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금도에 세워진 충혼탑

지난 10일 완도군 고금면 테마공원에 독립유공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고금항일운동 충혼탑이 건립됐다. 고금 항일운동 충혼탑은 1920년부터 1930년까지 완도 고금에서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용지포 간척지 투쟁 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되살리고, 완도군민의 자긍심 함양과 후손들의 역사의식을 높이고자 건립됐다.

항일운동을 같이했던 소안도와 신지도에는 이미 충혼탑이 세워졌는데 고금 지역은 없었기에 주민들이 모금하고 군 예산을 합해 고금 충혼탑을 세웠다. 조장원 고금 항일운동충혼탑 건립추진위원장은 “나라와 조국수호를 위해 피 흘린 호국영령들의 희생이 우리 후손들에게 길이길이 전해져야 할 것”이라 전했다. 이번 충혼탑 건립 사업은 총사업비 1억5천6백만원 중 유족들과 고금면민, 향우들이 3천만원을 모금해 의미를 더했다.

<고금도의 항일운동 역사 >

완도군 항일운동에는 소안 항일운동과 신지 항일운동 그리고 고금 항일운동 3개의 축으로 형성 되었다. 소안 항일운동은 이미 널리 잘 알려져 있으며, 신지 항일운동은 장석천선생과 임재갑선생이 주축이며, 고금 항일운동은 고금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 시작으로 1911년 개교한 고금보통학교 출신인 정학균, 이현렬, 홍철수, 이수열, 배명순, 김천녕 등으로 1919년 기미독립만세사건 직후 서슬이 시퍼런 일제강점기에 시작 되었다. 이렇듯 완도에서 항일운동이 활발했던 것은 지역내 선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도 있겠지만 북청에서 운동하다 완도 소안도로 도망 온 이들의 교육과 신학문 전파 또한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후 이현렬은 일본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 후 고금농민운동 지도자로 전국학생운동사건으로 퇴학당한 최창규(광주사범학교), 이기홍(광주고보), 황인철(황성제일고보), 박노호(경성제일고보), 김진호(보성고보)에게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사회제도를 바꾸려는 세력이 노동계급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식민지국가에서는 제국주의 착취, 민족 내부의 봉건적 지주의 착취, 사회신분의 차별 등 이중 삼중의 억압을 받고 있는 소작농을 주축으로 한 빈농이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려는 주된 세력이다”라고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각 마을을 순회 하면서 농민운동 최대목표는 지주에게 70% 이상을 경작료로 지불하던 것을 40% 이상은 지불하지 말자는 마을결의 운동으로 농민들을 모아 좌담식으로 농민들의 의식을 깨우쳤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 완도 유학생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으로 완도의 유학생은 광주고보에서는 이기홍, 김향남, 김홍남, 정석규, 광주사범학교에서는 황상남, 박노기, 최창규, 광주농업학교에서는 정남균, 문승수, 유치오, 오문현(해남), 그리고 신지의 장석천등이 활동하였으며 특히 장석천은 이기홍(1912-1996)의 자서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학생독립운동이었다』 제목에서 말하듯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국학생항일운동으로 이끌었다. 이와 같이 완도의 유학생들은 전남과 광주의 유학생들과 전국학생항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선도하였다.

고금면 고금보통학교출신 정남균, 유치오, 이기홍, 박노기와 군외면 교인사립학교출신 황상남, 문승수 등은 광주로 유학중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 이전부터 성진회와 독서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여수 수산학교의 독서회에서 고금면 고금보통학교 오놀보(농상) 김양호(농상), 군외면 교인사립학교 조병호(영풍), 청산면 차용헌(상동) 등 완도출신 학생들이 활약하였다. 이와 같이 광주 여수 각지에서 유학중 학생운동을 전개 하는 것은 1910년 이후 신교육 이 시작된 완도 사립학교 교육의 영향이라 할 것이다.

고금 항일운동의 흐름

고금만세운동으로 시작된 고금항일운동은 일본인 상점퇴출 완도상회사건, 약산사립학교 출판물사건, 광주학생항일운동 성진회사건, 비밀결사 독서회사건, 광주학생독립운동 시위사건과 고금면 김양호, 오놀보, 군외면 영풍리 조병호, 청산면의 차용헌 등이 가담한 여수수산학교 독서회사건등이 있으며, 용지포 간석지투쟁사건, 전남운동협의회사건 그리고 정후균, 정문두, 김경태, 정병래, 정병생, 이영식, 박천세, 곽사길, 최선일 등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전남운동협의회 재건운동이 있다.

용지포간석지 투쟁사건은 “용지포 이권옹호동맹 사건으로 당시 전국으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면 단위의 민족통일전선에 의한 투쟁사건 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지상에 보도가 금지 됐으며 고금면 단위로 전 면민이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본인 지주와 경찰과 맞서 투쟁하여 일부 승리를 거둔 항일 투쟁의 본보기였다. 이현열 선생이 주도한 이 운동은 당시 참가자들이 검거 되었으나 보도가 금지되었고 재판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역사 속에서 망각되어 버렸다”. (저자 이기홍선생의 『내가 사랑한 민족, 나를 외면한 나라에서』)

특히 1934년 전남운동협의회사건의 지도자와 활동가는 완도군 고금면 고금보통학교출신 이기홍, 박노호, 이흥쇄, 김옥도, 정후균, 차태희와 군외면 교인사립학교출신 황동윤, 황상남, 조동선, 문승수,오문현(해남군 북평면 오산리), 김길용, 윤인옥, 김인학, 이창우, 이홍용, 교인사립학교 분교인 해남의 동명학원, 동광학원출신 김홍배, 김아기, 김암우, 문폰동, 박태술, 김용섭, 박종기 등이다.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활동한 고금보통학교출신 정남균(약산면, 농업학교27년졸), 유치오(약산면, 농업학교29년졸), 이기홍(고금면, 고보), 박노기, 최창규(고금면, 사범학교), 교인사립학교출신 황상남(군외면, 사범학교), 문승수(군외면, 농업학교28년졸), 오문현(해남 북평 오산리, 농업학교 2년중퇴) 등은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하고 1년에서 3년간 대구 복심법원에서 구속,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함께 투쟁한 광주고보출신 영암의 최규문, 구례의 왕재일 등과 교인사립학교출신 조동선(군외면, 사립경신학교)과 영암, 강진, 해남, 장흥, 완도의 애국지사들이 조직한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은 3,200명이 가담하고, 이중 558명 구속, 취조 후 57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옥고를 치루신분이 50명인 항일농민운동이다.

이와 같이 일제에 굴하지 않고 사립학교교사로, 농민운동가로, 일제와 지주들에게 해방될 때 까지 항거하고 활동하면서 가정과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고 목숨 바쳐 투쟁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일제와 지주와 싸웠던 것이다. 전남운동협의회사건의 애국지사들 일부는 일제의 말도 안 되는 공산주의로 낙인찍은 판결로 해방된 현재에도 국가의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어 유족들의 가슴은 미어진다.

서울에서 유학 후 일본 앞잡이로서의 구직을 마다하고 귀향하여 사립학교를 설립 운영한 교인사립학교 김영현(서울융희학교 1회, 중앙고보합병 2회), 신지사립학교의 임재갑(중앙고보 4회), 소안사립학교의 송내호(중앙고보 6회) 등은 서울중앙고보 동문으로, 그중 김영현은 1910년 졸업 후 광주교원양성소를 거쳐 1911년 개교한 완도군 고금면 고금보통학교(1911-1919)에서 첫 교사 생활을 시작 9년간 근무하고 1919년 일제가 한인교사를 강제퇴출 시키자 퇴직 후 1920년 완도읍의 완도청년회 개최석상에서 "우리완도는 완도인의 완도이지 타인의 완도가 아니다. 모름지기 완도인이 이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관리의 명령에만 따르지 말고 자진해서 교육·경제의 개량할 것은 개량하여 완도의 발전과 진보를 계획해야 한다”고 연설하고 고금도 김태현 등과 함께 자택 및 고금 김두일의 집에서 완도상회를 설립하고 물화를 저가로 공급하자 일본인 상인들이 문을 닫게 되었으며, 일본인 상인들이 발고하자 혼자서 모든 책임을 지고 장흥법원에서 징역3월 선고에 불복하고,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를 받았다. 대구복심법원 미결수시 일경의 발길질에 갈비뼈 3대가 부러져 대구 재판기간 중 만난 상주 항일투사 조태연의 간곡한 교사 초빙권유가 있어 경북 상주 낙동면의 풍양조씨 제각 양진당에 조명강습소를 설치하고 병간호와 함께 4년간 재직 후 1923년 교인사립학교를 항일투사 오석균이 개교하였다. 그 후 해남 서홍, 이진의 학생들이 많아지자 1927년 해남군 북평면 서홍리에 동명학원, 강기동선생의 후원으로 이진리에 동광학원을 개설하여 동광학원출신 김홍배, 김아기, 김암우, 문폰동등과 동명학원출신 박태술, 김용섭, 박종기등 많은 항일운동가들을 배출 하였다,

2008년 11월 11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는 전남운동협의회사건을 대한민국 항일운동사상 가장 큰 사건으로 확인되었음을 발표하였다. 이 사건은 김홍배(해남), 오문현(해남), 황동윤(군외), 이기홍(고금), 조동선(당시군외), 최창규(고금), 김옥도(약산) 등이 주도한 전남운동협의회사건으로 전남일원에서 3,200명이 가담한 사건이며, 고금면 고금보통학교출신과 군외면 교인사립학교와 분교인 해남군 북평면 동명학원, 동광학원 4개 학교 학생들이 가장 많이 가담한 대단한 사건이다.

1927년-1929년에 완도의 광주 유학생 조직으로 고금보통학교출신 정남균(약산면, 농업학교27년졸), 유치오(약산면, 농업학교29년졸), 최창규(고금면, 사범학교), 박노기(고금면, 사범학교), 이기홍(광주고보) 교인사립학교출신 황상남(군외면, 사범학교), 문승수(군외면, 농업학교28년졸), 오문현(해남북평오산, 농업학교2년중퇴) 등과 정석규(소안), 김홍남, 김향남(청산) 등은 함께 활약하였으며, 특히 광주사범학교 재학생중 교인사립학교출신 황상남(군외면 신학리)은 고금보통학교 출신 박노기, 최창규는 광주사범학교 동문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 독서회와 전남운동협의회에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황상남(군외면, 교인사립학교)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축이었던 독서회의 활동과 광주사범학교 기숙사내에서의 활동 그리고 전남운동협의회사건 등에서 활동한 자로 엄청난 활약을 하였으나 완도군 항일운동사에서는 잘못 오기되어 활약상이 누락되었음이 늦게나마 확인되기도 했다.

편집: 안지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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