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에서 '백부자'를 만나다

 

백부자를 식물원에서 보았지만

꽃동무 단톡방에 남한산성 백부자 번개를 하자는 메시지가 떴다. 눈이 번쩍하고, 귀가 솔깃한데 하필 그날따라 치과 예약이 잡혀 있을 게 뭐람! 백부자가 귀한 약재로 쓰인다는 것, 그래서 약초꾼들이 남채하는 바람에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때까지 자생지에서 개화한 실물을 보지 못했다. 내가 백부자를 처음 본 것은 평창 오대산 입구에 있는 한국자생식물원에서다. 흔히 보는 투구꽃이나 진교와는 꽃 색깔이 다르고 모양이 특이해서 그 인상이 오래 남아 있다. 그러나 식물원에 식재되어 있는 식물은 마치 박물관이나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 같다고나 할까? 식물원에서 보는 식물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 식물의 진면목은 아니다. 그러다가 정선, 영월, 단양, 제천 등의 석회암 지대 식물상 조사를 하면서 꽃이 피기 전의 모습이나 꽃이 진 후 열매만 매달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하지만 개화기를 맞추지 못해 아직까지 한 번도 자생지에서 꽃이 핀 백부자를 제대로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 터였다.

▲ 백부자 꽃 피기 전 모습
▲ 백부자 열매

드디어 자생지에서 백부자를 만나다

며칠 후 꽃동무가 단톡방에 올려준 상세한 약도를 보고 혼자서 찾아 나섰다. 의외로 남한산성 유역에는 식물상(植物相)이 참 다양하다. 백부자를 만나러 들어가는 초입에서부터 목적지까지 가는 길 내내 노랑물봉선, 고마리, 산새콩, 선괴불주머니, 장대여뀌, 단풍취, 멸가치, 개옻나무, 도둑놈의갈고리, 자주조희풀, 송장풀, 진득찰, 북분취, 까실쑥부쟁이, 개쑥부쟁이, 등골나물, 으아리, 비수리 등등, 어떤 것은 꽃으로 어떤 것은 열매로 나를 반긴다. 날씨가 화창한데다가 공휴일이라서 그런지 일반 등산객도 많지만 카메라를 메고 꽃을 찍으러 나온 꽃쟁이들이 오늘따라 참 많다. 약도상으로는 백부자가 있는 곳에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길이 양 갈래라 애매하다. 꽃동무에게 전화로 확인한 후 주위를 유심히 살피며 접근해 갔으나 목표지점 백부자가 안 나온다. 다시 지도를 확인한 후 성곽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니 꽃쟁이 두 사람이 뭔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다. 옳거니, 바로 여기로구나! 다가가보니 과연 내 키보다 큰 백부자 3포기가 서 있다. 가느다란 줄기에 비해 키가 너무 크고 너무 많은 꽃을 매달고 있어서일까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있다. 석회암 지대에서 흔히 보는 노란색 꽃이 아니라 자주색이다. 물론 모자 모양의 꽃 안쪽을 들여다보니 노란색 기운이 남아 있지만. 노란색 백부자는 애잔한 여인 같다면 자줏빛이 강한 백부자는 요염한 여인 같다고나 할까. 백부자도 같은 투구꽃속이지만 꽃잎처럼 보이는 위쪽 꽃받침잎이 투구 모양이 아니다. 마치 서양 귀부인들이 파티에 갈 때 멋으로 쓰는 장식 모자 같이 예쁘고 깜찍하다.

▲ 백부자 생태 모습
▲ 백부자 자주색 꽃(남한산성)

백부자 국명과 학명의 유래

‘백부자’라는 국명은 정태현 외 3인의《조선식물향명집(1937)》에 기원한다. 물론 오래 전부터 써온 한약재 중국명 ‘白附子’를 그대로 원용한 것이다. 백부자는 비슷한 약재인 부자(附子)에 비해서 뿌리 색깔이 희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백부자라는 한자명 외에 노랑돌쩌귀라고도 부른다. 투구꽃 종류를 돌쩌귀라고도 하는데 노란색의 돌쩌귀 비슷한 꽃이란 뜻이다. 백부자라는 한약재 한자명보다 이름만으로도 식물종의 특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하므로 오히려 더 호감이 간다. 학명으로는 Aconitum coreanum (H. Lév.) Rapaics라 한다. 속명 ‘Aconitum’은 그 어원이 불분명한데 그리스 또는 라틴 지역 ‘Acone’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투구꽃속을 총칭한다. 종소명 ‘coreanum’은 ‘한국의’라는 뜻으로 백부자가 한국에서 처음 발견되어 기재되었음을 말해 준다. 영명으로는 ‘Korean monk’shood’라고 하는데 꽃의 이미지가 ‘수도승의 모자’와 비슷한 데서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백부자 형태상 특징

백부자는 분류학상 미나리아재빗과의 투구꽃속에 해당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우리나라 중부 이북에 자생하지만 특히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석회암지대에 많다. 세계적으로는 중국 동북부, 몽골, 러시아 극동지방 등에도 분포한다. 햇빛이 잘 드는 산기슭의 관목림 아래 또는 풀밭에서 주로 자란다. 마치 마늘쪽 같이 생긴 2~3개의 덩이뿌리에서 줄기가 나와 대개는 무릎 높이로 자라지만 큰 것은 1m가 넘을 정도로 곧추 자란다. 잎은 어긋나며, 잎자루가 길고, 길이 4.0~6.5cm, 폭 3.5~6.5cm 크기의 둥근 모양이다. 투구꽃 종류와는 달리 잎 밑부분까지 깊게 여러 번 갈라져 마지막 갈래는 끝이 뾰족한 선형이 된다. 꽃은 9~10월경에 피는데 줄기 끝에 총상꽃차례로 여러 송이가 달린다. 꽃 색깔은 노란색이 주종을 이루지만 노란색 바탕에 옅은 자주색에서부터 짙은 자주색까지 다양하다. 꽃대, 꽃자루에는 구부러진 짧고 부드러운 털이 나 있다. 꽃받침잎은 5장인데 여기에도 구부러진 털이 많다. 위쪽 꽃받침잎은 모자 모양, 길이 1.5~2.cm이며, 위쪽 겉에 튀어나온 줄무늬가 부챗살처럼 퍼져 있다. 곁꽃받침잎은 난형이다. 꽃잎은 2장, 위쪽 꽃받침잎 속에 들어 있고, 꿀샘으로 된다. 수술은 많고, 암술은 3개이다. 열매는 골돌이며, 길이 1~2cm이다. 씨는 타원형, 좁은 날개가 달려 있다. 전국에 분포하는 투구꽃은 잎이 보다 넓게 갈라지고 꽃이 보랏빛인데 백부자는 잎이 더욱 가늘게 갈라지고 꽃은 노란색이므로 뚜렷이 구분된다.

▲ 백부자 노란색 꽃(강원도 정선)

백부자 특징을 살려 사진에 담아

분명 이곳은 석회암 지대는 아닐 터인데 백부자가 자생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성곽 바깥쪽은 남쪽을 향한 사면이고 안쪽은 여러 가지 활엽수가 뒤섞여 우거진 수림이다. 바로 성곽 안쪽 약간 경사진 성벽 기단 풀밭에 두세 포기가 튼실하게 나 있다. 하도 키가 크고 꽃이 많이 달려서 비스듬히 기운 것을 누군가 돌멩이로 괴어 가까스로 바로 세워 놓았다. 먼저 온 두 사람이 사진 찍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며 기다린 후에야 내 순서가 되었다. 나는 작품사진 찍는 것이 목적인 아닌 만큼 잎, 줄기, 꽃을 부분부분 나누어 형태상 특징이 잘 드러나게 찍고 또 전체 모습을 담은 생태사진도 찍었다. 그래도 아쉬워 다시 찍고 또 찍어 수십 컷을 담았다. 입소문을 타고 꽃쟁이들이 잇달아 모여든다. 자리를 비켜 주고 꽃동무들이 요 근처에서 만나보았다는 병아리풀을 찾으러 왔던 길을 되짚어 성곽을 따라 위로 올라가는데 앞서 사진 찍던 그 두 사람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백부자 개체를 발견하여 사진을 찍고 있다. 키는 비록 전보다 좀 작지만 여러 송이 꽃이 달려 탐스럽게 피어 있는 모습이 싱싱하고 확실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녀석도 꼿꼿이 서 있으면 좋으련만 아예 벌러덩 누워 있으니 사진을 제대로 찍기가 용이하지 않다. 나뭇가지를 꺾어 고여 놓고 찍으니 역시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들이 다 찍고 난 뒤 나도 몇 컷 담았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백부자

다시 성곽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서 병아리풀을 찾았지만 워낙 작은 풀꽃인지라 잘 보이지 않는다. 꼼꼼히 살피며 다시 내려오다가 성벽 지붕에서 병아리풀을 딱 한 개체 기어이 찾아냈다. 원지과에 속하는 병아리풀 역시 석회암 지대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희귀종이다.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하여 앙증맞게 귀여운 녀석을 정성들여 몇 컷을 찍었다. 내려오는데 아니 이럴 수가! 아까 두 번째로 본 그 탐스런 백부자가 사라진 것이다. 내 눈이 의심스러워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없어진 게 분명하다. 필시 그 두 사람 소행일 것이다. 식물을 오직 사진 찍기 위한 모델로만 생각하고 독점욕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이 찍지 못하도록 잘라 없애 버린 것이리라. 말로만 듣던 일을 내가 오늘 이 현장에서 똑똑히 목격할 줄이야! 허망하여 내려오는데 그 아래 처음 본 백부자에 여러 꽃쟁이들이 몰려 사진을 찍고 있다. 아마도 어느 야생화 동아리에서 나온 모양인데 그곳에 그 몰상식한 작자가 한데 어울려 있다. 내가 정색하고 “아까 그 백부자가 왜 없어졌어요?” 물으니 어색한 표정으로 묵묵부답, 외면해 버린다. 더 이상 채근할 수도 없는 일, 뺨따귀라도 한 대 갈겨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되지요.” 한 마디만 던졌다. 다행히 백부자는 여러해살이풀이이다. 뿌리째 뽑아 없애 버린 것 같지는 않으니 내년에도 그 자리에서 봄이 되면 싹을 틔우고 가을에는 꽃을 피울 것이다. 이리 생각하고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발길을 돌렸다.

▲ 사라져 버린 백부자

인간만이 지구 생태계의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나라 환경부에서는 백부자를 멸종위기 야생생물 II급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또한 국제자연보호연맹(IUCN)에서는 적색목록(Red List)을 만들어 전 세계적으로 절멸의 위기에 놓인 생물과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실시하는 연구와 조사를 지원하고, 각국 정부에 자연보호를 권고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가적색목록 평가결과 백부자를 적색목록 9단계 중 제5단계의 야생에서 절멸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은 단계인 취약(VU, Vulnerabl) 종으로 보고 있다. 말할 것 없이 약초꾼들의 남채로 그 개체수가 급감하고 있는 추세다. 환경부 야생동·식물보호법으로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II급종을 포획, 채취하거나 훼손할 시에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법 조항이 만들어진 이래 멸종위기 식물종을 채취, 훼손한 자에게 법대로 집행한 사례가 과연 몇 건이나 될까? 법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인드이다. 인간만이 지구 생태계의 주인공이 아니다. 인간도 지구 생태계를 구성하는 다른 생명체와 똑같은 일원일 뿐이라는 의식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생태계에 다른 생명체가 절멸한다면 인간도 살아남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태계를 보전하고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 남한산성에서 만난 병아리풀
▲ 남한산성에서 만난 자주조희풀

남한산성 백부자 보전 대책을 강구해야

서울 근교 남한산성에서 멸종위기종 백부자를 만나볼 수 있다는 게 꽃쟁이들에게는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런데 남한산성 백부자가 영영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래 벌봉 쪽 외성의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공사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야 백부자는 한갓 귀찮은 잡풀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1~2년 안에 이곳 백부자 삶의 터전까지 공사는 진척될 것이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백부자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니 그냥 깔아뭉개 버릴 것이 뻔하다. 공사가 더 진척되기 전에 관계기관에 이 사실을 알려 볼 작정이다. 다른 적절한 장소로 옮겨 심는다든지, 이곳에 펜스를 친다든지 별도의 조처를 취하여 보전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 같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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