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의 섬 소안도(所安島)

 

고려 현종9년(1018)이래 영암현에 속해 있었고 달목도(達木島)라 하였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영암 편에는 주위가 56리 이고, 목장이 있다고 했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는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물가운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조 명종 대(1546~1567)  처음으로 김해 김 씨와 동복 오 씨가 월항리에 입주함으로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소안도는 4개의 유인도와 6개의 무인도로 형성되어있다.

이 섬은 항일운동의 일번지라고 불릴 정도로 널리 알려진 섬이기도 하다.

 

▲ 소안도 지도

1920년 이 지역 출신 송내호를 중심으로 만세시위와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1922년 민족해방결사 조직인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를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후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배달청년회를 조직하고 농민운동, 소년운동, 여성운동, 교육운동 등 다양한 민족운동 전반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나의 작은 섬에서 무려 57명의 애국지사가 나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완도 전역뿐만 아니라 완도와 인접한 해남의 일부까지 교육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소안도에 속해 있는 당사도에는 1909년 처음으로 등대가 세워졌는데 이는 일본인들이 약탈한 곡물을 싣고 가는 배들의 길잡이로 세워진 것인데 남에 나라에 와서 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분개하여 소안 출신 동학군 이준화 외 5명이 1909년 2월 24일 야음을 틈타 등대를 습격하여 일본인 등대수 4명을 사살하고 주요 시설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완도군에서는 이 등대 옆에 1997년 전적비를 세웠다.

 

▲ 당사도 등대

이 섬사람들의 정신을 한마디로 말해주는 것이 있다. 즉 동지가 겨울에 잡혀가면 동지는 추운 바닥에서 지내는데 우리가 이불을 덮고 불을 지핀 방에서 잘 수는 없다고 불도 넣지 않는 방에서 이불도 덮지 않고 잠을 자는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래는 당시에 소안도에서 불리었던 여권신장가의 가사다.

1920년대에 소안의 여자들은 권리를 주장하였다.

여권 신장가

 천하에 어머니는 여자로구나/ 여자의 책임은 중하고 크다/ 책임은 중하나 권세 없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깨쳐라 찾어라 잃었던 권리를/ 완학한 남자의 압박 하에서

생명은 달렸으나 성명이 없고/ 생산은 할지라도 자식이 없다/ 집도 없고 재 산 없는 여자신세는/ 남자의 노리개로 팔려 다닌다/ 깨쳐라 찾아라 잃었던 권리를/ 완학한 남자의 압박 하에서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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