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이는 말] 

“요즘 보면 한겨레가 참 많이 느슨해진 것 같다. 어떻게 만든 한겨레인데 매너리즘에 빠져있나?” 작고 다부진 몸매에 동그란 눈, 동그란 얼굴, 흰머리를 말총처럼 묶고 앉아 있는 그를 처음 만난 건 11년 전이다. 주주와의 소통을 다시 복원하자는 뜻으로 내가 매달 열리는 주주독자 모임에 회사의 일원으로 참석하면서부터다. 이 모임은 ‘한겨레신문사랑모임’(‘한겨레신문발전연대’의 전신)으로 한겨레신문 창간 이후 매월 30여 명의 한겨레 주주·독자들이 저마다의 한겨레 사랑 실천 이야기를 공유하고 어울리는 모임이다. 

필명 ‘흰머리소년’ 이주형(70) 주주. 충북 영동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한겨레에 도움 되는 일이라면 언제든 무엇이든 나서는 열성 한겨레 팬이다. 충북 작가회의 회원으로 <빈 항아리의 울음> 등 세 권의 책도 냈다. 첫 만남 당시 그는 충북 영동 한겨레신문 지국장이었다. "한겨레가 나의 인생"이라 할 만큼 그의 ‘한겨레’ 사랑은 한결같고 지고지순하다. 새벽에 신문배달을 돕고 학교 가던 고교 2학년 장남을 교통사고로 잃었을 때도 그 고통을 ‘한겨레’로 이겨나갔다. 자식 묻은 가슴에 한겨레가 꽃이 되어 함께 있는 것이다. 그가 아들과 한 약속을 끝까지 잘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 한겨레 가족들의 응원을 기다린다. 

[후원금 송금 계좌 번호] 우체국 301515-02-067121 예금주 이주형


‘1997년 5월 사고가 났던 그 날은 새벽부터 오랜 가뭄 끝에 단비처럼 비가 퍼부었다. 우리집 큰 아이 재헌이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이른 5시에 일어나 비를 맞으며 1시간가량 한겨레신문을 배달하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학교 갈 채비를 했다. (중략) 다른 때 같으면 꼭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즐거운 표정으로 가는데 이 날은 인사도 없이 가다니. (중략) 거짓말 같았다. 아직은 체온이 따뜻했다. 일그러진 얼굴, 말없이 큰아이를 보면서 오열했다.’ - 책 <빈항아리의울음>(1998) 193p~195p 인용 편집, 이주형, 당그래출판사 -

이주형 주주는 요즘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만학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수업이 꽈 차 있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과제도 많아요.” 그는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있는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에 다니고 있다. 이 학교는 시민이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2년제 과정으로 ‘인문,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 등 다양한 학문분과의 통섭을 기본원리로 <개인과 삶>, <개인과 사회>, <자기탐구와 삶의 설계>, <자기표현 및 문화기획> 등의 트랙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현재 3개월 분기단위로 진행되는 8학기 중 7학기 재학중이니 올해 말 졸업 예정이다.


이런 그에게 고민거리가 생겼다. “지난 학기까지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분기당 33만원인 수업료 등을 지불할 수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부탁할 곳이 없다.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학업을 온전히 마쳐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해답을 못 찾고 있다.”

 초, 중학교 시절 유난히 키가 작아 반에서 늘 ‘1번’을 달았다. 공부엔 영 관심이 없었다. 결국 중학교만 졸업하고 부모님 농사일을 도우며 지냈다. 그때 동네 교회 목사님의 권유로 김형석의 에세이 <영원과 사랑의 대화>, 이어령의 <흙속에 저 바람 속에>, <사상계> 등을 접하면서 조금씩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6살이 될 때까지 그는 전국을 떠돌았다. 18살 되던 해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음식점 심부름, 가발공장, 가방공장 등 닥치는대로 일했다. 그러나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돈이 되진 않았다. 힘든 일상이지만 그래도 틈틈이 도서관을 다니며 신문과 책을 보았다. 김재준 목사의 <하늘과 땅의 해후>와 자서전 <범용기>와 강원용 목사의 <수상집>도 열독했다.

“전태일 열사 사망 소식을 접하고 남의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 생각해 김대중 관련 명동사건 재판 방청을 시도하다가 ‘노상소요’ 명목으로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29일 구류를 살았다. 86년 9월에는 농민으로서 외국농산물 수입반대 집회를 주도해 징역 2년을 선고 받아 6개월 복역하고 2심 집행유예로 나왔다.”


고향으로 돌아와 늦었지만 33살에 결혼도 하고 농사일을 다시 시작했다. 정부에서는 축산자금을 빌려주며 잘 해보라 했지만 수입농산물이 판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 87년 6월 항쟁 때 농민단체에서 적극 활동할 때 <한겨레신문>이 창간 준비중이었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던 한겨레신문창간사무국을 찾아가 고향인 충북 영동의 신문판매지국을 운영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한겨레신문을 배달하고 보급하는 일이라면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창간 때부터 한겨레신문 지국을 개설했지만 보수적인 지역인데다가 ‘한겨레는 빨갱이 신문’이라는 잘못된 시각 때문에 구독 증부가 쉽지 않았다. 창간 초 400여 구독자에서 문 닫은 2007년에는 100여 부로 곤두박질 쳤다. 그나마 <한겨레>를 구독해준 이들은 농민운동을 함께 했던 분들과 교사들이다. 관공서에서조차 <한겨레>를 구독하지 않았다. 2004년에는 충북 영동지방법원 앞에서 ‘조선일보’ 구독을 멈추고 ‘한겨레’를 구독하라는 1인 시위까지 했다.”

▲ 2004년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이주형 주주, 출처: 오마이뉴스


그나마 아내가 보험설계사를 해 생활비를 보탰다. 아르바이트생 두고 혼자 지국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려운 분들이 많은 지역이라 구독료 수금도 쉽지 않았다. 결국 2007년 4월 영양실조와 패혈증으로 쓰러져 세 달을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때 충격으로 오른쪽 발가락 전체가 심하게 굽어 거동이 불편하고 길게 어떤 일을 하기 어려운 5급 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한겨레신문 지국 운영권을 다른 신문 지국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아들 재헌이가 하늘나라로 갔을 때 딴 맘먹지 말고 ‘한겨레’만 생각하자고 다짐하며 살아온 인생이기에 절망감은 더 컸다.

중학교 졸업한 70살 가까운 장애인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도서관도 다니고 소일거리도 하면서 하루하루 보냈다. 그래도 미국산쇠고기 수입 반대, 종편반대, 교과서국정화반대, 강정평화운동, 세월호 진상규명 촉구 활동 등 사회참여 활동은 물론 한겨레신문 구독확장운동은 쉰 적이 없다.

“재헌이 장례식장에서 약속했다. 아들 인생 몫까지 살겠다고. 그래서 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따라가는 것이 다소 어렵고 힘들지만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은 물론 폭넓은 역사, 문화, 교양을 쌓고 있다. 내가 농민이었으므로 졸업논문은 ‘현미’에 대해 써보고 싶다. 졸업 후에는 내 삶과 지식, 지혜를 몽땅 내놓겠다. <한겨레:온> 주주통신원으로 연재글도 많이 쓰고 싶다.”

26일 서울 종로 '문화공간 온'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그는 수업 받으러 가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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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구 에디터  do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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