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24일 저녁 '문화공간 온'에서 박성득 선배를 만났다. 그는 한 편의 글을 <한겨레:온>에 건네주었다. 한겨레가족과 주주들에게 보내는 글이다. 요즘 그의 가슴은 28년 전 한겨레 창간 때처럼 다시 뛰기 시작했다.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배를 주창하는 목소리와 팔의 힘은 흡사 창간호를 손에 들고 건배한 그날의 느낌이었을까? 박 선배는 최근 의형제를 맺은 황선주 주주(자신이 운영한 군산병원 건물을 한겨레에 기증한)와 '문화공간 온'을 찾았다. 한겨레 주주들이 만든 이 공간을 보고 그는 연신 감탄과 기쁨의 덕담을 내놓았다. 

박성득 선배는 1950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1976년  경향신문 기자로 입사했다가 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고 해직됐다. 이후 <말>지 제작에 참여, 지하 편집실에서 '보도지침 특집'을 편집했다. 1987년 한겨레신문사 설립에 가담했고 제작, 판매, 기획 분야에서 이사로 일했다.

 

나는 대략 18년 동안 한겨레신문사의 밥을 먹었고, 회사를 그만 둔 지 10년쯤 지났다. 사업인지, 장사인지 벌였다가 빚더미에 앉아 집도, 절도 날리고, 신용불량도 모자라 부채 독촉에 시달리면서 지냈다(도시와 농촌의 노가다는 그나마 명예롭지만). 치사하고 비굴한 밥벌이와 행동들... 세상 곳곳에 골고루 코피를 흘리며 살다 보니, 지난 세월은 마치 염라국에서 전생을 바라보는 듯 아득하기만 한데...

여러 지방에서 잡초더미 자갈밭을 구르며 사는 동안 나는 비로소 30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 부자와 권력자의 회유와 협박에 놀아나지 않는 언론의 출현을 백성들이 왜 그토록 절실하게 염원했는지를 이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대도시의 번화가를 한발 벗어난 곳의 대한민국의 현실은 저수지의 개떼들 같은 참혹한 야바위와 부패, 속임수와 협박 공갈의 현장 속에 그대로 널려 있음을 알았다. 돈과 권력과 아부가 결탁해서 돌아가는 회전무대에서 깡패와 법률과 기자가 나란히 호위무사 노릇을 하고 있다. 

승진을 구걸하기 위해 돈 보따리를 싸들고, 군수 마누라를 먼발치에서라도 바라보려고 발을 동동 구르는 그 기막히고 눈물겨운 미풍양속(?)도 면면히 살아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눈을 뻔히 뜨고 그 꼴을 보며 살아온 민중들의 가슴이 어떠했을까? 얼마나 속 깊이 멍이 들었을까? 그 멍든 가슴을 자식세대까지 그대로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겠지.

소위 '기자'라는 자들이 권력에 아첨하고 약한 자들을 서슴없이 짓밟는 세상의 상식을 바라보며 그들의 심장은 어떠했을까? 진정한 언론의 탄생을 보고 싶다고 줄을 서서 꼬깃꼬깃 주머니를 뒤지던 주주들의 심정을 나는 몰랐었다. 눈뜬 봉사란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예수께서 일찍이 탄식 하신 기록이 있다,
 
"너희는 보고 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 한다..."


군산병원을 말아 먹다

나는 ‘한겨레’라는 신문 이름이 정해지기 전에 ‘새신문 창간기금’ 수금 요원으로 주로 부산, 경남 지역을 돌아 다녔다. 그런 인연으로 창간 때 꼬깃꼬깃한 돈을 털어 기금을 낸 주주들과는 고향 친구 만난 듯이 무작정 트고 보는 버릇이 있다.

그런 인연 중에 군산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하던 황선주라는 시골 의사가 있었다. 황 원장은 무척이나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나와는 등산을 같이 하기도 했고, 내친 김에 꼬불꼬불한 군산의 옛 동네 골목 안에서 식은 설렁탕 국물을 안주로 소주병이 굴러다니도록 마시기도 했다.

"박 형, 군산이라는 곳은 '문화'라고는 개똥만큼도 없어."
"인간의 권리, 민주주의... 뭐, 이런 낱말이 있는 지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저마다 먹고 살겠다고 눈에 핏발이 서도록 돌아다니지만 막상 아무런 희망을 느낄 수도 없소. 돈 울거 내고, 주고 받고, 치고 박고하는 것 외에는 듣고 보는 일 조차 없소."
"현대 사회에 인간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내가 의사라지만 하는 일은 인술도 뭣도 아무것도 아니지요. 생명을 살리는 것이 의사의 길 일텐데...내가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건지..."
"내 병원 건물이 보잘 것 없지만 한겨레신문사에 기증할 테니, 문화센터 같은 걸 세워서 군산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문화라는 것이 있다. 세상은 항상 이 꼴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가야 한다’ 것을  어른들이 못 알아먹으면 최소한  어린 아이들만이라도 사람다운 세상에 대한 소식을 전달하는 데 사용해 주시오."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 있었지만 그의 눈은 휑하니 비어 있었고 절망과 연민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듯했다. 이런 때는 뭔가를 내놓는 사람은 약간 뻐기는 맛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먼 허공을 거쳐 오는 듯한 그의 눈동자는 또 무슨 사연인가?
 
소주병과 설렁탕 국물과 함께 군산의 병원 건물을 말아 먹은 지  25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에는 군산문화센터를 세우고 의욕적으로 문을 열었지만 군산 사람들은 단단한 맨땅처럼 문화센터를 외면했고, 회사에서는 적자니, 어쩌니 하면서 곧 문을 닫았다. 그가 기증한 목적을 실행하지 못하고 지낸 세월이 어언 20년에 가깝다.


지난해 연말쯤인가 실로 오랜만에 군산 땅을 밟았다. 옛 병원 건물은 시골 여인숙처럼  썰렁했고, 그가 기숙하고 있는 방에는 책과 이부자리와 잡동사니가 홀아비살림처럼 늘려 있었다. 나는 죄스런 맘으로 3층 어두운 공간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그날 저녁, 전국 각지에서 모인  주주들 수십 명이 황 원장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주주들의 이름으로 만든 그 작은 감사패를 받고 그가 얼마나 감격해 하는지....

▲ 2015년 11월 14일 전국한겨레주주통신원회(위원장 이요상) 전국총회에서 황 원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그날 밤 황 원장은 잠이 안 오는 지 여관방에 있는 나를 야식집으로 불러냈다. 그는 품속에서 종이봉투에 싼 감사패를 꺼내서 쓰다듬었다. 어느 시골 친목계 총무라도 몇 년하고 나면 받을 법한 평범한 감사패였다.

"나는 저 건물이 결국에는 좋은 목적을 찾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소. 한겨레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왜 못하겠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꼭 이루어 냅시다."
눈물을 글썽이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감정이 뒤엉켜 가슴이 밀가루 반죽하듯이 일렁거렸다.   


누가 한겨레 독자인가
 
나는 한때 사방이 1천 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에 살았다. 그곳은 1년에 6개월 이상이 겨울이었다. 하도 적막해서 한겨레신문을 구독했다. 덕분에 우편배달원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나의 오두막을 찾아오는 신세가 됐다. 그는 동네 토박이에 기타를 치고 보컬활동을 하는 유쾌한 친구였다. 6개월쯤 지나서는 간단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를 타는 직업이라 술을 내놓을 수는 없고, 물이라도 한잔씩 마시고 가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캬! 이거 한겨레신문 말예요, 나도 구독한다면 이걸 하겠어요. 그런데 이거 보는 사람이 우리 면에 또 한 사람이 있는데, 산꼭대기에서 농장을 해요"
나는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판매국장을 하면서 독자라면 ‘배달과 수금'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 멍청이가 돼 버렸던 것이다. 

이곳 산골은 별난 풍습이 있었는데, 해마다 8월15일 광복절이 되면 객지에 나가 사는 사람들까지 모두 고향으로 돌아와 학교 운동장에서 동창회도 하고 하루 종일 운동회를 하는 것이다. 왜 이런 궁벽한 산골에서 광복절이 최대의 명절이 됐는지는 몰라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일본인 지주가 도망을 가면서 쌓아두었던  쌀가마니로 몽땅 떡을 찧어 버렸는지...

하여튼 이날은 누구든 운동장에 가서 아무 동네 천막에라도 들어가면 술이며 국밥이며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고, 어르신들이 많다 보니 웬만큼 서 있을 힘만 있으면 모두 선수가 되었다. 나야 객지 놈이니 이곳저곳 가릴 것 없이 기웃거리며 골고루 맛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배구장에서 '박씨, 박씨! 이리 와"하고 팔을 흔들어 대며 불렀다.
 
나는 술기운이 오르는 김에 배구장으로 뛰어 들어가 엉거주춤 껍적거리는데, 어쩌다 공이 눈앞에 뜨이길래 네트 위로 길게 토스를 올려 보았다. 그랬더니 왠 대머리가 반질반질 빛나는 사람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어울리지 않는 프로의 솜씨로 보기 좋게 스파이크를 내려 꽂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발이 땅에 닿을 사이도 없이, 기분이 하늘로 솟구치는지 땀에 젖은 ‘난닝구’로 나를 마구 얼싸안고 뺑뺑이를 도는 것이었다.

이후로도 우리 콤비는 촌사람들의 탄성과 함께 몇 번이나 영화 같은 강 스파이크 장면을 연출했고, 신바람이 많은 대머리는 아예 춤을 덩실덩실 추는데, 시합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손을 잡고 술잔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사람들이 덩달아 몰려오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통성명을 하는데 이 양반이 지난해까지 체육회장이었다. 이곳 산골은 면장 다음에 최고 높은 사람이 체육회장이란다. 논밭을 팔더라도 한번쯤 할 만한 직책이었고, 한번 했다하면 죽을 때까지 ‘회장님’이며, 면사무소에라도 가면 전 직원이 일어나서 맞이하는 유일한 직함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나이를 갖다 대어 보니 내가 몇 살 더 먹었는데, 그날부터 나는 졸지에 이 대머리의 ‘헹님’이 되어 버렸다. 그 뒤로는 자기 농장에 고기를 구웠다 하면 나를 데리러 오는데,  삼겹살을 그리도 자주 구워 대는지... 그런데 보아하니 이 사나이가 뛰어난 조직가였다. 그리고 이 자가 바로  한겨레 독자였다.  

산골 구석구석, 누가 누구와 사돈의 팔촌이고, 누구와 누구는 20년 전에 애인이었다. 무슨 농사를 지어서 얼마를 까먹고 빚이 얼마인지, 담배는 몇 갑을 피우고, 어느 술집은 누가 단골인지, 대머리 구석구석에 장부가 촘촘히 들어앉은 것처럼 끝없는 인물파일이 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무원 누구는 언제 얼마를 바쳐서 승진했는데, 어느 선거 때 줄을 잘 못 서서 찬밥이 됐는지, 누구는 무슨 술을 사면 만사형통인지까지도 깨알같이 알고 있었다.

언젠가 왜 하필 한겨레를 보느냐고 물었다. "헹님은 아직 모를 거요. 기자라는 놈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놈들인지." 그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더니 "헹님, 내가 장담을 할게. 요거만 주면 뭐든지 주문대로 쓰는 놈들이 기자요. 대신에 돈을 안주면 무조건 물어뜯어. 뭐가 정의고 진실인지 이런 건 일체 상관 없어. 근데 한겨레는 절대 그 짓은 안 하니까. 존경할 수밖에... 한겨레 기자님들 눈에는 여기까지는 안 보이겠지만 똑바로 된 언론이 있으면 그 지방 분위기는 확 달라질 수 있어요" 그는 대머리답게 논리가 깔끔하고 간단했다.

연말이 되자 청년 시절부터 부정선거 방지 운동을 같이 해온 동지들이 모이는 송년회에 나도 합석을 했다. "우리가 아무리 산골 촌놈이지만 돈 몇 푼 받고 표 팔아먹는 창피한 짓은 하지 말자. 그리고 이 지역 사람들은 우리와 친척이거나 동창 선후배이니까 이 짓만은 하지 말도록 우리가 계몽을 하자. 우리 스스로 지저분한 짓거리를 하면서 남이 우리를 촌놈이라고 무시한다고 불평하면 말이 안 된다."
 
이것이 출발점이었다. 군대를 갓 제대한 새파란 나이의  청년인 이들의 결의는 이 지역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돈 봉투 돌리는 현장에 잠복하고 있다가 돈을 받은 사람에게 "헹님, 아제! 우리가 이러니까 우리를 촌놈이라고 무시하는 것 아닙니까. 가서 던져 주어 버립시다. 우리가 술 한 잔 살게요."
이렇게 훼방을 놓고 다니니까 파출소 순경이 선거철이 되면 아예 집을 에워싸고 집 밖을 못 나오게 했다니... 참 기가 막히고 얼떨떨해지는 나라다. 부정선거를 방해한다고 얼마나 시달렸던지, 그는 마침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십 수년이 지나서야 농사꾼으로 다시 고향에 돌아 왔다. 
 “요새는 어떤데?”
 “똑 같아요. 저놈들도 얼마나 영리해졌는지, 한 놈이 맡아 두었다가 선거 끝나면 조용히 배급해요. 옛날부터 받아먹는 게 버릇이 돼서인지 선거는 으레 이런거다 해요"
"차라리 후보들 모아 놓고 공개 입찰을 하는 게 좋아요. 입찰해서 군민들에게 싹 갈라 붙이면 민심이라도 안 쪼개져요."
 판매국장으로서 책상머리에 앉아 있을 때 내가 독자에 대해 아는 것은 '한달 신문 값 8천원, 본사 입금 1천원'이라는 숫자 뿐이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바라본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죽을 때까지 업드려서 뒤를 따라 다녀야 할 이름 없는 영웅들이었다.
 

‘문화공간 온’ 이라는 주막집
 
황선주 선생과 나는 교류를 한지 어언 30년이 가깝지만 서로 나이를 물어 본 적도 없고 관심조차 없었다. 여러 가지로 보아 어쨌든 나 보다는 위겠거니 하며 그 정도로 지냈는데, 지난달 그러니까 2016년 9월에 선생이 전화를 걸어 왔다. 서울 종로 2가에 주주들이 만든 ‘문화공간 온’ 이라는 주막집이 있는데, ‘한잔 하자’는 귀가 솔깃해지는 요청이었다.

우리들 촌사람이 서울 종로 바닥 네온사인이 360도 번쩍거리는 곳에서 만나서 한잔 하다니... 전철을 내려 간판을 찾는데, 마음이 급하니 바로 코앞에 있는 간판을 못 보고 한참을 헤맸다. 아직도 친구와 술이라면 두뇌가 정신을 못 차리니, 이 병은 또 무슨 놈의 정신병인고.
 

▲ 한겨레 주주들이 주도해 만든 '문화공간 온'


뜻밖에 백발의 노인 깡패 채현국 선생이 그 자리에 계셨다. 두 분이 인생 고참답게 통성명을 하시면서 나이를 견주는데, 두 양반이 동갑이란다. 그러더니 채현국 선생은 한술 더 떠서 자신은 생일이 2월이니 아마 형뻘이 될 거라고 초면에 시비를 걸어오는데 황 선생은 11월에 나왔다고 고분고분 자백은 하면서도 형뻘이라는 소리는 과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두 어른이 동갑이면 팔순 하고도 2년이 더 지났으니, 나보다는 15년이나 위라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지금껏 동무며 친구처럼 지내왔으니 이것은 또 무슨 쌍방의 정신질환인가. 나는 할 수 없이 잠깐 꼬리를  내리면서 "어메 형님 마이도 잡수셨네. 나도 모르게 언제 그리 잡수셨소."
이것으로 우리의 나이 이야기는 끝났고 재탕이 없었다. 이미 우리는 친구이자 동지처럼 돼 버렸다는 것을 느꼈을 뿐.
 

▲ 위 왼쪽이 박성득 선배, 오른쪽 황선주 원장, 아래 왼쪽 이병 주주센터장, 오른쪽 서기철 경영기획부장이 지난 8월 25일 저녁 '문화공간 온'에서 한잔 하고 있다.


황 선생은 나와 의논하고 싶은 사안이 있었다. 우리는 단둘이 맥주 집에 마주 앉았다.
“20년 넘게 묵혀 놓은 군산 병원 말이야. 그 동안 한겨레 주주센터에서 군산시와 여러 가지로 교섭을 많이 했어. 주주센터 실무자들이 고생 많이 하고 있고 대강 결말이 나는 중인데 군산시가 9억 원인가 예산을 들여서 재건축을 하고 가출 청소년들 돌보는 사업에 쓰겠다는 거야. 방황하는 아이들 돌보겠다는 것이니 얼마나 좋은 생각인가. 한겨레가 군산시에 20년 무상임대를 해 주는 조건으로...

그런데 한겨레 내부에서 여러 의견들이 있어서 주주센터 실무자들이 골머리 아픈가봐. 그놈의 군산병원인가 하는 게 한겨레에는 아무 소득이 없고 오히려 재산세니 뭐니 해서 자잘한 비용만 들어가니 차라리 원래의 소유주인 나에게 돌려주어 버리는 게 낫다는 의견도 있고 반론도 많은가 봐. 돈 될 소지가 없는 것 뭐 하러 끌어안고 있을 거냐는 거지. 이제 와서 돌려준다면 어찌해야 하나? 팔아 치우거나 다른 일로 쓸 수는 있겠지. 이제나 저제나 ‘저 건물이 뭔가 좋은 일을 찾아 가려니’ 마음속으로 기대하면서 20년을 기다려 왔는데 말야."
밤이 깊었고 맥주 집은 시끌벅적 했지만 우리 마음은 썰렁했다.

"성득아! 나 이제 많이 늙었는가 봐. 왠지 마음이 약해지고 자신감도 흐려져."
"내가 죽으면 자식들에게 제일 먼저 너부터 부르라고 했으니, 번거롭지 않게 저 세상 훌훌 갈수 있게 알아서 뒷처리 해주어. 그리고 내 자식들이 잘못할 때는 엄하게 나무라기도 하고. 내 고향 거금도에 같이 가자. 넓은 산이 있으니 이래저래 엮어서 집 짓자. 커다랗게 지어서 한겨레 주주독자들 누구나 와서 쉴 수 있고 살 수도 있게 마을을 하나 만들자. 살다가 돌아가시면 숲이 무성하니 초목장으로 서로 묻어 주면 안 되겠나. 너는 흙집도 지어 봤고 구들방도 잘 만든다면서 ..."


마지막 전투
 
지난 10년간 나는 한겨레를 깡그리 잊고 살았다. 그런데 지난 9월 ‘문화공간 온’ 주막에서 황선주 선생과의 만남을 계기로 나의 골통은 또다시 한겨레라는 조그마하고 복잡다단한 행성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결말이 난 것으로 잊어왔던 지난 일에서 불씨가 되살아나서 새로운 한판의 사건을 향해  바람이 불어 가는 것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를 ‘헹님’이라 부르는 대머리 독자와 황선주 주주의 희미하게 뛰는 심장이 또다시 서로를 향해 공명의 북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새벽녘에 꿈을 꾸었다. 비몽사몽이었다. 나즈막한 산기슭이었고 해가 떠오르기 직전이었다. 수 천명의 기마병들이 서둘러 뛰면서 대열을 짓고 있었다. 검붉은 갑옷이 어스름한 새벽빛에 은은히 반짝이고 있었다. 말굽과 창들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구령에 맞추어 횡대로 길게 대열을 이어 나갔다. 이제 곧 진격이 시작될 것이다. 가슴은 성스러운 기운으로 가득 찼고 고요했다. 전투의 대열에 함께 서게 된 것에 대한 감사와 영광, 그리고 죽음을 향한 불타는 각오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마침내 긴 대열이 일제히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순간 나는 잠을 깼다.
 "그래, 마지막 한판만 하자. 나무를 찍건, 흙벽돌을 찍건 거금도에 모여서 살다가 죽어 보자. 나야 어차피 염라대왕에게 갈 것을... 곱게 죽는다고 지가 봐 주것나?"     
          
지진의 시대...설계 없는 건축물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김없이 온다, 땅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표면은 이미 진동한다. 지금의 시대는 힘이 부풀어 오르고 있는 지진지대에 닿아 있다.
 
 1. 한국경제, 남한의 살림살이는 그동안 남의 기술을 베껴 쓰면서 앞날이 무서운 줄 모르고 눈 감고 살아왔다. 당연한 인과의 작용으로 이제는 내려앉을 순서가 됐다.
 2. 종이 신문에 너무 세게 짖어대지는 말아 달라는 보험성 광고를 던져 줄 수 있는 대기업의 숫자는 이제 몇 가닥 남지 않았다.
 3. 손바닥에 올라앉은 핸드폰이라 불리는 컴퓨터로 옮겨간 정보의 유통은 훨씬 더 빨리, 그리고 더 멀리, 그리고 광범하게 일감을 몰아서 신문시장의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다.
 
<한겨레>는 화력을 키우지 못한 전함이 되어 점차 뒷골목으로 밀려나고 있다. 한겨레 정신이라는 무형의 보배는 머지않아 빛을 잃을 것이다. ‘돈과 권력으로 부터 독립된 언론’ 창간 당시 광범한 대중의 뜨거운 염원이 집약된 한 구절이다. 그런데 지금, 그리고 앞으로 한겨레에서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시대가 바뀌었으니 이 간판은 떼어 내리고 새로이 ‘쌈빡’하게 만들어 봅시다?"
 
세상에서 구하기 힘든 지극히 맑은 물이 항아리에 가득 담겨있다. 그 물을 마시고 사는 사람들은 감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개똥 한 덩어리가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워낙 맑은 물이었으니까 무시하고 마시겠는가? 아니면 그다지 순수하지도 않고, 약간 흐릿하지만 그래도 무난하다고 알려진 2급수를 선택하겠는가?
 
이런 일이 한겨레에서 벌어진다면 하나 뿐인 중심 기둥이 내려앉은 건물처럼 수습이 불가능하다. 구조를 재설계하지 않으면 밤중에 뒤흔드는 한 번의 지진으로 한겨레는 사라질 수 있다. 더구나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면 재건을 향한 노력 자체가 걸레로 얼굴을 닦아 주는 것처럼 세상을 불편하게 할 뿐이다.

            
아이쿱 생협의 구조
 
아이쿱 생협이라는 식품 제조·유통 조직이 있다. 2015년 매출액이 약 6천억 원이다. 조합원이 22만명인데, 이들이 아이쿱의 전 재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합원은 매달 1만원의 회비를 낸다. 본부가 새제품을 출시하고자 할 때는 조합원을 대상으로 시제품을 뿌려 반응조사를 먼저 한다. 그러다 보니 제품별 예상 매출액까지 거의 정확하게 맞출 수 있다.
 
조합원들은 집행부의 도덕성만은 철저히 믿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과 가족들이 먹는 음식에 일체의 장난이나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다는 믿음, 이것이 조직력의 원천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마다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아이쿱의 간부는 수년 내로 1조원 매출 시대로 접어 들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나같은 보통 사람은 백만원, 천만원까지는 실감이 오지만 억 단위를 넘어서기 시작하면 까마득히 먼 무대 위의 여자 얼굴처럼 보고 들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이럴 때는 비교해 보는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된다, 대기업으로서 식품사업을 가장 열심히 하는 회사가 CJ인데 한해 매출이 3조원 정도다. 그러고 보면 아이쿱 생협의 성과는 의미가 깊지 않을 수 없다.
 
도시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조합원의 활동이 활발한 곳에는 그 지역 조합원의 출자를 기반으로 해서 커뮤니티 센터를 세운다. 이곳에는 물론 매장이 있고 지역 모임과 활동을 위한 공간이 마련된다.
 
여기에서 하나 짚고 넘어 가자.
아이쿱의 조합원이라고 해서 몽땅 고분고분하고 이해심 넓은 사람들만 모였겠는가. 일반 대기업 유통회사의 식품을 선택하지 않고 까다롭게 가려 먹겠다는 사람들이니 보통사람들 보다 훨씬 까칠할 확률이 높다. 아이쿱의 집행부가 조직건설을 위해 얼마나 깊은 노력을 기울였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신념과 믿음으로 건설된 조직이므로 감히 불패의 성을 쌓았다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많은 사람들이 야바위판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면 그러할수록 이러한 신념과 신뢰의 가치는 더욱 원초적인 힘을 발휘한다.                        

대조직을 건설하자

   현재 재직 중인 사람들   
   퇴직한 사람들 
   주주 독자
   각계각층의 동맹자들

                                                           
 1.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수십 만 명의 네트워크는 그 자체로서 강력한 밑천이 된다. 이들이 각자의 재능과 소질, 경험과 구체적인 희망사항까지 분류하고 연결할 수 있다면 성공사례들이 생기지 않을까?

 2. 소설을 쓰는 작가 중에 때로는 공동작업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 주필자는 있되 수 백 명이 함께 쓰는 기사는 없겠는가?

 3. 각각의 자발적인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스스로 활동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자본을 마련하는 사례를 ‘문화공간 온’이 실행으로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성공과 실패 사례가 모두  한겨레 대조직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4, 늙은 말 일수록 낯선 들판에 풀어 놓아도 굶어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 현재의 한겨레신문사더러 투자금을 달라거나 밥을 먹여달라는 선배나 주주, 독자는 상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5, 한겨레는 태초부터 모험심이 강했다. 요즈음은 지나치게 고만고만하게 보인다. 마음이 자잘해지면 사업도 자잘해진다. 고스톱을 쳐도 뛰는 말을 잡는다는데 세상은 번개처럼 변해 가고 있고 내일은 어쩌려고 저러는걸까? 주눅이 들어 보인다면 지나친 말일까. 돈을 걱정하기 보다는 조직의 기세를 걱정해야 한다. 자원은 곳곳에 묻혀 있다.

산이 요란하게 들썩거리는듯하더니 쥐 한마리가 튀어 나온다는 살벌한 중국 속담이 있다. 나의 이 글이 그러하다. 한 가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한겨레를 거쳐 간 사람이거나, 주주이거나, 독자이거나, 외부의 응원자 들이거나 모두가 귀한 식구들이라는 점이다.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 얽히고설키게 조직해서, 한겨레 대조직의 사례들을 만들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진촬영, 편집: 이동구 에디터

박성득  hanion@hani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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