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여름휴가는 완도-진도-땅끝으로 잡았다. 혼자만 신나게 놀고 돌아 온 것이 가족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오래 전부터 완도는 꼭 가보고 싶었다. 남해안 여행을 여러 번 했었지만 정작 완도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매번 마광남 선생님이 끊임없이 올려주시는 완도 소식에 끌렸다고나 할까?

▲ 완도 도착

새벽 일찍 출발하여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쉬엄쉬엄 내려오다 보니 차도 안 막히고 무엇보다도 덥지 않아 좋았다. 단지, 몸이 피곤한 것은 감수해야 했다. 해가 뜨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저 멀리 장보고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 장보고 동상
▲ 장보고 기념관은 휴관

제일 먼저 장보고 동상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월요일은 장보고 기념관은 휴관이다. 마광남 선생님께는 이미 도착 보고를 드리고 추천해주신대로 장보고 동상과 장보고 유적지가 있는 장도에 들러 보았다.

▲ 장보고 유적지

장보고 근원지를 찾아서

본 마을 죽청리는 상왕산에서 발원하는 불당골 계곡수가 수백수처에서 회합하여 혹직혹곡으로 흘러 깊어서 푸르게 보인 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하늘을 밝게 비추고 돌아, 동쪽 죽청리 동네 가운데 큰 내천을 이루어 청해진만에 유입하여 왔다. 옛날부터 상왕산을 위시하여 불지봉, 불상봉, 불죽봉의 봉우리 산맥과 산야는 청산에 비할 바가 아닌 남국선경과 녹수청산으로 하늘이 내려준 황금빛으로 황홀한 신선의 세계로소 신비스럽고 빛나는 장소로 이곳이야말로 저 먼 남국의 풍경을 자아내는 따듯하고 만물이 소생한 긴 봄날의 동네이며, 통일신라시대 828년 흥덕왕 때 해신 해상왕 장보고의 본영지로 태평뜰(한들), 부추원, 배둥둥이, 옥담터, 옥루정, 홍살문거리, 이방촌, 장군샘, 골래미, 사정촌(사장몰), 엄나무골, 양지대미, 장안, 하마비(2곳), 가래골, 구시골, 쇠죽골, 당목, 쏠포 등이 있었던 장소가 있다. 

▲ 장보고 유적지 - 장도

장보고 유적지가 있는 장도는 입구에 차를 놓고 걸어서 목교를 건너가야 한다. 목교가 있기 전 옛날부터 이 섬을 건너다녔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장도 외곽을 바다로부터 방어한 목책의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 목교

완도 청해진 유적은 사적 제308호로 지정되었으며 1991년부터 2001년까지 10년간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 건물지, 섬 입구의 ㄷ 자형 판축유구와 우물, 섬 입구 해안에서 330m 가량 촘촘히 박힌 원목렬과 잔목렬 등 목책이 확인되고, 매납유구를 비롯, 1,011건 2,171점의 유물 등이 출토됐다. 청해진 유적에서 발굴 조사된 유구와 유물들은 장보고의 해상활동 근거지로서의 청해진 실체를 규명하는 기초 자료가 될 것이며, 발굴된 주요 유물들은 장보고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청해진은 "신라인을 노예로 파는 해적들이 더 이상 노략질을 하지 못하도록 하게 해 달라"는 장보고의 청에 따라 흥덕왕 3년(828)에 설치된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한국, 중국,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 활동의 중심 기지였다.

청해진 성의 성벽은 판축법으로 만들어 졌다. 판축이란 흙으로 기초 및 성벽을 쌓는 방법 중 하나로 돌을 판판하게 깔고 그 위에 흙을 고르며 다져가는 공법을 말한다. 청해진 성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능선을 따라 축조하였으며, 성의 규모는 둘레 길이가 890m 이다. 성벽은 좌우 내. 외측에 기단석렬을 깔고 기단 석렬을 맞물린 상태에서 그 안쪽으로 흙을 시루떡처럼 다져 쌓은 판축토성이다.

▲ 고대

장도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고대"는 섬 밖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여러 개의 "치"가 있는데 바깥쪽 바다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는 배의 동태를 관측하는 시설이다.

▲ 동남치에서 바라 본 바다풍경

바다에는 전복양식이 한창이다.

▲ 사당

섬 중앙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완도 장좌리 당제 및 당굿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으며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 아침 동이 틀 무렵 이 곳에서 당제를 지낸다. 모시는 신격으로는 장보고, 송징, 정년, 혜일대사 네 분이다.

▲ 내성

내성문의 웅장한 처마의 곡선이 하늘빛과 잘 어울린다.

▲ 목책

목책은 청해진 유적지의 서쪽 해안에서 시작하여 입구까지 약 331m 길이로 갯벌 속에 묻혀 있다.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갯벌이 깎이면서 발견되어 현재 일부가 드러나 있다. 목책의 수종은 대부분 소나무이다. 폭 80cm, 깊이 90cm 규모로 동서방향으로 긴 도랑을 만든 후 1열로 통나무를 촘촘히 세워 조성한 것이다. 목책은 방어용이었거나 접안시설의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탄소연대 측정 결과 장보고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 정도리 구계등

 

▲ 구계등

마광남 선생님이 추천한 정도리 구계등은 탁원한 선택이었다. 그 장엄함에 놀라고, 이렇게 멋진 곳이 이토록 한산할 수 있는지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추정해 보건데, 외진데다가 교통편이 마땅치 않음이 그 원인일 수도 있겠다 싶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닿다보면 오염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이대로도 좋겠구나 생각하면서도 혼자 보기에 너무나 아까운 곳이었다.

▲ 어촌민속 전시관

근처의 완도군 어촌민속전시관에서 드디어 마광남 선생님을 만났다. 원래 이곳도 월요일은 휴관이었으나 최근 여행객들을 위해 월요일에도 개장을 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마광남 선생님이 힘을 쓰셔서 연 것으로 믿고 있다. 원래 주민들은 무료입장이고 외래객들은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관장님께서 한사코 그냥 입장하라신다. 마광남 선생님께선 이래서 조용히 들어와야 허는디 .. 하신다.

▲ 전시관 내부

내부는 신기한 물고기나 해양 생물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어촌에서나 볼 수 있는 신기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학생을 자녀로 둔 가족들은 들러 볼만한 곳이다.

▲ 작품

마광남 선생님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어서 더욱 반가웠다.

▲ 완도타워에서 내려다 본 풍경

다음 코스는 완도타워이다. 직원들에 피해를 주지 않으시려고 저만치 아래에 차를 대시고 그 뜨거운 날씨에도 걸어서 안내해 주신 마광남 선생님께 죄송하면서도 다시 한 번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완도 타워에서는 완도 읍내 뿐 만아니라 전복양식장이 즐비한 바다와 저 멀리 근처의 섬들 까지도 한 눈에 볼 수 있다. 관계자들이 곤란해 질까봐 여기서도 무료입장 했다고 차마 말은 못하겠다.

▲ 마광남 선생님과

며칠간 면도도 안하여 산적 같은 모습의 필자와 멀리서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을 안내 해주시느라 애쓰시는 마광남 선생님의 모습이다.

▲ 푸짐한 자연산 도미회

금강산도 식후경. 자연산 도미회로 배를 채웠다. 다 못 먹고 남기고 온 전복과 서비스로 나온 시원한 물회가 눈에 아른거린다. 전복을 남기다니..

너무나 더운 날씨에 선생님의 건강도 걱정되고 불편하실 것도 같아 여기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기로 하였다.

▲ 신지도 명사십리 입구

신지도의 명사십리를 추천받아 들렀는데 차들이 너무 많아 주차장에서 되돌려 나왔다. 명사십리 해수욕장은 길이가 3.8km나 되는 엄청난 해수욕장인데, 이미 마광남 선생님의 소개로 익히 봤었던 데다 사실 나에게 해수욕장은 그리 큰 매력지는 아니었다. 게다가 너무나 뜨거운 날씨는 아이들로 하여금 차에서 내리기를 거부하게 하였다. 이곳의 명사(鳴沙)는 십리 밖에서도 들린다하여 울 명자를 쓴다 한다. 보통의 경우에는 明沙十里로 쓰는 것과 다르다.

▲ 땅끝호텔

땅끝마을 송호리에 위치한 땅 끝 호텔에 짐을 풀었다. 일정이 이틀밖에 안되는데다가 진도를 들러보기로 하여 서둘러 완도 일정을 끝내고 돌아선 게 못내 아쉬웠다. 오는 길에 마광남 선생님이 적극 추천한 해양사박물관은 건너 뛰게 되어 아쉽다. 진도를 들렀다 나오려면 시간이 많지 않다.

▲ 눈물의 진도

진도 팽목항에 도착하니 아직도 수많은 눈물방울들이 서려 있어 가슴이 먹먹했다. 더 이상의 사진은 차마 찍지 못했다.

▲ 진도대교

진도대교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에 석양이 저 편 하늘을 물들인다.

▲ 땅 끝에서 맞은 석양

완도-진도-땅끝 여행은 너무나도 소중한 여행이었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김진표 주주통신원  jpkim.internationa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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