록 완도와는 사체가 다르지만 배 만들기에 적당한 소나무가 있는 산에 대해서는 또한 진념하여 마찬가지로 신칙하고 바로잡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가죽나무나 상수리(참나무)나무 같은 쓸모없는 재목이라고 한 대목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또한 병기로도 쓸 수 있는 단단한 나무가 오직 이 섬에서만 난다는 것도 중시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참나무 숯이 최고라고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쓸모없는 나무가 참나무였다. 그런 참나무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숯 굽는데 최상으로 치는 가시나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도에는 너무도 많이 있다.

이렇게 널려있는 나무를 숲 가꾸기 사업으로 잘라진 나무들이 그대로 버려지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3대째 숯을 굽고 있는 사람이 있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완도읍 대야1리에 사는 정무삼씨로 지금은 대야 수원지가 되었지만 그 골자기에 대수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서 조상 대대로 살면서 숯을 구워왔으나 그곳에 상수원이 만들어 지면서 아랫마을로 이사를 했다.

조상에게서 터득한 기술을 버릴 수가 없어 아주 볼품없는 자그마한 가마를 만들고 그곳에서 겨우 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것이 입소문을 타고 숯 공예를 하는 사람들이 속속 사가는 것이 고작이다. 숲 가꾸기 사업으로 인해 잘라져 나딩구는 나무들을 모아 숯으로 만든다면 일석이조라고 생각한다. 가시나무로 만든 숯은 참나무 숯에 비해 쪼개지듯 벌어지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화력이 좋고 더 오래 피울 수 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 훨씬 이익이라는 것이 실수요자들의 말이다.

행정이 지원하고 상품(上品)의 숯을 만들게 하여 브렌드화 한다면 완도의 숯이 시장을 석권할 수 있다고 본다. 익히기 힘든 기능이 없어지지 않고 계승되어 소득과 직결되기를 희망한다. 이것은 기능인의 뜻이기도 하지만 조사자의 뜻이기도 하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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