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4일 서울도성 걷기 행사가 있었다. 구간은 광희문에서부터 남산을 넘어 숭례문까지 제법 긴 코스이다. 안내는 도성해설사를 하고 계시는 허창무 주주통신원이 해주셨다. 애초에 참여율이 저조할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20여 명이 모여들어 분위기는 금세 달아올랐다. 신문을 보고 참석한 사람도 있었고, 매번 빠지지 않고 먼 길 달려온 사람도 있었다.

▲ 광희문

광희문은 한양도성의 동남쪽 문으로, 시구문 또는 수구문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본래의 자리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이곳에 고쳐지었다. 이 문은 본래 궁궐에서 시체가 나가던 문으로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다가 길이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가기위해 왕의 체면이고 다 팽개치고 황급히 빠져나간 바로 그 문이다.

▲ 홍예문

광희문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이른 시간이라서 이었는지 왕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한적하였다.

이윽고 약속장소에 15여명이 도착하였고 몇몇은 오고 있는 중이었지만 안내 해설은 시작되었다.

 

▲ 보물찾기

지금은 민가의 돌담으로 전락한 구간도 있고 사유지로 편입된 부분도 있어 성곽의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있었지만 보물찾기 하듯 해설사의 안내로 몰랐던 사실을 새로 알아가게 되는 것이 흥미로웠다.

▲ 시대 별 돌쌓기

성곽이 축조 시대별로 쌓는 방식과 돌의 형태가 다른 것도 흥미로웠고 600년의 시차를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1396년(태조 5)에 백악(북악산).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쌓은 이후 여러 차례 고쳤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길이 약 18.6km에 이르며,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래도록(1396 ~ 1910, 514년) 성의 역할을 한 건축물이다.

한양도성의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을 두었는데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없어졌다.

2014년까지 한양도성 전체 구간의 70%가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되고, 숙정문. 광희문. 혜화문은 다시 세워졌다.

축성 시기별로 태조 때에는 자연석을 거칠게 쌓은 반면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돌의 크기를 규격화하였다. 이는 적군의 화포에 대응하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한다. 우리가 숙종하면 떠올리는 후궁, 암투, 나약함 등의 이미지는 잘못된 것이었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영. 정조 시대의 안정적인 발전의 발판이 숙종 대에 이루어졌다는 것도 새로운 시각이었다.

▲ 구간표시

성곽을 쌓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느껴지는 글자들이 흐릿하나마 남아있다. 이는 일종의 실명제로써 자부심의 표시이기도 할 것이다. 전국의 각 지방의 군. 현별로 구역을 나누어 쌓았다고 한다.

▲ 따라가기 바빠

남산 중턱에 올라서면서 굴곡진 역사의 흔적을 많이 만나게 된다. 친일 부역자들 , 군부독재 그리고 권력에 기생하던 집단들의 부침을 기억하는 장소가 아직도 생생하다.

국립극장에서 남산 정상까지는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 열띤 강의

 

▲ 서울 지리적 중심점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에 모여서 숨을 고른다.

▲ 남산 N타워

남산의 N타워가 웅장하다.

▲ 팔각정에서 간식

팔각정에서 간단한 간식시간을 가졌다. 떡, 과일과 캔 맥주 그리고 컵라면까지 술술 나온다. 옹기종기 모여서 간단한 간식이나마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 하산길

하산길, 옆으로는 케이블카가 연신 오르내리고

▲ 안중근의사 동상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있는 상광장에서 선생의 숨결을 느껴본다. 중국군 100만 명도 해내지 못한 큰일을 해내었고, 임시정부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큰 줄기를 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을사늑약)과 7조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본 왕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왕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이 아니다"

▲ 수업 집중도 최고
▲ 귀한 말씀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함을 보거든 목숨을 주라 "

▲ 김구선생 동생

김구선생의 동상이 있는 중광장

▲ 이시영선생 동상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있는 하광장

이 넓고 좋은 땅에 일본의 신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게 치가 떨린다.

하산길, 남산공원의 푸른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었다.

▲ 숭례문

숭례문에 도착해서 일정이 끝났다. 숭례문은 화마에 주저앉은 뼈아픈 기억이 있다. 본래 관악산의 화기로부터 경복궁을 보호하기 위한 6가지의 장치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한강, 남지, 숭례문의 세로 간판(이화치화), 우회로(숭례문에서 광화문까지 직접 길을 내지 않고 우회로), 청계천, 해태로 불의 기운을 막으려 애썼다 한다.

▲ 뒤풀이

문화공간 온에서 뒤풀이 중, 한양도성탐방을 정례화 하자는 의견들이 나왔다. 상임이사께서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1인 1만원에 맞추어 막걸리까지 포함하여 푸짐한 점심 한 상을 내 놓았다.

다음 모임을 고대하며,,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김진표 주주통신원  operon.jp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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