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에서 사직단까지>

10월, 이 달의 한양 도성 탐방은 숭례문에서 사직단까지이다.

숭례문이 건너다보이는 신한은행 본점 앞 회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더니 어느새 15여명으로 불어났다.

지난달 광희문에서 숭례문까지 답사한 후 연이어 참가하니 연속성이 있어 더욱 친숙함이 느껴진다. 오늘은 어떤 흥미진진 한 이야기가 펼쳐질까 한층 기대감이 커진다.

허창무 해설사는 이번 구간에서는 "최초" 라는 말을 수없이 듣게 될 것이라고 미리 귀띔을 한다.

▲ 남대문공립심상소학교

일제강점기 시대 일제의 태자가 숭례문 안으로 들어오기를 꺼려 측면의 성곽을 허물었다는 이야기와 관악산의 화기가 경복궁에 미치는 것을 막고자 6개의 장치를 마련한 것 중의 하나인 숭례문 앞의 남지가 당쟁이 한창일 때에는 남인의 상징으로 인식되던 때도 있었고, 조선 중기 남인의 집권을 막기 위하여 반대파 세력이 남지를 일부러 메운 일도 있었다 한다. 이 못을 다시 복원하자 실제 남인이 득세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제가 서울역을 세우면서 남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양 도성은 조선왕조의 상징이었고, 도성이 튼튼했을 때에는 태평성대였고 왕업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외침이 잦고 왕권이 흔들리거나 취약했을 때에는 어김없이 도성 또한 무너지거나 파괴되었다.

남대문초등학교 옛터로 1915년 남대문 공립심상소학교가 있던 자리이다.

당시 일본인 거주지가 많았던 남대문 주변의 일본인 거류민들을 위한 학교로 설립되었으며 당시 매국부역. 친일파들의 자녀들도 다녔다고 한다.

▲ 남대문공립심상소학교

곧이어 칠패길에서 만나는 칠패시장터는 종루(종로), 이현(배오개)와 더불어 조선 후기 도성의 3대 시장중 하나이었으며 주로 한강나루를 통하여 들어오는 어물을 많이 취급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칠패란 이름은 이 지역의 도성수비를 맡았던 금위영 소속의 7패부대의 이름을 따서 "칠패시장"이 되었다 한다.

▲ 칠패시장과 한성상업회의소

이곳에는 상공회의소가 최초로 세워진 1884년 한성상업회의소를 필두로 인천, 부산, 목포 등 상공회의소의 전신을 기념하여 각 지역의 돌로 만든 표지석이 늘어서 있다. 한성상업회의소는 구한말 개항 이후 일본 상인들이 조선의 상권을 잠식해나가고 서구열강들과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위기를 느낀 서울지역 객주들이 지역 상권을 보호 할 목적으로 세운 단체이다.

한.불수호조약(1886년)을 체결 한 후 6년이 지나 고종 29년(1892년 ) 우리나라 최초로 약현성당이 세워졌다. 저 멀리 보이는 약현성당의 첨탑을 뒤로하고 길을 돌린다.

조선태조 시대에 축조한 한양도성의 일부를 복원한 구간을 옆에 끼고 도심을 지나간다. 예전에는 가장 높았을 도성 옆에 지금은 몇 배나 높은 빌딩이 내려다본다.

▲ 조선태조 때 한양도성 복원구간

담장을 벗어나면 중앙일보 주차장으로 쓰이는 담장아래 초라하게 소덕문터 안내 표지석이 나온다. 후에 소의문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이곳은 광희문과 더불어 시구문 역할을 하였으며 서소문 네거리에 처형장이 있었고,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던 김개남과 수많은 천주교 순교자들이 이 문을 통하여 처형장으로 나갔고 효수되었다. 외국인들은 서소문을 "순교자의 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는 이승훈, 정약종, 황사영, 남종삼 등이 순교하였다. 지금의 서소문 네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히 서있다.

▲ 소덕문터

길을 건너 수렛골 표지석이 보인다. 서소문동의 서북쪽 전 배재고교 자리와 이화여고 부지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수렛골 또는 차동이라고 불렀다. 이는 이 마을에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들이 많이 모여든데서 연유한 것이다. 수렛골은 영조가 인현왕후 탄생지인 이 지역에 추모비를 세워 추모동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 수렛골

골목을 빠져나오자 배재학당 한편에 독립신문사터가 보인다. 여기에서 독립협회가 태동하였고 독립신문이 발간되었다.

고종 33년(1896년) 우리나라 첫 신문사를 세운 자리로 표지석으로만 만날 수 있다.

▲ 독립신문사터

배재학당 : 우리나라 신식교육의 효시인 배재학당은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서양문물이 합법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미국의 북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1858-1902)가 세웠다. 학교이름은 "인재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고종황제가 직접 지어준 것이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 두 번째로 지은 동관이다. 하단에는 1916이라는 숫자가 선명하다. 배재학당의 출신으로는 서재필, 이승만, 지청천 등 인재들이 즐비하다.

▲ 배제학당역사박물관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입구에 쓰여 있는 글귀로써 아펜젤러의 말이다.

▲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아펜젤러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 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가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충돌사고가 나자 동행한 한국인을 구하려다 함께 익사 하였다.

▲ 해설사가 너무 빨라

정동제일교회 :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가 1887년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이다. 이곳에서는 1918년 국내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 운영된 곳이기도 하다. 이 교회의 음악활동을 통해 김인식, 이흥렬 등의 걸출한 음악가들이 탄생했다. 파이프오르간은 6.25 때 모두 파괴되었다가 최근 새롭게 복원 하여 실제 연주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교회에서만 민족대표 33인 중 2명을 배출 하였고 일제강점기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문화 활동과 야간학교개설 등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특히 3.1운동 때에는 파이프 오르간에 바람을 불어 넣어주는 방에서 인쇄물을 제작하여 공급하는 비밀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옛날 교회의 가운데 칸막이를 하여 교회 안에서도 남, 여 학생들이 서로 마주치거나 마주 않지 못하였다고 한다. 배재학당 남학생들은 좌측으로 들어와 좌측으로 나가고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은 우측으로 들어와 우측으로 나가갔다고 한다.

▲ 정동제일교회

신아신문사 담쟁이가 멋지다.

▲ 신아신문사

배재공원에 들어서면 배재학당 약사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앞의 옛 배재학당 운동장에 러시아대사관이 들어서 있고 도성을 끊어 놓았다. 원래 러시아 공사관은 1884년 조러통상조약이 체결 된 이듬해 1885년 경희궁의 동쪽 맞은편 언덕에 준공되었다. 그 곳은 도성 안에서 "봄을 머금은 동산" 이라는 의미의 함춘원(含春苑) 세 곳 중의 한 곳으로 전망 좋고 가장 아름다운 언덕이었다. 당시 일제세력의 견제를 위해 러시아에 기대고 있던 힘없는 조선정부를 압박하여 가장 좋은 장소를 차지한 것이다. 그러나 6.25 당시 모두 파괴 되었고 현재는 탑만 남아있다. 소련붕괴 후 한러 외교관계가 재개되면서 공사관의 재산권 문제가 대두 되었고 1990년 노태우정부 때 99년 간 무상 임대 형태로 현재의 배재학당 운동장에 새로 짓게 된 것이다.

▲ 배재공원

중명전 : 중명전과 예원학교 일대는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였다가 1897년에 경운궁(현재 덕수궁)을 확장할 때에 궁궐로 편입되었다. 경운궁 본궁과 이 일대 사이에 이미 미국 공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별궁처럼 사용되었다. 중명전은 왕실 도서관으로 지은 2층 벽돌 건물이며 정관헌과 독립문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설계하였다. 중명전 외에도 환벽정을 비롯한 10여 채의 전각들이 있었으나 1920년대에 이 일대가 덕수궁에서 제외되면서 다른 건물들은 없어졌다.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당한 비운의 현장인 동시에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특사를 파견한 곳이기도 하다. 최근 옛 원형사진이 발견되어 새롭게 복원 및 단장이 준비 중이다.

▲ 중명전

보구여관터 : 보구여관은 1887년 미국 북감리회에서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전용 병원으로 여성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하였다. 1912년 흥인지문 옆의 볼드윈 진료소와 합쳐 해리스 기념병원이 되었다.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전신이다.

▲ 보구여관터

이화학당 : 이화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여자학교였다.

한말 러시아출신의 손탁(Miss Sontag)이 호텔을 설립하여 내. 외국인의 사교장으로 쓰였던 손탁호텔 표지석을 지나 이화여고 교정으로 들어서면 이화박물관이 보이고 조금 돌아서면 심슨기념관이 눈에 들어온다. 1915년에 준공된 이 건물 이름에 건축기금을 기부했던 심슨(Sarah J. Simpson)이 붙어있고 이화학당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옛 건물이다. 아펜젤러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여자선교사 메어리 스크랜턴(Mary F.B. Scranton) 은 1886년 이화학당을 세웠다. 1887년 명성황후는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내렸다고 한다. 심슨기념관 바로 옆 유관순 열사의 동상이 있고 박물관 내부에는 여러 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유관순 열사의 전시실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주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 원수를 물리쳐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당시 열사의 나이 18세였다. 하늘을 날아오를 듯 한 유관순 열사의 동상 앞에서 한없이 숙연해진다.

▲ 이화학당 심슨기념관 그리고 유관순열사
▲ 불타는 학구열

근대유산 1번지 정동

정동회화나무 : 정동 캐나다 대사관 앞에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수령 500년이 넘는 높이 17M , 지름 5m 이상의 거목으로 1976년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2003년 캐나다 대사관 건립 당시 나무의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뿌리의 위치를 감안해 건축디자인을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 캐나다 대사관의 노력으로 정동 회화나무는 다시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다.

▲ 정동회화나무

관립법어학교터 : 개화기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학교가 있던 곳

경교장 : 대한민국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공간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역사의 현장이다. 경교장은 본래 일제강점기 친일파이자 광산부자인 최창학에 의해 1938년 건립되었고 죽첨장으로 불리었다. 이후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환국하자 임시정부의 활동공간 및 김구주석과 임정요인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1949년 김구선생이 서거 후에 중화민국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중 미군 특수부대 및 임시의료진이 주둔하였고, 1956년~1967까지 월남대사관으로 사용되다가 1967년부터 병원 시설로 사용되었다.

아직도 흰 저고리에 선혈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가슴 아프게 한다.

"일본의 항복이 1주일만 늦었어도 참전승전국 지위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을" 하며 김구선생이 땅을 치고 애통해 하였다는 이야기는 저 흰 저고리를 불게 물들인 선혈만큼이나 강렬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탁통치 반대 그리고 남과 북이 하나 되는 통일정부 수립을 꿈궈왔던 선생의 노력은 주한미군 방첩대 요원인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하면서 물거품이 되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그대로 계승되었다.

대한민국정부는 제헌헌법 전문을 통해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는 사실을 밝혀 놓았고 국호(대한민국), 연호(대한민국), 국기(태극기), 애국가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 경교장

 

▲ 전사들처럼

홍난파 옛 집과 배설(Ernest Bethel) 집터 : 송월길 언덕을 살짝 올라서면 홍난파 집터가 정면에 들어온다. 앞서 안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일행에 물어보니 원래 당일은 휴관이었으나 특별 문의하면 들어가서 관람할 수는 있다고 알려준다. 그러나 내부가 좁고 안내책자 외에 특별한 것은 없다고도 귀띔해 준다. 계단을 타고 약간 올라서면 집 뒤에 홍난파 공원이 을씨년스럽게 텃밭처럼 거의 방치되어 있다. 그의 집터 그리고 봉선화, 고향의 봄 등 노래가사와 악보 판넬이 그나마 홍난파를 기억해준다.  천재음악가였던 그는 친일의 길을 걸으면서 그 명성에 크나큰 오점을 남겼고 퇴색되었다.

▲ 홍난파 옛 집

이에 비하면 어니스트 베델집터는 푸대접 그 자체이다. 홍난파 옛 집과 불과 30m 떨어진 곳에 베델(한국명.배설)의 집터가 있었다. 그는 영국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 신문의 특파원으로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하여 1904년 조선에 왔다. 그러나 그는 본국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사표를 낸 후 핍박받는 약자, 조선의 편에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해 7월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하여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신문은 철저하게 조선의 입장에서 소식을 전하였고 일제 통감부 입장에서는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당시 영국은 일제와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상태로 이런 약자의 편에 서서 용기 있게 세상에 바른 소식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의 철저한 회유와 협박 그리고 간첩누명으로 금고형이 처해지기를 여러 차례 , 그 후 감옥살이 후유증으로 1909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는 죽기 전 " 나는 죽으나 대한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시오" 라고 양기탁을 손잡고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이토록 죽을 때까지 한국을 사랑했던 영국인 베델의 바람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한신보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까지 발행되다가 문을 닫게 된다.

친일부역자들은 아직까지도 옛 친일행적을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 후손들과 유산이 잘 남겨져 보호되고 있는 반면 목숨을 걸고 투쟁하였던 파란 눈의 이방인은 그 흔적조차 남겨져 있지 않다. 이런 은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할 수조차 없는 망각의 역사 앞에 부끄러움에 낯 뜨거워진다.

하루빨리 제대로 된 안내표지와 그 당시의 업적 그리고 가능하면 작은 유적이라도 복원하여 주어야 후세에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이는 아주 최소한의 양심과 염치이자 예의라고 생각한다.

▲ 배설(Ernest Bethel) 집터

행촌동(권율도원수 집터와 DILKUSHA 1923) :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거둔 권율장군의 집터 앞에는 50년이 넘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몰락한 양반가의 이항복을 사위로 두었는데 그의 집에서 뻗어 나온 감나무가 도원수의 집 마당으로 담 너머 온 것을 하인들이 모두 따먹어버리자 어린 이항복이 권율을 찾아가 대뜸 창호지를 뚫고 주먹을 찔러 넣으며 "이 손이 뉘 손이요?" 하자 "네 손이지 뉘 손이냐?" 하자 그러면 저 담 너머 들어 온 감은 뉘 집 감이요 ? 하자 권율이 "내 알았네" 하였다는 이야기는 다시 들어도 재미있고 재치 있다는 생각이 든다.

▲ 행촌동 권율도원수 집터와 은행나무

바로 앞마당 건너편 낡은 빌라인 듯, 오래 된 양옥집이 얼기설기 뻗어 있는 가스배관과 함께 어수선하게 눈에 들어온다. 건물 아래 한편에 커다란 돌에 "DILKUSHA 1923"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고 이것이 서양식 집임을 알게 할 뿐이다. DILKUSHA 는 힌디어로 기쁨, 환희 , 매혹이라는 뜻으로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er)가 1923년 건축하고 별칭으로 붙인 것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국제통신사의 특파원으로도 활동한 광산업자로서 3.1운동 때에 일본경찰의 수색을 피해 독립선언문을 국제 통신사에 전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에 일조하였다. 첩보를 듣고 수색을 하러 온 일본경찰에 발각되기 직전에 테일러의 어린애들의 침대보 밑에 숨겨 그 위기를 피했다고 한다. 찰라, 순간의 기지로 독립선언서가 국제사회에 알려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 주어야 할 또 한명의 외국인이 바로 앨버트 테일러이다.

그는 일제에 의해 핍박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추방되어 1948년 미국에서 73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그의 생전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 Tayler와 DILKUSHA

사직단 : 언덕을 넘어 내려오면 단군성전을 지나 오늘 탐방코스의 종착지인 사직단에 다다른다. 사직단은 조선시대 토지의 신인 사(사)와 곡식의 신인 직(직)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전통사회에서 사직은 종묘와 함께 국가의 근본을 상징했으며, 태조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1395년 경복궁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사직단에는 동쪽에 사단, 서쪽에 직단을 배치했는데, 두 단의 모양과 크기는 한 변이 7.65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약 1m 이다. 단 주위에는 유라는 낮은 담을 두르고 다시 사방에 4개의 신문을 설치한 담을 둘러 이중으로 담을 설치하였고, 그 외부에 제사 준비를 위한 부속 시설을 두었다.

하지만 1910년 전후 일제에 의해 제사가 폐지된 이후 부속 건물들이 철거되었고 두 단만 남긴 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963년 사적 121호로 지정되면서 1980년대에 담장과 부속 시설 일부를 복원했으며 , 1988년부터는 전주 이씨 대동 종악원에서 사직 대제를 매년 거행하고 있다.

▲ 사직단

이 번 탐방코스를 마치며 해설사가 미리 예고한 대로 유난히 최초, 최고가 많았던 코스이다. 모르고 그냥 지나다닐 때와 역사를 알고 볼 때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다. 특히,서소문 4거리를 지날 때, 그 수많은 동학군들과 천주교 신앙인들 그리고 독립군들이 이 자리에서 피를 뿌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음에도 그들의 죽음을 기억해주는 제대로 된 자료와 설명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점이었다.

또한 우리는 나라가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아무런 조건 없이, 단순 측은지심을 넘어 옳지 않음에 같이 저항하는 외국인들이 이토록 많았음에 놀랐다.

사실을 올바로 기억해주는 것이 최소한의 보답이자 이들의 뜻을 올바로 이어받는 것이 아닐까? 

▲ 문화공간 온에서 뒤풀이

알면 알수록 감사하고, 미안하고, 억울하고 분개심이 커지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김진표 주주통신원  jpkim.international@gmail.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