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寒山)과 습득(拾得)

진시황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고 이어 한나라가 등장합니다. 한나라는 유교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아 4백여 년을 유지합니다. 그러다 위 촉 오 삼국으로 갈라져 싸우고, 위진 남북조의 어수선한 중국을 수나라 문제가 다시 통일을 시키지요. 중국을 다시 통일한 수나라 문제 양견은 나름 국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균전제를 도입하고 본인 스스로 근검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또한 필요에 의해 운하를 파지만 백성들이 피폐해지자 중단하고 나라의 부를 축적합니다. 그러나 권모술수에 능하고 야심이 큰 둘째 아들 양광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좌에 오르면서 망해가지요. 빨리 왕이 되고 싶었던 양광은 잠자는 아버지 귀에 독극물을 넣어 죽였다는 독살설과, 원래 세자였던 형을 모함한 사실과 아버지 문제의 첩을 겁탈하려다 들켜 폐위가 결정되자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을 동원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고 전해지는 패륜아가 수나라 양제입니다.

양제는 왕위에 오르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켜 원래의 수도인 장안 외에 낙양에 제 2의 수도를 건설하였으며, 강남인 양주에는 제 3의 수도를 건설하였습니다. 또한 대운하를 파느라 국가의 재정이 딸리자 백성들을 쥐어짭니다. 부역에 한 번 동원이 되면 살아오기 어려워 스스로 손발을 자르기까지 하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운하가 완성이 되자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는 고구려를 정벌하러 나섭니다.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백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였습니다. 보무도 당당하게 요하를 건너 요동성으로 몰려갔지만 6개월이 넘도록 성안으로 한 발짝도 못 들어갑니다. 한편 산동(山東)에서 평양성으로 출병한 수군은 고구려 영양왕의 동생에게 절반 이상이 몰살하는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 6개월 동안 진도가 안 나가자 양제는 우중문 우문술에게 30만 별동군을 주고 우회하여 평양성을 치라고 합니다. 그러다 그 유명한 살수(청천강)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30만이 모조리 몰살을 당합니다. 살아서 돌아간 자들이 3천이 안되었다니 더 이상 전쟁을 치룰 수가 없었지요.

재정은 파탄이 나고 전쟁으로 국력은 쇠퇴하여졌지만 누구의 말도 듣기를 원치 않는 불통의 양제 성격상 파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지요. 제 2차, 3차의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지만 결국은 반란이 일어나 교살이 되면서 수나라는 40년이란 짧은 역사를 뒤로하고 막을 내립니다.

이어 이연 이세민 부자에 의해 당나라가 세워집니다.

기원 전후로 중국에 불교가 전래 되었지만 현장법사에 의해 불경이 제대로 중국어로 번역이 되면서 당나라 때에는 불교가 가장 융성을 합니다. 역사상 당나라(618년~907년) 3백년은 문화나 문물에서 서양을 압도하는 일류국가였습니다. 서양에선 바이킹이 대 이동을 하고,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 때인 962년에야 로마제국이 성립을 하였으니 당시의 당나라는 현재의 미국을 능가하는 선진국이었지요. 중국인들 눈에는 그저 자기들 빼고는 다 오랑캐들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중국인들의 기질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늘의 명을 받은 황제가 다스리는 땅에 살고 있고, 주변의 오랑캐국가들은 황제의 윤허를 받은 왕들이 통치하는 속국들이지요. 따라서 국경, 영토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필리핀이나 베트남의 근해도 다 자기들 바다입니다. 남사군도도 자기들 섬이고, 이어도도 자기들 섬이지요. 일본의 센가꾸 열도(조어도)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자기들 땅입니다. 티베트 독립?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왜? 원래 천하가 자기들 거였으니까요.

중국은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다.’는 말이 맞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들의 생각이 이렇다는 걸 알고 중국인을 대하면 편합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최영장군의 명을 받고 원래 준비를 했던 대로 이성계가 요동을 점령했으면? 당시 원나라는 망해가고, 명나라는 아직 기틀을 잡지 못하고 저 요동은 텅텅 비어있었는데. 이성계는 진정 우리민족과 후손을 위해서 회군을 하였던가?

전통적인 유교 사상에 새로운 세계관과 사상을 갖춘 불교가 들어와 접목을 하면서 당나라는 유사 이래 최고의 번영을 누립니다. 한산사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과 종루 보원탑원등이 있는데 여느 절과는 달리 꾀죄죄한 모습의 속인도 승도 아닌 그림이 보입니다. 바로 한산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가 된 한산과 절친한 친구 습득입니다.

▲ 한산(좌)과 습득(우)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소주의 한산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남북조 시대에 묘리보원탑원으로 건축이 되었다가 당나라 태종 때 한산스님이 거주를 하였고, 현종 때 희천(希遷)선사가 절을 창건하면서 한산스님의 이름을 따서 한산사로 명명하였습니다.

▲ 육조 양 무제때 '묘리보명탑원'으로 처음 지어짐. (사진출처:위키피디아)

한산사가 있는 소주에서 남쪽으로 월나라의 도읍지였던 소흥을 지나 더 내려가면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란 절이 있습니다. 어느 날 풍간선사가 버려진 아이를 데리고 와 국청사에 맡겼습니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지라 ‘줍다‘라는 뜻의 습득(拾得)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절에서 길렀습니다.

국청사 주지는 습득에게 법당 청소를 맡겼지요. 하루는 주지가 지나가는데 법당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립니다.

“부처님, 밥 드셔! 안 먹어? 내가 먹지!”

“부처님, 반찬 드셔! 안 먹어? 내가 먹지!”

주지스님이 문을 열고 보니 습득이 공양올린 밥과 반찬을 부처상 턱 밑에 앉아 한 숟가락 떠서 부처 입에 대다가 자기 입속으로 쏙 넣고, 쏙 넣고 합니다. 그래서 주지스님은 습득을 부엌으로 보내 설거지하고 불을 지피는 일을 시켰습니다. 하루는 고두밥을 지어 멍석에 말리면서 습득에게 새가 먹지 못하도록 지키라고 했습니다. 깜박 잠이든 습득이 눈을 떠보니 새들이 다 먹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막대기를 들고 사천왕에게 달려가더니 냅다 후려치며, “고두밥을 먹는 새도 지키지 못하면서 어찌 절을 지킨단 말이냐?”고 나무라며 매질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지스님이 낮잠을 자는데 사천왕이 꿈에 나타나 “습득이가 나를 때려 아파죽겠으니 좀 말려 달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습득이 사천왕을 때리고 있더랍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국청사 내 외진 곳에 가람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돌보는 이가 없어 문짝이 떨어져나가고 지저분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습득이 청소를 하고 공양을 올렸습니다. 공양을 올리고 나면 지켜보던 까마귀가 내려와 쪼아 먹고는 달아납니다. 이를 본 습득이 막대기를 들어 가람신을 마구 때리며,

“야, 이 못난 놈아. 네 밥그릇도 못 지키는 주제에 어찌 절을 지킬 수 있단 말이냐?”며 꾸짖습니다.

어느 날 주지스님의 꿈에 가람신이 나타나,

“내 밥도 못 찾아먹는다고 보현보살님이 매일 매질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제발 내 방 문을 고쳐주던지 아니면 공양을 다른 사람에게 올리라고 해주시요!”

다음날 몰래 사당을 지켜보니 습득이 공양을 올리고는 새가 먹어버린 후 가람신에게 매질을 하고는 빈 그릇을 들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한산(寒山)은 한암유굴(寒岩幽窟,어둡고 찬 바위굴)에 거주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한산자(寒山子)라고도 하지요. 하는 짓이나 생김이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끼니때가 되면 국청사에 들어와 대중이 먹다 남긴 음식을 얻어먹고 지냅니다. 절에 오면 습득이 남은 음식을 모아 대통에 넣어 함께 나섭니다. 둘이는 항상 죽이 맞아 깔깔거리며 괴성을 지르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고 돌아다닙니다. 비록 거지꼴에 미친 행동을 하지만 말 하나하나에는 불법에 어긋남이 없었답니다. 하지만 지저분한 몰골과 하는 짓이 너무 경우를 벗어나 승려나 일반인 사이에서는 미친놈 취급을 받았습니다. 한 번은 주지스님이 행차 중에 100여 마리의 소 떼를 앞에 두고 한산과 습득이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소리에 살금살금 가까이 가서 들으니, 한산이 먼저 부릅니다.

“야, 이 도반들아! 시주 밥 받아먹고 놀기만 하더니 기어코 이리되었단 말이지. 그래 소 노릇하는 기분이 어떤가? 오늘은 도반들과 법문을 나눌까 하여 왔으니 내가 부르는 대로 이쪽으로 나오게! 동화사 경진율사!” 그러자 검은 소 한 마리가 음매~~하며 나와서 한산이 지정하는 장소로 갑니다.

“두 번째, 천관사 현관법사!” 이번에는 누런 소 한 마리가 음매~하며 나오더니 처음 나온 소 옆으로 갑니다. 무려 30여 마리의 소가 부름을 받아 모이는 걸 몰래 보고 있으려니 등이 오싹해집니다.

풍간선사와 더불어 한산과 습득을 당시 사람들은 보살의 화신으로 여겼으며 국청사의 숨은 고승이란 뜻으로 ‘국청삼은(國淸三隱)이라고 불렀답니다. 이 외에도 여러 설화들이 남아있고, 실제로 한산이 지은 시 314수와 습득의 시 57수 그리고 풍간의 시 2수를 모아 펴낸 삼은집(三隱集)이란 시집은 참선을 하는 수행승 사이에서는 지금도 필독서로 읽힌다고 합니다.

▲ 한산사 불탑 (사진출처:위키피디아)

한국의 고즈넉한 산사에서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만 들어도 한 소식 깨달음을 얻을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는 전혀 아닙니다. 혹시 들르시더라도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김동호 주주통신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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