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막는지 대답도 못하면서 무조건 막는다?

백남기님이 돌아가셨다. 어떤 신부님이 돌보던 환자는 혼수상태에서 1년 만에 깨어났다고도 하는데... 그래도 혹시나 백남기님도 그렇게 벌떡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혼수상태 317일만에 돌아가셨다. 의사는 그랬다 한다. 1년 가까이 살고 계셨던 것도 기적이라고...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우쳐주기 위해 317일 동안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셨을까? 그 의미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서울대병원 앞 천막에서 매일 오후 4시에 하는 ‘백남기님 쾌유를 비는 미사’에 참석했었기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대 병원 앞으로 갔다. 미사는 없었다. 경찰의 부검을 위한 시신탈취를 막기 위해 모두 병원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조문이라도 할까 했지만 조문도 할 수 없었다. 경찰이 들어가려는 사람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막는 것뿐만 아니라 계속 채증도 하고 있었다.

▲ 서울대 의대 정문 봉쇄

 

▲ 서울대 병원 정문 통제
▲ 채증하는 경찰

아버지가 폐질환으로 본관 92**호에 입원해 있고, 엄마 혼자 병실에 계시다는 한 청년은 매형과 들어가려했으나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엄마와 통화도 하면서 환자 가족이라고 해도 들여보내주지 않자. “박근혜가 시켰냐?”고 하면서 경찰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하지만 경찰은 가타부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참 항의 후에 경찰이 확인해준다고 하고는 또 한참 있다가 매형과 들어갈 수 있었다. 큰 소리로 항의하는 환자 가족, 보호자 명찰을 패용한 사람들, 정확히 병실 번호를 외우는 사람들, 직원, 기자들만을 선별하여 들여보내주었다.

▲ 오른쪽 문에서 한참을 항의한 끝에 아버지 병실에 들어간 청년과 그 청년의 매형

친구가 병실을 옮겼다며 도와달라고 해서 왔는데 안 들여보내 준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50대 두 아주머니는 물론 못들어갔고 전국목회자정의평화위원회 소속의 정태효 목사님은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기도하러 들어간다고 해도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로만칼라를 한 신부님도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스님도 마찬가지...

▲ 오른쪽 문에서 주민등록증을 손에 쥐고 들어가려는 뒷모습의 신부님.
▲ 병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 계신 스님.

어린이병동에서 피자배달을 시켰다며 피자상자를 들고 온 사장님은 한참을 이리저리 다니며 하소연하다 통하지 않자, 피자를 줄테니 대신 전달해주고 돈을 받아달라는 요구를 하자 간신히 출구를 열어주어 들어갈 수가 있었다.

▲ 피자 박스를 들고 어찌할 줄 모르는 사장님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게 막는 근거가 있다면 말하라고 했으나 경찰은 묵묵부답이었다. 조문인 봉쇄가 왜 공무집행인지 물어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공무집행을 할 경우 소속과 이름을 대야한다는 사람들에게도 대부분의 경찰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한 경찰을 정보공개청구를 하라고 했다. 또 금방 들통 날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왼쪽 문에 가서 들어가게 해달라는 사람에게 왼쪽 문은 출구이고 오른쪽 문은 입구이니 오른쪽 문으로 가서 말하면 신분증 확인하고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오른쪽 문에는 신분증만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항의하고 있었는 데도 말이다.

▲ 왼쪽 문에서 봉쇄 이유를 알려달라는 시민과 경찰(가운데 안경 쓴 경찰이 정보공개 청구하라고 함. 또 왼쪽 문에 가서 말하면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다고 함)

 

▲ 경찰이 입구라는 오른쪽 문에 들어가기 위해 모여있는 사람들

이런 초법적인 공무를 지시받아 수행하는 경찰도 불쌍하고, '죄송하다'는 한마디 말은 커녕 거짓말로 순간을 모면하려는 경찰들도 창피하다. 그런 불법적 공권력에  막혀 조문도 하지 못해 화가 나서 어떨 줄 모르는 국민들도 불쌍하다. 물론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돌아가신 백남기님과 그 가족들이 제일 가엽다. 세월호 아이들과 그 가족들도 더 말할 것도 없고...

언제부터 이 나라가 운이 없으면 시민을 향한 명령발포가 아니어도, 공권력 집행에 의해 죽음까지도 이르는 나라가 되었나? 경찰이 사람을 사경에 헤매게 하고도 그 책임자가 사과 한마디 할 수 없다고 박박 우기는 나라가 되었나? 정부가 세월호 학생들 구조에 손을 놓고 죽게 만들고는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입 다물고 살라고 하는 나라가 되었나?

아니다. 우린 예전에도 그런 나라였다. 1960년 4월 11일 최류탄이 왼쪽 눈에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 열사, 1987년 1월 공안당국에 끌려가 물고문으로 죽은 박종철 열사, 1987년 6월 연세대 정문에서 반전두환 시위 중 최류탄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열사. 독재정권에서 우리나라는 그랬다. 그리고 이제 30년이나 지나 물고문과 최류탄의 합작품인 물대포에 맞아 사망한 백남기님이 있다. 공권력에 의한 무고한 죽음 뒤에는 무엇이 왔을까? 혁명이나 항쟁이다. 국민들도 아는데... 위정자들이 이를 모르진 않을 텐지...

경찰은 6시 넘어  백남기님 시신이 안치실로 들어간 후 일반 시민의 조문을 위한 방문을 허용했다. 경찰이 허용하고 말 권한의 문제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7시 넘어서는 장례식장 앞에서 수백명이 참가한 가운데 촛불문화제도 진행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층 1호실에서 장례식이 행해질 때까지 매일 오후 4시에 미사를 열 예정이다. 저녁 7시 촛불문화제도 장례식이 거행될 때까지 매일 열린다고 한다.

▲ 춧불문화제 (사진 제공 : 조약골)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김미경 주주통신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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