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나는 이제라도 봉오동전투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역사를 공부하고 자료를 찾고 있다. 한중일의 사료를 뒤지며 봉오동전투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보고, 독립운동가 최운산장군의 곁에서 독립군들의 식사준비와 군복제작 등 몇 천 명에 이르는 독립군 부대의 살림을 실질적으로 책임졌던 할머니의 증언을 기억해 내고, 아버지의 말씀과 아버지가 남기신 기록을 확인하고, 아직 살아계신 막내고모와 막내삼촌 만나 그분들의 이야기를 다시 듣고 있다.

지난 1년여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되돌아보며 할아버지의 마음이 되었고 할아버지의 삶에 점점 매료되었다. 할아버지가 부르시는 것 같아 작년 가을 봉오동 여행을 준비했다. 처음엔 봉오동에 가겠다는 것 외에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단지 할아버지가 보내주시는 사람을 만나고,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듣겠다는 생각으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연변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낸 일주일, 할아버지 최운산장군을 좀 더 깊이 만날 수 있었다.

 

 

▲ 허영길 연변박물관 근현대사 주임과 함께 작은오빠와 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이후 밀산으로 이어지는 독립군의 행로를 더듬어 보고 싶었으나 일주일은 너무 짧았다. 연길, 도문, 왕청의 당안관(호적 등 공공기록물 보관소)에서 찾아보고 싶은 서류도 많았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다. 연길에 머무르며 봉오동에 몇 번 다녀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연변에 간다는 말을 들은 지인들이 연변의 역사학자, 언론인, 문화계 인사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분들을 만나 봉오동전투의 역사를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도 미처 알지 못했던 봉오동전투의 진실을 만나 놀라고 기뻐했다.

▲ 리광평 전 용정문화원장은 연변의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최운산 장군은 둘러보는 데만 사흘이 부족했다는 넓은 지역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성냥공장, 비누공장, 제면공장, 콩기름공장, 제병공장, 제주(술)공장을 비롯한 다양한 생필품 기업을 운영한 기업가였으며 대규모의 축산업과 곡물상을 운영하는 대 러시아 무역업자였다. 지금의 삼성과 같은 대재벌에 비교할 수 있는 간도 제일의 거부 최운산 장군의 재산은 수천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무장독립군 부대를 40년 동안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군자금으로 모두 소진되었다. 직계 후손의 생생한 증언을 학자적 의심과 합리적 이해의 과정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연변의 역사를 돌아보게 된 그들은 봉오동전투의 가치를 재발견했다.

연변대학교 역사학과의 김태국 교수는 봉오동전투는 단지 전투에서의 승리만으로 단순하게 정리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봉오동전투 이전의 준비상황과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이후 밀산과 연해주로의 이동, 그 이후 북만주지역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의 양태와 그 자금력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했는데 그동안 그 부분을 이해할 수 없어 답답했다고, 이제야 그 단초를 찾았다고 했다. 최운산 장군의 자금력에 대한 설명이 구체화되니 비로소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가능했던 이유, 대규모 독립군이 함께 모일 수 있었던 물적 근거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 연변대학교 역사학과 김태국 교수와 함께 
 

김태국 교수는 그동안 만주 무장투쟁의 현장을 찾아가는 한국의 답사팀을 안내하면서 구멍이 숭숭 난 그물 위를 걷는 것 같았다고 했다. 구체적이지 못한 답사 안내가 내심 힘이 들었다고 토로하면서 봉오동전투와 만주지역 독립운동사에서 비어 있던 부분이 이제야 채워질 수 있겠다고 했다. 후손들이 의미가 있는 단초를 제공해주어 고맙다고 하면서 우리를 만나 만주의 무장독립운동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졌다고 했다. 앞으로 최씨 삼형제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한국독립운동사, 한중문화교류사, 북간도지역 이주한인사회사 모두를 새롭게 재조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 땅에서 중국인의 신뢰를 얻고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낼 수 있는 활동이 아니며, 최운산 장군의 행적은 중국인의 문화 안으로 들어가 그들과 혈맹의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활동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한 신뢰를 얻기까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상상해보라고, 그건 정말 감동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혈맹의 관계가 주효한 바탕이 되어 최운산장군이 비적으로부터 조선사람들을 보호하고자 자위대를 창설하기 위해 중국군대를 사직할 때 한 개인이, 그것도 조선인이 대규모 병사를 사병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모든 것이 인간관계에서 시작하는 중국문화에서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인품과 지략이 빛을 발한 것이 바로 독립운동의 근거였을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경제활동을 하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이나 봉오동전투 이전이나 이후의 긴 독립운동 기간 내내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중국군의 보호 아래 일본에 저항하는 활동을 했던 저력은 바로 할아버지 최운산의 사람됨에 있었다는 것이다.

김태국 교수는 연변에 사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을 정리해주었다. 평소 중국인들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철학적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분석이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밑바탕에 사람됨이, 조화로운 인간관계가, 최운산장군이 온 일생을 통해 실천한 먼저 내어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후손들은 그 일을 제대로 드러내는 일을 해야 한다고, 그 역사적인 일에 본인도 함께 기쁘게 동참하겠다고 했다.

할아버지께서 보내준 사람을 만난 것이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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