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1학년 때였다. 추석 지나고 나서 담임선생님께서 학부모 상담을 요청하셨다. 국어수업에서 앞말을 주고 빈칸에 뒷말을 넣는 이런 과제가 있었는데,

"내가 만일 새라면                                       ."

위 글에 아들이 이렇게 뒷말을 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새라면 하늘을 날다가 떨어져서 편안하게 죽고 싶다

국어선생님께서 심각하다 싶어서 담임선생님께 알렸고 담임선생님께서 먼저 아들을 상담하고는 부모님 호출을 했다.

울 아들 어떤 아인가? 집안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까지 누가 물어보면 줄줄 다 부는 아이다. 엄마 체면 생각해서 감추고 그래주는 것이 없어서, 지인을 만나거나 하면 정말 아슬아슬하다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16년 전 아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순하고 술도 못 하는 남편이 사십이 넘어가면서, 술 먹는 분위기에 푹 파져서 밤새 술을 먹고 취한 상태로 새벽에 들어온 적이 일주일에 한번 꼴로 있었다. 결혼 조건 중에 하나가 술고래 아닌 사람이었는데... 너무도 배신감을 느껴 두어 번 화가 나서 문을 안 열어 주었다. 아들은 동네방네 다 불었고, 일기에 <시>로 써서 학교에 냈다. 아빠를 못 들어오게 한 엄마에게 경고를 던진 거였다.

 

아빠의 술

아빠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오면

엄마는 문을 안 열어준다.

문을 안 열어주면

아빠는 집에 못 들어온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문을 안 열어주면

문을 열어주고 싶은데

못 열어 준다.

다음에는 문을 열어줄 거다.

 

이렇게 감출 줄 모르고 술술 다 말하는 스타일은 커서도 변하지 않았다.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집안에 문제가 없다고 했으면 학부모 호출까지는 가지 않았을 텐데, 추석 전에 사소한 문제로 가볍게 티격태격했던 아빠 엄마 싸움까지 다 말해버려 가정 불화로 인한 요주의 학생으로 보고 호출을 하신 거였다.

선생님은 먼저 아들이 쓴 글을 보여주셨는데 너무나 놀랐다. 아들이 죽음까지도 생각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심성이 여린 아들의 고통도 몰랐으니 마치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선생님께서는 상담 후 가정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신 것 같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다. 그런데 정말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쩍하면 매를 드는 학교가 너무나 싫어서... 공부가 재미없고 지겨워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일 거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으랴? 다른 아이들은 다 참고 다니는데 울 아들만 나약하단 소리듣기 십상이지....

중학교 시절을 지나 수 년 후, 아들이 말해주어 알게 되었던 사건이 있다. 중학교 때 선풍기를 틀어놓고 죽으려 했다는 것이다. 선풍기를 머리를 향해서 강으로 틀고 잤는데 너무 세니까 잠이 안와서 약으로 틀고 잤는데도 안 죽고 일어났고 머리만 아프다며 선풍기 틀고 자면 죽는다는 거 다 거짓말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엄마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힘든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또 아들은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전쟁을 치렀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라 했다. 학교 가기 싫어서 그런지 화장실을 수차례 들락날락해도 큰일을 치르지 못했다. 보다보다 지각할 것 같아서 그냥 학교에 가서 해결하라고 하면 남자화장실은 잠금장치가 없다고 했다. 아이들이 문을 그냥 확 열기도 하고 문을 두드리고 놀려먹으며 장난을 친다고 했다. 유난히 깔끔쟁이라 학교 화장실은 더 가기 싫었으리라. 학교 간다고 가다가 돌아온 적도 있고, 학교에서 화장실 간다고 집으로 달려온 적도 있다. 지각도 잦았고 무단외출도 했으니, 선생님께 또 혼이 날 수 밖에... 선생님께 이를 상의 드린 일이 있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사정을 다 감안하고 더 일찍 깨워서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게 아닌데... 아무리 일찍 깨워도 상황은 마찬가지인데... 마음에 병이 들어서 그런 건데... 선생님은 여러 아이들을 다뤄야 하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겠지만.... 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아이와 학교 사이에 끼어 힘든 날이 계속 됐다. 이 과민성 대장증후군은 방학 때면 정상으로 돌아왔다가 한국을 떠나면서 순식간에 없어졌다. 지금은 화장실에 초스피드로 갔다 온다. “아~~~ 응가 마려”하며 강아지 모양 마루를 조금 왔다 갔다 하다 들어가면, 1분도 안 걸려.. “아.. 시원하다” 하고 나온다. 문 닫고 들어갔다 바로 문 열고 나오는 아이 같다. 그 당시 내 속을 태운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아들은 점점 제 목소리를 강하게 내기 시작했다. 지나치다 싶은 자기주장도 했고 엄마 말에 무조건 반발도 했다. '엄만 몰라도 돼‘ 소리도 자주 했고 학교에서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자기 방문을 닫고 못 들어오게 했다. 사춘기가 되어 그런가보다.. 이해는 하면서도, 또 그렇게 크는 거지.. 생각은 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면 거침없이 욕도 썼다. 내가 질색하면 그건 욕이 아니고 그냥 의미 없는 말이라고 했다. 문방구에서 샤프를 훔쳤다가 걸려 크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

학교에서 풀지 못한 감정을 집에 와서 격하게 표출한 적도 있었다. 가끔 학교 갔다 와서 너무 조용해서 아이의 방을 열어보면 침대에 누워 눈가에 눈물이 젖은 채 천장을 멍하니 보고 있는 아이를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혼자 상상하며 놀던 놀이도 거의 사라졌다. 눈빛이며 얼굴 모습에서 선한 기운이 사라지고 거칠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깔깔거리며 웃던 아이인데 웃는 모습이 사라졌다. 제 고운 심성을 버리려고 작정한 아이 같았다.

그렇게 아들은 변해갔다. 하지만 아들은 변해가는 자신을 싫어했다. 자신이 ‘쓰레기’, '나쁜 아이'가 되어 간다고 했다. 뭔가 변화를 갖고 싶어 했다. 고등학교는 체벌이 없는 대안학교로 가고 싶다고 했다. 대안학교를 여기저기 알아보았으나 그것도 성적 때문에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고등학교를 가지 않고 할 수 있는 직업을 갖겠다고 했다. 나와 남편의 고정관념으로는 고등학교를 보내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남들이 도피성이라고 해도 유학을 조심스럽게 생각해보았다. 어려서 미국에서 2년 받은 유치원교육을 늘 행복한 기억으로 가지고 있었기에 유학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귀는 트여서 아동용 미국영화는 그냥 자막 없이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방향을 틀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침 뉴질랜드 남섬의 깡시골.. 기숙사가 있는 공립학교에서 국제교환학생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들은 며칠 고민을 하더니 한국 학생이 한명도 없는 것이 제일 맘에 든다고 가겠다고 했다. 사실 제안은 내가 먼저 했지만 막상 아들이 가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니 많이 망설여졌다. 만약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오면 더 좌절하고 더 힘들 텐데...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한 달간 숙고 끝에 우선 1년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아들에게 그곳 교육이 자신에게 맞는지 어떤지 체험하는 차원에서 가는 것이라고 했다. 인생에서 1년은 아무 것도 아니니까, 1년을 자연과 더불어 즐겁게 뛰어 놀다 오라고 했다. 거기 교육이 안 맞는다고 생각하면, 1년 후 귀국해서 다시 중 3-2학기로 1년 늦추어 다니기로 합의했다.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성적표 및 재학증명서를 발급받고 이런 저런 준비 상황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다. 아들과 같이 교무실에 갔는데 선생님께서는 아들이 유학 가는 것이 못마땅하신 것 같았다. 사실 유학은 의무교육을 버리는, 공교육에 반하는 선택이다. 아들이 건너편 책상에 앉아 뭔가를 작성하고 있는데 이렇게 툭 말씀을 던지셨다.

“여기서 못하는 아이가 외국 가면 잘한대요?”

아.. 그런 말씀은 아들이 없는 곳에서 좀 하시지. 아이를 앞에 두고 꼭 그렇게 말씀하셔야 했을까? 나는 주절주절 하고 싶었던 말문을 닫으며 한 번 더 마음을 다졌다.

“이런 취급을 받으며 울 아들이 학교를 다녔구나. 그래 잘 결정했어, 잘 보내는 거야.”

아들 중 2 때 설악산 공룡능선에 갔다. 희운각에서 공룡능선을 지나 마등령을 넘어 설악동으로 떨어지는 산행은 아들이 초행길이라 쉬엄쉬엄 가다보니 14시간이나 걸렸다. 아이는 너무 힘든지 이렇게 항의를 했다.

"엄마,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벌을 주는 거야?"

이 때 사진을 보면 밝게 웃는 사진이 하나도 없다. 억지로 끌려온 강아지 마냥.... 모두 다 굳은 얼굴이다. 설악산의 최고 절경을 보면서 기분 전환하라고 데리고 갔는데 그렇지 않아도 몸도 마음도 힘든 아이에게 억지 강행군을 시킨 거다. 산행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하산 길에 해가 져서 완전히 캄캄해진 길을 내려왔다. 랜턴을 조심조심 비춰가며 내려가는데, 랜턴도 없이 딴 길로 가버린 중년의 두 아주머니를 아들이 작은 인기척 소리를 듣고 찾아가 모시고 와서 함께 내려왔다. 두 사람을 살렸다는 칭찬을 받으며 기분이 좀 풀리기는 했으나 지금도 아들은 초짜에게 너무 심한 산행이였다고 투덜거린다. 그래서 지금까지 등산을 싫어하는 지도..

 

<계속>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미경 주주통신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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