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이렇게 물길(海路)을 알았다.

우리가 다 아는 일이지만 이순신은 바다가 없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바다를 알고 물길을 알아서 싸움마다 패하는 것이 없이 23전 23승이라는 세계해전사상 어디에도 없는 전쟁을 하여서 나라를 구했었을까?

물론 타고남도 있었겠지만 알려고 했고, 이겨야 한다는 것 때문에 부단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옛사람들이 써 놓은 기록들을 보면, 먼저 서애(西厓, 유성룡)와 충무공의 첫 만남을 청성잡기 제 5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서애 유성룡(柳成龍)이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관리로 있을 때 귀성(歸省)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는데, 강물은 불어나고 건너는 사람은 많아 서로 앞 다투어 배에 오르느라 자못 소란스러웠다. 이때 무인으로 보이는 길손이 평복 차림으로 홀로 말을 끌고 배에 올랐는데, 어느 술 취한 자가 뒤따라 올라서는 그가 자기보다 먼저 배에 오른 것에 화를 내며 거침없이 욕을 해 댔다. 그러자 배에 타고 있던 자들이 모두 분개하여 심지어 그를 대신해 싸우려고까지 하는데도 정작 길손은 머리를 숙이고 채찍을 늘어뜨린 채 강을 다 건너도록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하였다. 서애도 속으로 그를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나루터에 닿자 길손이 말을 몰고 먼저 내려 말의 뱃대끈을 바짝 조이고 있었는데, 술 취한 자가 계속 욕지거리를 하면서 뒤따라 내렸다. 알고 보니 대갓집 하인이었다. 길손이 왼손으론 말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 술 취한 하인을 움켜잡는데 맹호가 토끼를 후려치듯 민첩하였다. 칼을 뽑아 목을 베어 강물에 던져 넣고는 낯빛도 변하지 않고 말에 올라 곧장 떠나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나루터에서 그 모습을 본 자들이 모두 크게 놀라 넋이 빠져 있는데, 서애만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이 사람은 대장감이다 라고 감탄하였다. 항상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뒤에 군문(軍門)에서 살펴보니 바로 훗날의 충무공이었다. 서애가 공을 알아본 것은 사실 이 일에서 비롯된 것이지 율곡(栗谷, 이이 李珥)이 천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 기록하였고, 충무공(忠武公)은 어떻게 왜적을 물리쳤나 라는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처음 호남 좌수사(湖南左水使)에 제수되었을 때 왜적이 침입한다는 경보가 다급했다. 왜적을 막는 것은 바다에 달려 있었으나 공은 바다를 방비하는 요해처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공은 날마다 포구의 남녀 백성들을 좌수영 뜰에 모아놓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짚신도 삼고 길쌈도 하는 등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면서 밤만 되면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공은 평복 차림으로 그들과 격의 없이 즐기면서 대화를 유도하였다. 포구의 백성들이 처음에는 매우 두려워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친숙해져 함께 웃으면서 농담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대화 내용은 모두 고기 잡고 조개 캐면서 지나다닌 곳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느 항구는 물이 소용돌이쳐서 들어가면 반드시 배가 뒤집힌다. 어느 여울은 암초가 숨어 있어 그쪽으로 가면 반드시 배가 부서진다고 하면, 공이 일일이 기억했다가 다음 날 아침 몸소 나가 살폈으며 거리가 먼 곳은 휘하 장수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급기야 왜군과 전투를 하게 되어서는 번번이 배를 끌고 후퇴하여 적들을 험지로 유인해 들였는데, 그때마다 왜선이 여지없이 부서져 힘들여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였다. 송 좌상(宋左相 송시열)이 예전에 그의 손님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면서 장수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재상 역시 그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충무공이 물길에 익숙했던 것은 포구의 백성에게 들어서만은 아니다. 여러 차례 해진(海鎭)의 장수를 지낸 어영담(魚泳潭)이 물길의 요해처를 잘 알았기 때문에 공을 도운 것이 많았으니, 견내량(見乃梁) 해전과 명량(鳴梁) 해전은 오로지 지리를 이용해 승리를 거둔 경우이다. 또한 충무공에게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한 절친한 벗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충무공만은 그를 인정하여 중요한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상의하곤 하였다. 왜적이 침입하자 공은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 국사(國事)를 함께 도모하자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늙은 부모가 있어 갈 수 없었기에 다만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공에게 보내면서 이 책을 잘 읽으면 국사를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공이 이 책에서 도움 받은 것이 많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충무공은 이처럼 여러 사람의 머리를 빌어 전술에 썼음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충무공전서를 집필했던 윤행입(규장각문신,4095~4134, 1762~1801)은 난중잡록에 이렇게 써 놓았다. 이순신의 배 형상은 거북이 같았으며 위에 지붕판자를 덮어씌우고 두루 쇠못을 박았는데 그것이 뾰족하고 날카로워 범접하기 어려웠고 또 견고하고 빨라서 전투에 나가기 편리했다. 거기다 어영담이 귀신같은 지도(指導)를 얻어 전후의 전공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영담은 경상도 함안 사람으로 대담한 군략이 세상에 뛰어나고 유달리 강개하였으며 과거하기 전에 이미 여도(呂島)의 만호가 되었고 급제 후에는 영남의 바다 여러 진의 막하에 있었다.

그리하여 바다의 얕고 깊음과 도서의 험하고 수월함이며 나무하고 물 긷는 편의와 장소 등을 빠짐없이 다 가슴속에 그려 두었기 때문에 해군 함대가 전후에 걸쳐 영남바다를 드나들며 수색하거나 토벌할 때면 집안 뜰을 밟고 다니듯이 하여 한 번도 궁박하고 급한 경우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로 해군함대의 전공은 어영담이 가장 높았는데도 단지 당상관에 올랐을 뿐 선무훈(宣武勳)에는 참여하지 못하여 남쪽 사람들은 다들 애석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아랫사람이 아무리 큰 공을 세워도 그 공은 윗사람에게 가는 것이야 어찌하겠는가마는 이순신 혼자서 큰 공을 세운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어영담(魚泳潭)의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담력과 지략이 뛰어나 과거를 거치지 않고 여도 만호(呂島萬戶)가 되었으며, 무과에 급제한 뒤 진해(鎭海) 여러 진(鎭)의 막하(幕下)로 있으면서 해로를 자세히 조사하여 선박의 출입을 자유롭게 하였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수로향도(水路嚮導)로 활동하며 여러 해전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 사람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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