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국가를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한다.

현대국가에서 법은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국가를 운영하는 한 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문법이건 판례법이건 법은 국가와 함께 존재하지요. 법은 ‘국가의 강제력을 수반하는 온갖 사회 규범’이라고 사전에서 정의를 하고 있네요.

춘추시대를 연 제나라 환공은 포숙아의 천거를 받아 관중을 등용하여 춘추오패 중에서 최초의 패자가 됩니다(대만이야기 2). 아버지나 어머니 누구 한사람만의 힘으로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없듯 국가도 왕 한사람의 힘만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거나 패업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춘추시대에 이어 140여개의 군소 국가들이 하나 둘 멸망이 되고 7개만 남아 서로 자웅을 겨루던 시기가 전국시대입니다. 그중의 으뜸은 진나라입니다.

▲ 좌: 기원전 350년경의 전국시대 지도.진 효공과 상앙이 부국강병책을 시행하던 시기.  우:기원전 260년경의 전국시대 지도. 혜문왕의 아들인 소양왕이 재위하던 시기. 소양왕은 진시황의 할아버지(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변모시킨 개혁가이며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 상앙(BC390-338)에 관한 글입니다.

진나라 효공은 전국에 인재를 구한다고 포고를 합니다. 당시 위나라 왕족이지만 서자 출신으로서 부름을 받지 못해 뜻을 펴지 못하던 상앙은 진나라로 들어갑니다. 스스로 업적이나 명망을 얻지 못한 상앙은 효공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경감을 찾아가 추천을 부탁합니다.

효공을 만난 상앙은 부국강병을 위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역사에서는 이를 상앙변법(商鞅變法)이라고 부릅니다. 군제와 세제를 정비하고 토지제도와 군현제 그리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개혁을 단행하여 약소국이었던 진나라를 군사강국인 중앙집권 국가로 변모시킵니다.

진나라의 국력이 강해지자 나머지 6개국이 진에 대항하기 위해 합종연횡을 하지요. 귀곡자 문하에서 동문수학을 한 전설적인 유세객 소진과 장의가 이때 활약을 합니다. 먼저 소진은 서쪽의 강국 진을 대적하기위해 초, 제, 연, 조, 위, 한 6국이 남북(종)으로 연합하여야 한다고 설득하여 6국의 제상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소진은 처음에 집과 땅을 팔아 진나라에 가서 벼슬을 얻고자 하였지만 뜻을 못 이루고 고향에 돌아와 갖은 비웃음과 수모를 당합니다. 그러다 6국의 재상이 되어 부와 권력을 얻고 고향에 돌아가자 모두가 쩔쩔매며 아부하기에 급급합니다. 소진이 형수에게 묻습니다. “형수님께서는 전에는 그토록 오만하더니 지금은 왜 이리 공손합니까?” 형수 말하기를 “지금은 도련님의 지위가 높고 재물이 많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소진은 ‘나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인데 가난할 때는 나를 경시하고, 부귀해지자 친척들마저 나를 경외하는구나.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라며 그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었답니다.

소진의 이 합종책으로 진나라의 동진정책은 오랫동안 미루어집니다. 이해관계가 복잡한 여러 나라의 동맹은 오래 지속되기가 어렵지요. 동맹관계가 깨지자 처음으로 그를 기용해준 연나라로 가서 다시 벼슬을 하였고, 연나라 왕의 밀명으로 제나라로 가서 큰 벼슬을 하자 이를 시기한 제나라 대부가 보낸 자객에게 죽음을 당합니다.

친구인 장의는 처음에 초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려고 유세를 나섰습니다. 초나라 재상과 술을 마셨는데, 재상이 아끼던 옥이 없어졌고, 의심을 받은 장의는 곤장 몇 백대를 맞아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아내가 탄식을 합니다. “책을 끊고 유세 따위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개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요. 앞으로 농사나 지으시오. 피라미가 분에 넘치게 용 흉내 내지 말고.” 그러자 장의 왈, “내 혀가 아직 있는지 봐 주게!” 세치 혀만 있으면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후 소진의 추천으로 진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였고, 혜문왕(효공의 아들) 때에는 재상이 됩니다. 재상이 되어 6국의 합종책을 깨기 위하여 횡으로 위, 조, 한, 제등을 설득하여 진을 중심으로 연합을 시키는데 성공을 합니다. 이를 연횡이라 하지요.

다시 상앙으로 돌아갑니다.

상앙의 부국강병책의 핵심은 북한의 오호담당제와 비슷한 오가작통법입니다. 다섯 가구 혹은 열 가구를 묶어 납세와 징병의 단위로 삼았습니다. 어느 한 가구라도 법을 어기면 연좌제로 처벌을 하였습니다. 세금과 병력의 확보는 강국의 지름길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농산물 증대를 위해 상업을 억제하고, 노예제를 폐지합니다. 노예제 폐지는 지주 및 권력자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양민을 늘려 재정과 징병을 원활하게 하였지요. 또한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우면 작위를 주고 오래된 악습을 타파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기존 수구세력의 반발은 당연합니다. 이때 최고 권력자의 의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다행히 야심이 많은 효공은 전폭적인 지지를 하였습니다. 상앙은 법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법이 권위가 있어야 하며, 백성들이 법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 남문에 긴 장대를 꽂아놓고 포고문을 붙입니다. ‘이 장대를 북문으로 옮기면 금 10냥.’이란 어마어마한 상금을 내걸지요.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자 상앙은 금 50냥이란 포고문을 다시 붙입니다. 이 때 어떤 사람이 미친 척 장대를 북문에 옮깁니다. 그리고는 50냥을 받지요. 그 이후에 국법은 힘을 받아 시행에 옮겨집니다. 이 일화가 사목입신(徙木立信)입니다.

▲ 사목입신(徙木立信)의 고사. 나무를 옮겨 믿음을 얻다. 법이 공평하면 신뢰를 얻지만 권력자의 칼날이 되면 재앙이 따른다(신열국지 삽화.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처음에는 태자도 불만이라 법을 어기지요. 그러자 상앙은 태자의 스승을 법에 의거 처벌합니다. 태자뿐만 아니라 많은 대신들도 불만을 가졌지만 상앙의 법은 엄격하게 시행이 되었습니다. 백성들도 처음에는 불만이 많았지만 20여년이 흐르자 변방의 약소국이었던 진은 초강대국이 됩니다.

상앙은 효공에게 자신의 고국이었던 위를 치라고 합니다. 효공이 군대를 내주자 법가이면서 병법에도 탁월했던 상앙은 군대를 이끌고 정벌에 나섭니다. 위나라와 대치한 상태에서 간계를 써서 적장을 사로잡고 함양(현재의 서안,西安, 진과 당나라 때 수도인 장안)을 확보합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진은 수도를 함양으로 옮기고 동쪽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만들었습니다. 상앙 자신도 상땅을 자신의 영지로 받지요. 원래 위나라 공손앙이란 이름이 이때부터 상앙이라 불립니다. 위아래 가리지 않고 엄격하게 시행이 된 법치는 새로운 형태의 중앙집권적인 전제군주 체제를 만들어 향후 중국을 최초로 통일시키는 기반이 됩니다.

상앙의 든든한 후원자이며 배경이 되어준 효공이 죽고 상앙과는 갈등을 빚었던 태자가 뒤를 잇고, 스스로 왕이라 칭합니다. 바로 혜문왕이지요. 혜문왕은 상앙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보수세력을 규합하여 상앙 일파를 제거합니다. 상앙은 도피를 하지만 자신이 법제화한 오가작통법에 의해 누구고 재워주지도 숨겨주지도 않지요. 밤에는 성문을 꼭꼭 잠가서 새벽닭이 울어야 열어줍니다.

고생고생 어렵사리 고국인 위나라로 탈출에 성공을 합니다. 하지만 위나라에선 비겁한 간계로 수도 함양을 뺏긴 원한에다가 이미 강대국이 된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상앙을 돌려보냅니다. 도중에 기지를 발휘해 봉읍지 상으로 가서 반란을 도모하지만 사로잡혀 수도로 이송이 되고, 스스로 만든 거열형(수레에 사지를 묶고 4방으로 몰아 죽이는 잔인한 형벌)에 처해져 죽음을 맞이합니다.

▲ 자신이 고안한 거열형이란 방법으로 처형이 되는 상앙. 상앙의 권세는 군주 효공과 비슷했지만 과욕과 부덕의 결과는 지극히 참담했다(신열국지 삽화,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상앙은 뛰어난 지략과 권력욕을 가지고 있지만 덕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거나 능력을 과신하는 사람들은 남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타협을 할 줄도 모릅니다. 진정 똑똑한 사람을 총명하다고 하지요. 聰은 항상 마음의 문을 열고 잘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明은 명백하게 이해를 하는 것이고요. 잘 듣고도 이해를 못하는 자, 스스로 아둔함을 깨우쳐 매사에 조심을 하면 큰 어려움을 면하겠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따라서 지략보다는 지혜가 앞서야 하고 지혜보다도 덕을 더욱 중시하지요.

제나라 환공이나 진 효공은 나름 그릇이 되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관중이나 상앙과 같은 개혁적인 인물과 며칠을 토론을 하고 등용을 시켜 패자가 되었습니다. 널리 인재를 구하고 알아보는 능력을 갖춘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혼군은 스스로 지혜롭지 못하니 힘으로 누르고, 말을 들어도 간신이나 내시의 달콤한 말만 듣게 됩니다. 당연히 명망과 실력을 갖춘 인재는 멀리하게 되지요. 밀실인사가 이루어지는 순간 이미 망하는 길에 들어섭니다.

혜문왕은 비록 개인감정으로 상앙을 쳐내지만 혼군은 아니었습니다. 수구세력과 힘을 합쳐 상앙 일파를 제거하고, 다시 수구 세력을 몰아낸 후 상앙이 펼쳤던 개혁을 지속적으로 시행하여 진나라를 더욱 부강하게 이끌어갑니다. 여러 전투를 통해 국토를 더욱 넓혔습니다. 혜문왕 사후 4대손이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부강한 나라들은 새로운 환경에 응전을 잘하고, 그 다음 정권이 계승하여 더욱 발전을 시키는 패턴을 보입니다. 초강대국이었던 초나라는 오기의 개혁을 다음 정권이 깡그리 뒤엎었다가 망하지요. 반대로 영국이나 호주와 같은 곳에서 보수정권이 밀려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 대대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합니다. 그러다 인심을 잃고 보수정권이 다시 들어서지만 기존의 개혁정책들은 더욱 발전시켜가지요.

우리 현대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립니다. 살인마에서 구국의 영웅까지. 그 평가들은 논외로 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아웅산에서 숨진 각료들이 요즘 말로 ‘역대급’ 이었다는 사실!

특히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나는 경제를 모르니 경제정책은 당신이 대통령해라!‘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그는 금융실명제, 물가안정화정책, 정보화정책, OECD가입, 수입자유화 정책을 입안했다고 합니다. 어떤 정책은 전두환 시절에 시행되기도 하고 어떤 정책은 다음 정권에서 넘어가서 시행되기도 하였지요. 그래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본인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인재를 잘 쓴 덕에 나라를 위기로 몰아가지는 않았나봅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 저는 곧 한국에 들어갑니다. 11월 말까지 체류할 예정입니다. [대만이야기]도 잠시 쉽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동안 도움을 주신 분들과 다른 통신원, 그리고 [대만이야기]를 즐겨 읽으신 분들을 뵐 수 있는 기회를 희망합니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김동호 주주통신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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