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 소초(小草)

길을 걸어가는데 언덕위의 작은 풀들이 속삭이고 있다. 그들의 속삭임이 궁금하여 멈췄다. 그들에게 인사하고 끼어들어본다.

“잘들 지내니? 재미있나 보네?”

“응! 넌~?”

“나? 그냥~ 그럭저럭. 요즘 세상이 혼미해서 말이야. 시계(視界)가 없어”

“으잉! 그냥이라고? 우린 지금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얘기하고 있어. 어지러운 세상을 잠시 떠나 나와 함께 있어 볼래?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지 몰라!”

“뭐가 그리 재미나고 즐거운데?”

“좀 길지만 내 얘기 좀 들어봐. 지나가는 사람들 모습이 참 다양해.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도 잃어버릴 때가 많아”

“어허~ 그래? 어디 한 번 들어볼까?”

“어떤 이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가고

어떤 이는 온 얼굴에 눈물 가득히 울며 가고

어떤 이는 무슨 큰일 만난 듯 헐레벌떡 뛰어가고

어떤 이는 여유롭고 한가하게 천천히 가고

어떤 이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춤추면서 가고

어떤 이는 마지못해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이고

어떤 이는 콧노래 부르며 즐겁게 노닥노닥 가고

어떤 이는 수양버들처럼 축 늘어져서 힘없이 가고...”

“그런 모습은 나도 본 것 같은데?”

 

“아마 그럴 거야. 하지만 계속 들어 볼래? 난 지루할 시간이 없어.

어떤 사람은 예쁘게 꽃단장을 했고

어떤 사람은 초췌하고 초라한 민낯이고

어떤 사람은 화려한 비단옷을 겹겹이 입었고

어떤 사람은 허름한 옷으로 겨우 몸만 가렸고

어떤 사람은 깔끔하게 폼 나는 정장을 했고

어떤 사람은 다 헤어진 남루한 옷을 걸쳤고

어떤 사람은 팔이 없고

어떤 사람은 다리가 없고...”

“음~ 맞아! 그렇지~”

 

“어떤 사람은 시커멓고

어떤 사람은 새하얗고

어떤 사람은 짝귀이고

어떤 사람은 코가 오뚝하고

어떤 사람은 벙거지 코이고

어떤 사람은 배불뚝이고

어떤 사람은 홀쭉이고

어떤 사람은 대머리이고

어떤 사람은 삼단머리이고

어떤 사람은 기린목이고

어떤 사람은 돼지목이고...”

“맞아! 별의별 사람이 다 있기는 해. 그런데 난 내 생각만 하면서 걸어갔지. 그래서 주변 볼 여유가 없었어.”

 

“젖먹이 애는 업혀가고

귀여운 어린애는 아장아장 걷고

청순한 소녀도 가고

꿈꾸는 소년도 가고

팔팔한 청년도 가고

아름다운 미녀도 가고

노숙한 어른도 가고

꼬부랑 할머니도 가고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도 가고”

“넌 한 자리에 있지만 한 자리에 있는 게 아니었구나! 그저 가만있지 않았네? 사방팔방 쏘다니는 나보다 훨씬 본 게 많아. 대단한데?”

 

“그런가?

어떤 남녀는 다정히 손잡고 가고

어떤 남녀는 툭탁툭탁 싸우면서 가고

어떤 부부는 멀리 떨어져 가고

어떤 부부는 마주보고 웃으면서 가고

여럿이 어깨동무하고 어울려 가고

혼자서 쓸쓸히 땅만 쳐다보며 가고

두세 명씩 어울려 가고”

“맞아! 그 모습들이 눈에 선해! 정말 재미있는데?”

 

“그렇지? 재미있지?

어떤 이는 나를 살포시 만지며 가고

여러 이는 나를 짓이기며 밟고 가고

어떤 이는 나를 무심히 쳐다보다 가고

어떤 이는 나를 세밀히 관찰하며 가고

어떤 이는 나에게 침을 뱉고

어떤 이는 나에게 코를 풀고

어떤 이는 나를 발로 차고

어떤 이는 나를 손으로 뜯고

어떤 이는 나에게 배설까지 해

소피까지는 괜찮은데

대변까지 보고가면...

아~ 그럴 땐 정말 짜증 나~

나보고 어찌하란 말이야?

그래서 세찬 소낙비가 오면 좋아

다 씻어주니까”

“그렇겠네. 참으로 고약한 자들이 많지? 저들밖에 모르는... 얄밉고 얄궂은... 비가 오면 깨끗해지겠어! 시원키도 하겠고~”

 

“어린아이들은 장난치며 가고

노인들은 조용히 묵상하며 가고

어떤 이는 큰 엉덩이로 나를 깔고 앉는데

그땐 정말 답답해 죽을 것 같아

아무튼 오고가는 사람만 보고 있어도

얼마나 재밌고 즐거운지 몰라!

심심하거나 무료할 시간이 없어!

가끔 기분 상할 때가 있긴 하지만...

어때? 아직도 세상살이가 그저 그런 것 같아?”

 

“아!~ 나도 다 보았는데. 무정하고 무심했구나!

난 나만 보았어. 그래야 되는 줄 알았지.

나를 세상의 중심에 두었으니, 그 외는 보지 못한 거지.

어떤 때는 나 자신에까지도 보지 못하면서 말이야.

그러다 보니 편협한 내가 된 거야.

가끔은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내 밖에서 나를 보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세상의 다양성과 다채로움을 보았을 텐데.

제대로 된 삶은 세상만물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나만 홀로 이렇게 있었어. 별 것도 아닌 것으로 끙끙대면서...”

 

“지금까지 사람들의 겉모습만 말한 거야. 그것도 일부이지만.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이 있지.

땅위를 오가는 짐승들,

창공을 나는 새들,

땅속을 기어 다니는 생명들,

산과 계곡,

나무와 들풀,

바다, 파도와 해초,

여러 갈래의 길들,

바위, 돌멩이와 모래

하늘과 바람과 구름,

시냇물과 물고기

해와 달과 별 등”

“아~ 난 참으로 바보였어. 이를 어찌하지?”

 

“괜찮아. 너도 그들 중 하나이니까. 얘기하자면 끝이 없어. 하지만 다른 것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너의 생명이 유일하듯이 이 세상에 하찮은 생명은 없어, 삶도 그래.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과 실패는 순간적인 현상일 뿐이야. 사실 생에서 일등과 꼴찌, 성공과 실패 그런 것은 없어. 상하좌우는 순간의 기준일 뿐. 모든 생명은 다 그들 나름의 한 세상을 사는 게지. 그것으로 훌륭해!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위대하고 아름다워.”

“음~ 그래~ 알겠어. 스님들의 ‘삭발과 탁발’의 의미를 다시 새겨 봐야겠어.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도... 고맙고 미안해. 감사! 안녕!”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김태평 주주통신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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