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우리에게

최근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재난, 각종 사고들 앞에 우린 무기력해졌다. 이 어마어마한 사건들, 그 공포감 앞에서 개선하려 노력하거나 그에 분노하기보다는 '나만은 저런 희생을 당하지 말아야지.' 라며 몸을 사리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래도 인간의 감정이 있는지라 처음 얼마 간은 재난 앞에 슬픔을 공유하거나 아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지쳐갔고 이를 '피로감'이라는 다소 이상한 맥락으로 이해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 아픔을 이해하지만 아픔의 근원이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그만하라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에겐 이해할 수 없는 포기의 정서가 생겼다. 옳지 않지만 그냥 잊자고 한다. 무언가 거대한 힘이 우리 개인을 무기력하게 가로막고 있다는 증거다. 약육강식에 익숙해졌다는 증거, 그 힘이 무엇일까.

우리 사회는 이미 살 만한 사회가 아니다. 우리에겐(어느 강자라 해도) 항상 강한 순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약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약자가 된다 해도 짓밟히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 그런 신뢰의 사회가 살만한 사회 아닌가. 즉, 인본(人本)이 실현되는 사회라는 믿음이 있어야 움츠러들지 않고 편안하게 우리 사회를 얘기할 수 있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생각한 이후 언제부턴가 우린 다시 이렇게 이 사회에서 우리의 감정을, 우리의 정의감을 감추고 포기하게 되었다. 가만히 그 원인을 생각해보면 문제는 우리에게 있었다. 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최근 옥시 파동에서도 그 문제는 여실히 드러났다. 인체에 치명적인 독성 물질을 넣은 가습기 살균제에 백 명이 넘게 죽어갔고 그 피해자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과연 근본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걸까.

우린 그 옥시 제품 생산 회사에 몰매를 했다. 물론 그 옥시 회사는 부도덕함의 극치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조직이고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눈에 드러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이런 속성들을 방지할 수 있을까.

바로 그런 일들을 막을 기준을 세우고 행정을 하라고 정부를 만들었다. 지금도 무수히 출시되고 있는 생필품들의 생산 공정을 꼼꼼히 점검하여 유해성 등을 점검하고 출시 여부를 결정하라고 환경부, 보건복지부를 만들었다. 문제의 근원을 방치한 채 문제의 말단을 비난한들 근본적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다. 언제든 기회가 오면 그들은 다시 은밀하게 그런 부도덕한 짓들을 할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을 하라고 우린 박봉에도 세금을 내고 실제로 엄청난 세금을 걷어가고 있다. 그런 일들을 하지 않는 정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조직일까. 그 존재가치가 있는 것일까.

우리가 문제의 근원을 터치하지 않고 권력자들을 비판하지 않은 채 말단을 향한 비난으로 분노를 가라앉히는 동안 권력자들은 슬그머니 꼬리 자르기로 깔끔하게 이미지 쇄신을 하곤 한다. 심지어는 세월호 사건이나 농민 백남기 사건처럼 엄청난 사건들이 줄을 이어도 책임자를 처벌하는 당연한 상식은 온 데 간데없고,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오히려 죄인이 되어 스스로 자기 책임을 물어야 할 이상한 지경에 이른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관리·감독하라고 쥐어준 약 400조(년간국가예산)의 돈, 국가는 이 어마어마한 돈을 세금으로 거둬 어디에 쓰고 있는 것일까. 결국 그 많은 세금을 엉뚱한데 쏟아붓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우린 제대로 질책하기는커녕 그들에 면죄부를 주는 피로감 타령만 하고 있다. 이런 무심함에 결국 정권은 국가를 사유화하려 하고, 정부 재정이 자기 집 곳간인 양 생각하는 파렴치함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아무리 대형사고가 터져도 정부는 꼬리 자르기로 문제 해결에 신속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이런 꼬리 자르기에 대한 국민적 묵인은 우리 사회를, 우리 자신을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몰고간다. 한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인 법 체계가 무력화되면서 국가는 단지 무위(無爲)로만 그치지 않고, 세금도둑이 득실거리는 치열한 쟁탈장이 될 것이며, 결국 우리는 이런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법 체계가 무력화된다는 것

법적 안전망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노동 현안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MB 시절 노동계 죽이기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집권하자마자 공공기관 및 정부 산하기관에 단체협약을 고치라고 시정명령했다. 단체협약을 고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압박했다. 단체협약이란 무엇인가. 노동조합과 사용자가 법률에 의해 서로 합의한 일종의 계약이다. 단협의 변경은 노동조합과 회사가 협의하여 합의에 이르는 절차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법의 근간을 무시하고 재정을 내세워 기관들을 압박했다.

현 정부 들어서도 비슷하게 법체계를 흔드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평가제도를 도입하겠다며 공공기관 등을 압박하고 있다. 평가제도 도입(임금체계 개편) 역시 명백한 근로조건의 불이익 변경에 해당하므로 노사 간 합의(근로자 동의)를 해야 할 사항이다(근로기준법 제94조 제1항). 그들이 이러한 법 체계를 몰라서 그랬을까. 법무부가 철도노조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했음에도, 국무총리실이 이를 불법파업으로 규정하고 국토해양부에 강력 대응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한겨레 2016.10.6).

이처럼 법 위에 그들이 있다는 식의 안하무인이 극에 달했다. 적어도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억지로 논리를 짜 맞추려는 치졸함 조차도 거부한다. 드러내놓고 해볼 테면 해보란 식으로 법 체계를 흔들고 있다.

 

법의 작동이 정지하면 그 다음이 약육강식인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법의 작동이 느슨해지는 순간 모든 약자들은 희생을 각오하고 살아야 한다. 지금도 많은 약자들이 희생 속에 살고 있지만, 중간층이라고 다를까. 그들끼리 끝없는 경쟁을 해야 하고(잘 보이기 위해), 피 터지게 살고 나면 손에 남는 것은 약간의 돈이 될까.

그들은 동물의 세계에서나 자연스러운 이런 약육강식의 법칙에서 승리하는 자들을 능력자라고 부른다.

 

공통의 이해 없는 힘 논리의 끝판왕, 대체 국가의 존재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약육강식이란 손쉬운 도구는 권력자에게 더 없는 훌륭한 시스템이다. 즉, 권력자가 나서서 사회를 관리 감독하지 않아도 그들끼리 알아서 싸워 올라온 자에게 훈장을 주면 된다. 우린 지금 약자들끼리(서로 뺏어와 취할 것이 없는 사람들끼리)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이다. 그래 봐야 손에 쥐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아주 작은 것들뿐인데 말이다.

눈부신 발전을 이룬 이 인류사회에서 여전히 먹고사는 기초적인 문제에 매달리며 사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우리의 세금으로 우리를 위해 존재해야 할 국가, 그 존재 의미에 시선을 깊숙이 고정시켜야 할 때다.

 

「 국가가 잘 조직될수록 시민의 마음속에서는 공적인 일이 사적인 일보다 중요시 된다. 」
「 나라 일에 관해 누군가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말을 하자마자 국가는 이미 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                   < 루소 / 사회계약론 >

 

편집: 이미진 편집위원

 

김진희 주주통신원  kimjh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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