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지난 2015년 10월 31일부터 11월 11일까지 12일간 진행되었던 <그리스 터키 문화기행-유럽 문명의 뿌리를 찾아서>의 동행 강사 강응천선생의 답사기를 편집한 것이다.

2015년 11월 9일 (월)

폴리스

아테네의 마지막 날, 일찌감치 이 도시의 상징인 아크로폴리스에 올랐다. 아크로폴리스는 고대 아테네 폴리스의 중심에 있던 언덕으로 주요한 종교 시설이 몰려 있다. 경주 남산과 비슷한 곳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서북쪽으로 보면 멀리 아고라가 있고 가까이 아레오파고스 언덕이 자리 잡고 있다. 아고라는 시장과 각종 공회당이 있어 시민들이 상거래와 집회를 하던 곳이다. 바위 언덕인 아레오파고스는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재판소로 사용되었다. 서남쪽으로는 녹지대 한편에 또 다른 바위 언덕인 프닉스(Πνύξ)가 있는데, 이곳에서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 기구인 민회(ἐκκλησία)가 열렸다.

민주주의

그리스의 국호는 그리스 민주국(Ελληνική Δημοκρατία)이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현대 국가들이 ‘공화국’이나 ‘민주공화국’을 국호에 넣는데 이 나라는 ‘공화’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공화(republic)는 왕 한 사람이 다스리는 전제와 달리 여러 사람이 함께 다스리는 체제를 말하며, 고대 로마에서 연원했다. 그러니까 공화의 원조는 고대 로마이고 민주의 원조는 고대 그리스인 셈이다. 공화 빼고 민주를 강조한 그리스의 국호는 그러한 역사적 전통을 강하게 의식한 데서 연유한 것이리라. 이제 민주주의 전통의 본산에 왔으니 그 자부심의 내력을 실컷 살펴볼 차례다. 

데모스(δῆμος)

참주가 다스리던 아테네에 민주 정치의 길을 연 사람은 솔론이었다. 기원전 594년에 그는 농민의 부채를 탕감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사람들의 경제 수준에 따라 계급을 나눠 그 계급에 따라 민회와 재판에 참여할 권리를 줬다. 그런데 이는 귀족과 평민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귀족은 노예를 잃게 되어 불만이고 평민은 빈부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니 불만이었다.

본격적인 아테네 표 민주 정치가 시작된 것은 508년 클레이스테네스 개혁 때였다. 그는 혈연 중심으로 뭉쳐 있던 기존의 네 부족을 해체하고, 아티카 전역을 인위적인 10개의 부족(φυλή)으로 나눴다. 이 10부족은 지리적으로 구분되는 행정 단위가 아니라 각각 도시, 해안, 내륙의 일정한 마을들을 포괄하는 인위적 단위였다. 한국의 수도권에 비유하자면 서울의 효자동, 고양의 주엽동, 인천의 주안동이 한 부족을 이루는 식이다. 그 10부족의 기초를 이루는 마을 단위가 데모스였는데, 클레이스테네스가 개혁을 마쳤을 때 아티카에는 139개의 데모스가 있었다.

데모스마다 구비된 시민 명단을 기초로 민주주의를 확립한 사람은 페리클레스(기원전 495~429)였다. 30세 이상의 남자 시민 가운데 10부족에서 50명씩을 추첨으로 뽑아 500인 평의회를 만든다. 단임제인 500인 평의회는 재정과 외교 업무를 담당하고 재판권도 행사한다. 가장 중요한 기능은 민회를 소집하는 것이다. 최고 의결기관인 민회는 20세 이상의 군필 남성 시민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세금을 올리거나 외국과 전쟁을 하는 등 국내외 주요 정책은 바로 민회에서 결정된다.

기원전 5세기 아티카 민회의 구성원은 약 4만 3000명에 이르렀고 의결 정족수는 6000명이었다. 따라서 6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민회 장소가 필요했는데, 따로 민회 건물을 짓지는 않았다. 앞서 말한 프닉스 언덕에서 한 달에 몇 차례의 민회가 열렸고, 1년 두 차례의 정기 민회는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열렸다.

이처럼 데모스에 등록된 시민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직접 결정하는 것을 일컬어 데모크라티아(‘데모스의 지배’)라 했다. 민주주의를 뜻하는 영어의 데모크라시는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아레오파고스(Ἄρειος Πάγος)

‘아레스의 언덕’을 뜻하는 이곳에서 열리던 재판은 모두 시민 직접 재판이었다. 한국에서 2008년에 시작된 국민 참여재판에는 국민이 배심원으로만 참여하지만, 아테네의 시민 법정에는 변호사와 검사가 따로 없었다. 시민들이 직접 고발하고 그에 대한 변호도 직접 했다.

시민 법정에 참여하는 배심원은 10부족에서 600명씩 추첨으로 선발한 6000명 중에서 지명되었다. 배심원 자격은 500인 평의회와 마찬가지로 30세 이상 남성 시민에게 주어졌다. 민사소송의 배심원은 200명, 형사소송의 배심원은 500명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였는데, 그 수를 감당하기에 아레오파고스 언덕은 좀 작아 보인다. 재판이 열리면 꽤나 시끄러웠을 것 같다.

한편 행정 책임자인 집정관도 법정에서 선출되고 감시를 받았다. 요즘 같은 인사 청문회가 있어서 후보자가 적절한지도 따졌다. 그렇게 집정권으로 임용되었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임기가 끝날 무렵에는 보고서를 제출하고 공금 운영 내역도 감사를 받아야 했다.

아크로폴리스(Ἀκρόπολις)

▲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중심지 아크로폴리스. 아크로폴리스는 아크로(높은 곳)과 폴리(도시, 국가)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이곳에는 도시국가를 수호하는 신들을 모신 신전과 각종 제전이 열리는 극장 등이 있었다.

폴리스의 성지인 아크로폴리스는 그 폴리스의 수호신들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아테네의 수호신은 처녀신 아테나. 따라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무엇보다도 아테나를 모시는 데 집중되어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한가운데 우뚝 서서 사방을 굽어보는 파르테논이 바로 아테나 여신을 모시는 신전이다. ‘파르테논(Παρθενών)’이란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방을 뜻하던 말로, 애초에는 신전 내부의 특정한 방을 가리켰다고 한다. 그 방이 지금 어디인지는 논란이 있다.

서쪽에서 아크로폴리스로 진입할 때도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정문인 프로필레아 오른쪽의 아테나 니케(‘승리의 아테나’) 신전이다. 파르테논 신전 북쪽에도 옛 아테나 신전이 있고, 그 신전의 앞에는 아테나 프로마코스(‘선봉에서 싸우는 아테나’)의 동상, 뒤에는 아테나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옛 아테나 신전의 북쪽에 마련된 에렉테온은 아테나와 포세이돈을 함께 모신 신전이라 한다. 이 같이 아크로폴리스 곳곳을 차지한 아테나에 비하면 파르테논 신전 동쪽에 자리 잡은 제우스 폴리에우스(‘폴리스를 지키는 제우스’) 신전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크로폴리스에는 아테나 이외의 여신을 섬기는 곳도 있다. 프로필레아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임신과 출산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성역이 있고, 그 성역 밖에는 곡물의 여신 데메테르의 신전이 있다. 평의회와 민회와 재판으로 아테네를 움직이는 것은 군대를 갔다 온 남자 시민들이었는데, 그러한 남자들의 아테네를 수호하는 아크로폴리스의 신들은 이처럼 아테나와 같은 여신들이다. 남자들을 낳고 키우고 보호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생각이 반영된 것일까?

파르테논 신전 남쪽 낮은 지대에는 디오니소스 극장을 중심으로 서쪽에 아티쿠스 음악당, 동쪽에 페리클레스 음악당이 자리 잡고 있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델피의 경기장을 중수했던 부자 원로원 의원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아크로폴리스에도 이름을 남긴 것이다. 페리클레스 음악당은 페리클레스 시대에 판아테나 축제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한편 디오니소스 극장 뒤에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마련되어 있는데, 의신(醫神)의 이름이 붙어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곳은 시민들이 아플 때 처방도 받고 약도 받는 진료소였다.

신타그마 광장 (Πλατεία Συντάγματος)

▲ 신타그마 광장은 '헌법의 광장'이라는 뜻으로, 그리스 최초의 헌법이 공포된 곳이다.

짧았던 아테네 민주주의는 기원전 4세기에 막을 내렸다. 이후 2000년이 넘도록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는 사라진 단어였다. 오랜 세월을 건너 그것이 소생하기 시작한 계기 중 하나가 헌법의 도입이었다. 헌법을 뜻하는 그리스어가 ‘신타그마’이고 그리스가 헌법을 공포한 곳이 신타그마 광장이었다. 

1834년 오토 왕이 그리스 왕국의 수도를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나프필리온에서 아테네로 옮기면서 이 광장을 설계할 때 그 이름은 ‘궁전 광장’이었다. 그러나 그해 9월 3일 디미트리오스 칼레르기스가 지휘하는 병사들이 궁전에 진입해 오토 왕에게 최초의 헌법을 인정할 것을 요구해 이를 관철시킨 뒤 ‘헌법 광장’, 즉 신타그마 광장으로 바뀌었다. 그 후 광장은 역사적 계기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목소리로 가득 차곤 했다.

광장 동쪽에 국립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는 의회의사당은 1934년까지 왕궁으로 쓰이던 건물이다. 정원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의사당은 회기 중이 아니라도 늘 폐쇄되어 있다. 신타그마 광장과 의사당 사이에 있는 무명용사의 묘에는 그리스가 참전했던 전쟁들이 시대 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물론 그중에는 한국전쟁도 포함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한 시간에 한 번씩 대통령 경비대가 경비병 교대식을 거행한다. 관광객들은 경비병 옆에서 사진을 찍을 수는 있으나 그와 말을 나눠서는 안 된다. 그 침묵의 촬영을 끝으로 우리는 아테네를 떠났다.

고층 아파트

아테네 시내에서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아테네 국제공항은 작은 편이었다. 인천에서 바로 오는 국적기가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3시 35분 출발하는 터키항공 비행기에 오르기 전, 공항 면세점에서 그리스 고건축의 기둥 모양으로 디자인된 우조(그리스 소주)를 샀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가방 속에 집어넣고 부쳤더니 술이 샜다. 공업 기반이 전무하다시피 하고 서비스업만 발달해서인지 공산품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명색이 국제공항 면세점인데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그래서는 안 되지!

에게 해 상공을 날아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그리스와 터키의 풍경에서 한 가지 차이점이 느껴졌다. 그리스에는 아파트가 거의 없다. 있어도 저층 아파트이고 대단지 아파트는 아예 없다. 그것은 다른 유럽 도시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터키에 가까워지면서 고층 건물, 특히 대단지 고층 아파트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도 한국이나 중국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이렇게 뚜렷이 대비되는 주거 형식의 차이는 아시아가 고속 성장을 하면서 도시 주민의 주거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데 기인할 것이다.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진 유럽의 도시화와 달리 단시일 내에 압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아시아의 도시화는 향후 수십 년 사이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까? 모든 사회경제적 변화가 전 지구적으로 동시에 진행되는 세계화 속에 과연 아시아의 새롭게 늘어난 시민들에게도 유럽 시민들이 누렸던 여유와 문화를 누릴 시간이 주어질 수 있을까?

5시에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한 뒤 바로 호텔로 가서 짐을 푼 뒤 탁심 광장 부근의 ‘먹자골목’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총선 다음날의 휑하던 분위기와 달리 일주일 만에 돌아온 광장 주변 거리는 아연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계속>

글/사진 강응천 역사저술가 및 출판기획자,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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