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蘇州)에 밀려드는 관광객.

17화 와신상담에서 언급한 오나라의 도읍지로 고소성(姑蘇城)이라 불렸던 현재의 '소주(蘇州)'에 관한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 사진 출처 : 구글

중국어를 조금 배우다보면 중국어의 현란한 유희에 당혹스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황산(黃山) 앞에는 천하제일명산(天下第一名山)이라는 말이 붙고, 계림산수, 갑천하(桂林山水, 甲天下)라는 말은 계림의 경치가 천하에서 으뜸이라는 말이지요. 아무튼 어딜 가나 단어만 다를 뿐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어휘로도 양이 차지 않는지 드디어 천당까지 언급을 합니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지상에는 '소주', '항주'가 있다.(天有天堂, 地有蘇杭, 천유천당, 지유소항)

'소주'의 4대 정원과 '항주'의 서호(西湖)를 보고 천당을 생각하며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차라리 생각 없이 여수를 지나 돌산도 어느 산모퉁이를 도는데 눈부신 석양에 섬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순간 숨이 멎을 듯했던 충격이 훨씬 더 천당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여수 돌산도보다 '소주'를 찾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주'는 오나라와 월나라가 각축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며 곧이어 초나라에 멸망을 하고 이어 항우가 거사를 일으킨 장소입니다.

그 이후에 쇠락한 이곳은 고구려 정벌에 나선 수나라 양제가 남쪽의 풍부한 군량을 옮기기 위해 수로를 파면서 다시 번영을 하게 됩니다. 당시 사람이나 우마로 물건을 나르던 때에 마차를 통째로 싣고 이동할 수 있는 배는 물류의 혁명이었고, 수로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들로 도시가 형성이 되면서 불야성을 이루고, 그 번화함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천당과 비교되었겠지요. 지금의 소주 운하는 이미 물류의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1990년대 처음 가본 운하에서는 사람이 뒤에서 노를 저어 과일이나 야채 등을 운반하였고, 작은 배 둘이 겨우 비킬 수 있는 좁은 운하, 닥지닥지 붙어있는 낡은 집들, 사람 한명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골목, 부스스한 얼굴로 소변을 보던 남자, 그 아래 야채를 씻던 여인, 예전에는 천당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는 생활하수로 오염된 오히려 빈민가에 가까운 낡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가본 '소주'는 삼성전자, 싱가포르와 대만의 공단 등이 들어가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변한 '소주'를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이 찾게 만든 이유! 바로 장계(張繼)란 한 시인 때문입니다.

중국을 여행 중에 혹시 붓글씨가 쓰인 부채를 샀거나 족자가 있다면 펼쳐보시지요. 대부분 아래 글이 쓰여 있을 겁니다.

 

 풍교야박(楓橋夜泊)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

月落烏啼霜滿天(월락오제상만천)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달 지고 까마귀 울고 하늘엔 서리 가득한데 / 강가 단풍나무, 고깃배 등불 마주하고 시름 속에 졸고 있네 / 고소성 밖 한산사 /한밤중 종소리가 객선까지 들려온다(풍교야박,楓橋夜泊. 두산백과).

그냥 이 시만 보면 한자를 많이 알지 못해도, 또는 옥편이나 사전을 뒤적이지 않아도 쉬운 한자들이 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를 쓴 장계는 약 1천 4백여 년 전 당나라 현종 때 안록산의 난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과거에 낙방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지요. 이미 3번 째 낙방을 한 그의 나이는 56살이었습니다. 한양천리 과것길도 쉬이 몇 달이 지나는데 남쪽에 살던 장계가 장안에 가서 과거를 보고 고향에 돌아가려면 일 년은 족히 걸리는 길이었습니다. 공부를 하고 행차를 준비하려면 몇 년은 걸리는데 3번이나 낙방을 하였으니 그 심정을 어찌 다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환갑을 바라보는 시골 낙방거사의 앞날에 무슨 영광이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부패한 장안의 관료들과 권력자들은 이미 시제를 빼돌리고 부와 권력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변방의 가난한 길손에게는 분노할 힘도 원망할 대상도 없습니다.

이 7언 절구에는 바로 그런 장계의 고통이 그대로 드러나 있지요. 당송시대의 유명한 시인들, 이태백이나 두보 백거이 같은 시인들의 주옥같은 작품들도 있지만 장계는 오로지 이 한수로 마치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같은 국민의 애송시 반열에 올랐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일본의 중학교 국정교과서에도 실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소주'에 들려 한산사를 방문하는 것이 필수 코스가 되었답니다.

낙방의 쓰라림과, 황혼에 접어든 인생의 회한, 그리고 감내하여야 할 고단함을 품은 작가가 따뜻한 객잔에 들지 못하고 찬 서리가 하얗게 내리는 깊은 가을, 객선에 남아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근심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그의 귓가에 멀리서 들려오는 산사의 새벽 종소리는 아마도 아침이 가까이 오는 희망의 전령은 아니었을까?

이번 가을엔 한시 한 수 정도 외우시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나름 번역을 다시 합니다.

달도 지고, 까마귀 소리만 처량한데 찬 서리는 하얗게 내리는구려!

가을 단풍과 밤을 잊은 고깃배의 불빛, 벗 삼아 시름으로 잠 못 이루네!

저 멀리 소주성 성 밖 한산사!

깊은 밤 종소리가 뱃전에 이르는구려!

둘째 줄의 江楓에 대한 해석은 중국에서도 분분합니다. 평지에 있는 소주의 운하는 강이라고 할 수 없는 좁은 수로이며 따뜻한 남쪽 사철 푸른 소주에 빛깔 고운 단풍이 있을 리도 없지요. 아마도 마침 정박한 곳이 풍교라는 다리 밑이었고, 잡은 물고기를 새벽시장에 내기 위해 몰려온 어선을 보며 쓴 글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어떤 사람은 풍교(楓橋)가 있으면 강교(江橋)도 있어야 말이 된다고 하는데, 제 느낌은 가을에 대한 작가의 상상과 객선이라는 현실에 어울리는 표현으로 봤습니다.

천년을 넘게 애송이 되는 이 시 한수와 ‘天有天堂, 地有蘇杭, (천유천당,지유소항)’이라는 말에 지금도 '소주'는 일 년 내내 여행객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 2005년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과 조카들과 함께 상해, 소주, 항주, 남경 등을 여행하였습니다. 사진은 소주의 풍교는 아닙니다. 여객선이라고 하여 혹시 카페리를 연상하시지는 않겠지요. 당시 장계가 탔던 객선은 이와 유사하였을 것입니다.

‘겨울연가’가 히트를 치고 나서 남이섬에 몰려든 일본 및 동남아 관광객들, ‘대장금’ 이후 중국 여기저기 여행사마다 제주도 대장금 관광단을 모집하던 일들은 백 마디 광고보다 더 효과적이었지요.

8월 9일에서 14일까지 한국의 지인들과 장가계를 다녀왔습니다. 영화 아바타의 배경이라고 들었습니다. 장사(長沙)공항에서 버스로 5시간 가까이 이동을 해야 하는 불편한 곳이었지요. 장가계가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가이드를 하고 있는 분의 말에 의하면 장가계는 중국인들에게 알려진 명소가 아니었답니다. 처음에는 거의 대부분의 관광객이 한국인들이었고. 한국인들이 소문을 듣고 많이 찾으면서 대한항공 전세기가 뜨고, 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왔답니다.

지금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밀려오면서 천문대 곤돌라 입장권을 사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줄을 서야 한다고 합니다. 어디에 가나 줄을 서고 사람에 치여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고 하였지만, 장가계는 지금도 앞으로도 도시 하나를 먹여 살리기에 족한 화수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 장가계(張家界)는 한고조 유방의 책사 장량(자방)이 이곳에 은거하여 그 후손들이 살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신뢰하기 힘든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장가계의 빼어난 풍경을 농부가 그림으로 그리면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사시사철 변화무쌍한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있고, 그림보다 아름다운 해금강이 있으며, 꿈에서도 가보고 싶은 묘향산 구월산이 있는데 사진으로만 보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산을 좋아하는 지인들과 백두산은 꼭 북한을 거쳐서 가자고 약속을 하였건만 기대는 갈수록 멀어져 결국 중국을 통해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의 분단 상황이 우리 후손들에게는 멀고 먼 옛적 이야기가 되길 빕니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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