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이 칭찬하고 상이라도 내렸더라면 세계최호 온실은 발전하였을 텐데

성종실록 제13권에 기록된 왕의 전교(傳敎)의 한 부분이다.

"때는 1471년 1월의 추운 어느 날, 궁궐에 쓰이는 꽃을 키우는 기관인 장원서(掌苑署)에서 철쭉과의 일종인 영산홍(暎山紅) 한 분(盆)을 임금께 올리자, 왕은 “초목의 꽃과 열매는 천지의 기운을 받는 것으로 각각 그 시기가 있는데, 제때에 핀 것이 아닌 꽃은 인위적인 것으로서 내가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바치지 말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 한지를 사용하여 세계 최초의 온실은 운영한 자랑스러운 조상을 소개한 안내판

이 실록에 나오는 영산홍은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4월 중순이나 피는 꽃이다. 이 꽃이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우리나라의 발달한 현대 원예기술로도 보통은 2월 하순이나 3월 초쯤이나 되어야 꽃들을 피운다. 이 무렵쯤에 은행이나 큰 관공서 같은 곳에서 환하게 피어난 철쭉꽃을 보게 되는데, 이 꽃이 대부분 영산홍인 것이다.

그런데 1471년이면, 지금으로 부터 545년전 이다. 그 옛날에 요즘보다 더 빨리 영산홍을 피웠다는 말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2001년 발견된 『산가요록(山家要錄)』이란 책이 그 해답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15세기 중반 의관(醫官)으로 봉직한 전순의(全循義)라는 분이 쓴 생활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쓴 책으로 당시의 농업기술과 함께 술 빚는 법, 음식 조리법, 식품 저장법 등 생활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이 가운데 「동절양채(冬節養菜)」편, 즉 ‘겨울에 채소 키우기’ 항목에 당시 온실 건축에 관한 세 줄의 기록이 나온다.]

그러면 우리 조상은 어떤 방식으로 온실을 만들어서 썼던 것일까? 이 책에는 자세한 것은 기록이 되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조선 온실의 모습을 알 수 있게 기록이 되어 있다.

▲ 한지로 만든 온실의 모습, 남쪽으로 난 창은 기름먹인 한지로 발랐다.

"남쪽을 제외한 삼면을 진흙과 볏짚으로 쌓은 흙벽돌로 벽을 쌓고, 바닥은 구들로 만들고 그 위에 30센티미터 정도의 배양토를 깔았으며 45°로 경사진 남쪽 면은 창살에 기름먹인 한지(韓紙)를 붙여 막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든 조선시대 한지온실의 성능은 과연 어느 정도이었을까?

그 성능이 요즘의 온실보다 훨씬 더 뛰어났고, 과학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더 빠른 영산홍의 개화로 증명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무슨 장치를 어떻게 하였기에 그런 우수한 온실이 되었다는 말인가?

 [조선시대의 온실에는 이미 온돌이 설치되어 흙의 온도를 25℃로 유지할 수 있었다. 온돌은 아침과 저녁으로 두 시간씩 불을 때었다. 이때 아궁이에 가마솥을 얹고 물을 끓였는데 가마솥에서 나온 수증기를 모아서 온실 안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였다. 이로써 실내 온도를 높이기도 하였지만 함께 습도를 높일 수가 있었다. 조선이 유럽보다 최소한 170년 이상 앞서서 우수한 온실을 가질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한지’의 역할이 컸다. 판유리가 없던 시절인 조선의 기술자들은 책 종이와 창호지로 쓰이는 한지에 들기름을 먹여서 채광창으로 이용하였다.]

▲ 가마솥의 수증기를 모아 온실 안으로 보내는 장치 부컥 쪽 모습

이 부분에서 세 가지에 주목을 하여야 한다.

첫째로 온돌을 이용하여서 지열을 높이는 방법으로 충분한 온도를 유지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충분히 온도를 높여 놓은 흙은 적어도 5,6 시간은 그 온도를 유지하였기에 거의 6월 달의 지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지온을 덥히기 위해 불을 때는 아궁이에 가마솥을 얹어서 가마솥의 물이 끓으면서 나오는 수증기를 가마솥의 뚜껑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 놓고, 그 구멍 위에 나무판자로 수증기가 모아져서 온실 안으로 들어가도록 통로를 만들어서 온실의 안쪽으로 수증기를 유도하였다. 이렇게 수증기를 온실 안으로 들여보내므로 해서 기온도 높이지만 습도도 높일 수 있게 하였다. 바로 이것이 요즘 비닐 온실이나 유리 온실보다 더 뛰어난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 가마솥에서 나온 수증기가 온실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온도도 높이고 습도도 유지하게 하였다.

셋째로는 비닐이나 유리 온실은 공기 순환이 안 되어서 물방울이 많이 생겨서 이 맺힌 물방울이 없어지기 위해 증발하면서 열을 빼앗아서 실내 온도를 낮게 만드는 것이다. 한지에 기름을 먹인 종이창은 물방울 맺힘이 없기 때문에 기온이 내려가는 일이 적으며, 물방울이 맺혀서 햇빛의 투과를 막는 일도 없고, 또 물방울이 떨어져서 작물에 해를 입히는 일도 없었다.

▲ 기름먹인 한지 창은 물방울이 안 맺혀서 보온과 물방울 피해가 없다.

[한지 온실에서는 파종 후 3~4주면 채소를 수확할 수 있었으며, 한겨울에도 여름 꽃을 궁궐에 공급할 수 있었다. 한지로 채광창을 만들고 온돌을 이용하여 기온과 습도를 조절했던 조선시대 15세기 온실은 현대 온실보다도 더 과학적이었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기술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고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훌륭한 기술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마도 위의 첫 부분에서 읽은 실록의 사례처럼 임금님이 이런 것을 좋아하시지 않았기에 빛을 보지 못한 면이 있었을 것이다.

만약에 성종임금님이 '그 영산홍이 참 예쁘구나. 이렇게 추운 겨울에 저렇게 꽃을 피워낸 그 장원서의 관리에게 큰 상을 내리고 앞으로 더 멋진 꽃들을 피우도록 하라 일러라' 하였더라면 아마도 정원서는 더 열심히 온실을 운영하였을 것이고, 그 기술은 점점 더 발전이 되었을 것이며, 지금까지 잘 전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고급문화인 오페라 같은 것들이 귀족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들의 많은 지원을 받아서 더 찬란하게 꽃을 피웠듯이 말이다.

사실 국민들을 위해서 늘 낮은 대로만 흐르는 지도자가 국민을 위해 공헌을 한 것은 틀림이 없지만, 이 경우처럼 좀 더 고급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은 어쩜 지도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에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라 할까?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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