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성찰이 일어나는 대한민국

외출을 할 때면 대부분 전철을 타고 시내로 이동하는데 꼭 한겨레신문을 들고 나간다. 신문을 대충 보고는 전철 내 선반에 두고 내린다. 혹 다른 사람이 봐주지 않을까 해서다.

지난 22일 시내에 나갈 일이 있었다. 마침 자리가 있어 앉아 신문을 꺼내서 읽고 있는데 내 오른편에 앉은 학생 비슷한 승객이 계속 내 신문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신문을 뒤척이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보기 시작하면 또 같이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진 않았지만 그냥 알았다. 그래서 조심조심 신문을 펼쳐가며 보았다.

동대문운동장에서 신문을 주고 내리려고 신문을 접었다. 그런데 옆의 승객도 내리려고 일어났다. 보니 학생이었다. 학생 옆에 서서 “이 신문 볼래요? 난 다 봤어요.” 하니 학생은 얼른 손을 내밀며 ”네, 고맙습니다.“ 라고 받았다. 학년을 물으니 중학교 3학년 이라고 했다. ”오~~~ 중 3, 이 나라에서 믿을 사람들은 학생들밖에 없어요. 이제 어른은 믿기 좀...“ 했더니 하하 웃었다.

학생은 지하철 5호선을 타는지 나와 같이 이동했다. 나는 천천히 층계로 내려가는데 학생은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타자마자 신문을 펼쳐들더니 1면부터 보기 시작했다. 뿌듯해서 뒷모습을 찍었다. 5호선 플랫 홈을 걸어가면서도 계속 신문을 봤다.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중고대학생에게 많은 변화가 온 것 같다. 19일 만난 초등학교 1학년생도 이 사태를 다 알고 있으니 학생들 전체가 다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성적조작 및 입시부정이 드러나면서 학생들이 많이 분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 후 세월호 천막에는 젊은이들 보다는 40-50대 엄마들이 유난히 많았다. 자신의 자녀와 비슷한 아이들이 한꺼번에 물속에 수장된 데 대하여 그 나이대 여성이 가장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세월호 천막에서 만난 엄마들은 세월호 참사가 나고서야 사회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길거리로 나왔고 가끔은 미안한 마음으로 세월호 천막을 찾는다. 그들은 세월호 참사로 국가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잔인한 지를 생생히 목격했다. 그런 국가를 보면서 국가가 과연 필요한 존재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다. 그렇게 40-50대 '집단 성찰'이 시작되었다.

쌀값 공약을 지켜달라고... 추가 쌀값 폭락이 우려되는 먹는 쌀 수입을 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하러 집회에 참가했던 백남기 농민은 물대포에 의해 무참한 죽음을 맞았다. 죽일 일이 아님에도 살인경찰은 한 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고 발뺌만 했다. 이 사건으로 그동안 천대받던 농민들은 설움이 폭발했다. 국민을 불행에 빠뜨리는 국가라면, 국민의 먹거리를 내 팽개치는 국가라면 그 국가를 더이상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분노한 트랙터의 집단 행진도 바로 이와 같은 '집단 성찰'에서 비롯된 거라고 본다.

관련기사 : 진격의 트랙터 "지금 박근혜 퍼내러 간다"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71875.html

▲ 전봉군 투쟁단 서군이 23일 오후 54시 충남 아산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사진 출처 : 한겨레 신문)

이제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눈을 뜨게 되었다. 공정성이 사라진 학교와 국정, 말로 담기 추잡한 전방위적 부정이 난무하는 국가를 바라보면서 학생집단에게도 드디어 ‘집단 성찰’이 왔다. 수많은 학생들이 한 목소리로 절규하듯 외치는 '박근혜 퇴진' 함성으로, 수능이 끝나자마자 교복을 입은 채 달려나온 그 절박함으로, 집과 학교와 학원만 알던 학생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도 알아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지 우리도 다 알아요' 하는 것 같았다.

70대 이상 어르신들도 많이 변했다. 80세 엄마는 성당 노인대학과 노인복지관에 다닌다. 세월호 참사가 나기 전 엄마는 완전 왕따였다. 용산참사미사에 간다고, 4대강사업을 반대하는 미사에 간다고, 쌍차해고자를 위한 미사에 간다고 빨갱이, 종북이라는 말도 들었다. 세월호 참사 후 엄마가 노란 뱃지를 달고 다니자 두 할머님이 세월호 뱃지를 얻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했다. 할머님들이 엄마 옆에 와서 미안한 듯 말을 건다고 했다. "요셉피나, 말이 다 옳았네. ", "박근혜 탄핵해야 해" 하면서 말이다. 아직 할아버지들은 티를 안내지만 기가 죽고 말이 쑥 들어간 거 보면 속으로는 변했을 거라고 했다. 이렇게 노인집단에게도 '집단 성찰'이 왔다.

살자고 올라간 사람을 하루도 안돼 불태워 죽인 용산참사가 났을 때 나라가 확 뒤집어 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조용했다. 쌍차해고자가 줄줄이 목숨을 끊을 때도 국민들은 조용했다. 4대강사업으로 뭇생명들이 씨가 마를 정도로 죽어나갈 때도 국민들은 조용했다. 국민들은 이 세가지 사건을 내 일로 인식하지 못했다. 관여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와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쓰러지고 나서야 '아이고, 큰 일 났구나' 생각했다 그 때 부터 눈을 뜨기 시작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국민들은 이제 무너진 나라를 내 일로 느낀다. 국가가 하는 일에 내 일처럼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렇지 않다면 나라는 똥구더미에 내팽겨쳐진다는 것을 안다. 더러워지고 추락한 그 나라는 결국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안다.

나라가 반똥구더미에 팽겨치고 나서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이 왔다. 초등학생부터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대에 걸쳐 국민대통합적 '집단 성찰'이 찾아온 것이다. 이 성찰이 수많은 억울한 죽음 전에 왔다면 더 좋았으련만... 이렇게 국격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왔다면 더 좋았으련만.. 그래도 나라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전에, 완전히 팔아먹기 전에 국민이 깨달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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