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 김선태 주주통신원

10월17일은 유엔이 정한 빈곤철폐의 날입니다. 이날 행사가 열린다는 동대문 DDP를 찾아가기 위하여 3호선 종로 3가역에서 5호선을 갈아타려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데,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는 나의 앞길을 막고선 한 노인은 나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손 간판(피켓)을 가슴에 받쳐 들고 손에 작은 그릇을 든 노인은 어디가 아프신지 창백한 얼굴에 박박 깎은 머리로 오가는 사람들을 살피고 서 있었다. 내가 지켜본 잠시 동안에는 누가 돈 한 푼을 넣어주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행사 시간에 쫓겨, 부지런히 달려서 들어오는 열차에 타고 나서야 후회를 하였지만, 이미 열차는 떠나버렸고, 약속 시간은 다가오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멀리서 얼굴이 나오지 않게 사진을 한 장 찍어서 오늘 기사를 썼으면 좋았을 텐데, 혹시 돌아오는 시간까지 서 있다면 꼭 사진을 찍어 가지고 와야지 하였지만, 무려 3시간을 넘긴 행사시간은 그분에게 너무나 긴 시간이었을 것이고, 아마도 누군가에 의해서 끌려 나가거나 밀려 나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오늘이 <빈곤철폐의 날>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서둘러 도착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에 내려서 1번 출구로 나가니 우리 시니어클럽 몇몇 노인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우선 화장실을 찾아서 약 100여m나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아서 다녀오다가, 고 처장과 연락이 닿아서 함께 만나 잠시 기다려 모두 모인 다음에 행사장으로 갔다. DDP북쪽 광장 <두타>건물의 맞은편에 모인 행사참가자들은 다양한 준비물들을 들거나 달고 행사장으로 모여들었다.

손에 든 피켓, 현수막, 손수레에 실은 박스에 써 붙인 구호, 자동차에 한 가득 써 붙인 빈곤 현실을 알리는 선전물, 그리고 장애인들이 이용하는 전동 휠체어에 깡통을 매달고 빈곤철폐를 외치는 사람들까지 3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였고, 농악대가 앞장을 섰다.

모두 모여서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구호를 몇 차례 외친 다음에 모두 길거리로 시위를 하면서 대학로까지 간 다음에 대학로 광장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다고 계획된 행사이었다.

광장에서 기자회견이 끝나고, 행진을 시작하려 하자 경찰들이 호위를 하면서 폴리스라인을 설치하여 주었다. 맨 앞에 빈곤실태를 알리는 선전문으로 가득 채운 카고 화물트럭이 서고, 뒤이어 농악대가 나서고 다음으로 철거민대책위, 각종 단체들이 뒤를 이어 갔다. 전동휠체어는 덜그럭거리는 깡통을 달고 달리고, 손에 손에 구호가 쓰인 피켓이나 홍보물을 들고 행진을 하고, 이를 따라가면서 홍보물을 나누어주는 학생 봉사대가 함께 하였다.

동대문을 지나 종로5가역 방향으로 가다가 우회전하여 효제 초등학교 앞으로 해서 대학로까지의 거리를 행진하는 빈곤철폐 시위대는 종로5가역 부근에서 합류하여 준 군악대의 고수들과 같은 수북을 치는 악단들이 합세를 하면서 마치 군대행진처럼 힘차게 둥둥거리는 북소리에 맞추어 행진을 하였다.

이화로타리를 거쳐 대학로에 들어서자 경찰들은 재빨리 광장으로 안내를 하여서 행진을 종결지었다. 광장에 모인 시위대는 다시 모여서 결의대회를 하고 각종 단체들의 사례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억울한 신세들임을 보여주었다.
철거민의 애환, 노점상의 철거와 벌금형으로 시달리는 현실 이렇게 각자의 사정을 알리는 행사에 나에게도 사례이야기를 하라고 하는데, 지금 진행 상황으로 보아서 나서서 이야기를 할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첫 번째라면 종로3가역에서 만난 노인의 사례를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였지만, 이미 상황이 주민들이 사정을 이야기하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내가 나서는 것이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야기라면
“오늘은 유엔이 정한 빈곤철폐의 날입니다. 우리나라의 빈곤이 심각한 문제이지만 그 중에서도 노인빈곤률 세계1위 그것도 OECD 평균의 3배가 넘는 상황입니다. 저는 오늘 여기 오는 도중에 종로3가역에서 빈곤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리는 현실을 잘 알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는 손간판을 든 채 구걸을 하는 노인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률 또한 세계 1위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가난한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가난한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기초연금마저 가장 가난한 기초수급자들에게서는 주고 빼앗아가는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노인빈곤 막기 위해 보편적 복지를 시행하라고 외치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였지만, 이미 이야기는 중반전으로 들어가서 각 단체별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시 생뚱맞은 소리를 할 수가 없어서 부득에 사양을 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행사를 주최하는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뒤늦게 총론을 이야기하는 무를 범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유엔이 정한 ‘빈곤철폐의 날’ 행사에 참여하여 분명하게 사례 발표를 하지 못한 것은 미안하고 죄송하였지만, 모임의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어서 이었음을 양해하시리라 믿는다.

김선태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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