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주주통신원 김유경이 만난 사람들 1-1

 [편집자] 인터뷰어 김유경은 행복한 교사였다. 30년 이상 재직하면서 ‘카리스마’, ‘명강의’, ‘롤모델’, ‘패셔니스타’, 심지어 ‘여신’ 등의 찬사를 덤덤하게 들었으니까. 그러함에도 명퇴한 이유는 단순했다. 타종소리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일상에 충분히 젖고 싶었다. 노년을 앞둔 간절기의 동요가 스스로 각색하고 연출하는 일상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대낮에 집에 머물며 ‘...어떻게 살까’에 골똘했다. 그러다가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탐방을 시작했다.

인터뷰이들은 김유경이 일상의 동선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인터뷰할 명분과 접근의 용이성을 위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거나 지역일꾼을 우선적으로 선정했다. 다행히 다양한 직종과 역할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탁업자, 이발업자, 부동산중개업자, 동네 통장, 화장품매장 매니저, 안경사, 석공(집 공사를 해 준) 등등으로. 걱정과는 달리 모두들 흔쾌히 인터뷰와 사진 찍기를 승낙했고, 적극적으로 응했으며, 두 번째 인터뷰를 진심으로 원하기도 했다.

인터뷰 시간은 보통 100분 이상이어서, 녹음한 음성을 문자로 옮기는 데 무척 긴 시간이 필요했다. 녹음을 푸는 과정에서 인터뷰어의 기억과 인터뷰이의 말이 대단히 다름을 깨달은 것은 소통하는 삶을 위해 큰 수확이었다. 본고에서는 가독성과 고유성을 살리기 위해 인터뷰이가 말한 구어체의 어법이나 어휘를 가급적 훼손하지 않으려 애썼다. 또한 SNS의 빠른 읽기를 고려해 각 인터뷰의 긴 내용을 각각 3회에 걸쳐 연재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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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번째 만난 사람 -

세탁업자 유호석(52년생)․한정순(55년생) 씨 부부
인터뷰 일시 및 장소 : 2013.10.07.(월), 15:20~17:10, 성실 세탁소 -

내가 사는 동네(인천광역시 남구 주안8동)는 주거환경이 비교적 양호한 존치관리구역이다. 30년 넘은 단독주택들과 신축빌라들이 공존한다. 낯선 신입주민의 수가 터줏대감을 넘어서면서 연령층도 많이 낮아졌다. 유아들의 칭얼거림이 담벼락에 축구공을 날리는 저학년 초딩보다 많아졌다. 유 씨 부부는 그런 동네 변화를 지켜본 증인들이다. 두 사람은 내 명퇴를 누구보다 아까워한 이웃이기도 하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부부는 주거니 받거니 극히 자연스레 말을 이어갔다. 평소 싹싹한 태도와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듯, 인터뷰도 즐겁고 진솔하게 해주었다. 그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인터뷰 내용에 지문으로 드러내었다. 어투가 강조체일 경우는 느낌표를 사용하였다. 사진은 연재 내용에 맞게 삽입하였다.

○ 세탁소를 한 지 몇 년 됐는가?
(서로 이렇게 저렇게 따지더니) 28년 되었나? (아내)정확히 28년 맞다.

○ 처음부터 세탁소를 운영했는가?
전에는 양복점을 했는데 기성복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옷이 표준적으로 다양하게 나오다 보니까 맞춤 주문 수요가 줄었다. 장단점을 따지면 맞춤은 천으로 보는 것과 완성된 옷을 보는 것이 다르고, 손님들이 직접 찾아와 고르고 가봉해야 한다. 그런데 기성복은 완성된 색상과 모양을 보고 입어보고 고르니까 맞춤이 점점 사양길로 접어든 거다. 중학교 졸업하고 18살에 배우기 시작하면서, (아내가 가로채며) 결혼 전에는 월급 받고 일하다가 27살에 결혼하면서 내 사업을 시작했다. 양복점도 한 7년 했나. 그 정도 했다고 봐야 될 것 같다.

○ 세탁소를 하게 된 동기는?
옛날에는 먹고 살기 바빴다. 벌어야 먹고사니까. 양복점을 하면서 일은 줄고 애들은 점점 자라고, (아내 재빨리 끼어들어) 쉽게 말하면, 기술은 이것 밖에 없고, 양복점은 사양길이고 세탁업은 그때 막 새롭게 생기기 시작하니까, 기술로 연결이 되니까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다.

○ 세탁소 일은 처음부터 함께했나? 늘 함께하면 불편한 경우도 있을 텐데?
그렇다. 나(아내)는 손님 오면 옷 내주고 받고 하는 거. 불편한건 나는 모르겠더라. (남편이 받으며) 그냥 앞만 보고 오다 보니까 좋다 나쁘다 그런 건 모르고 이렇게 사는 건가 보다 하고 살았다. 그런데 가만히 지금 생각해보니까 굴곡이라거나 뭐 그런 게 없었네?(아내를 보며) 서로가 한 눈 파는 것도 없었고 서로 맞추며 살았다, 우린. 남들은 같이 있다 보면 싸운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까 그러네. (아내가 받아서) 그냥그냥 무난하게, 딱히 돈을 많이 못 벌었다 뿐이지, 살면서 어려운 것도 없었다. 난 이이 때문에 힘든 것 없었고, 이이도 나 땜에 힘든 건 없었을 거 같고, 애들도 무난하게 자랐다. 지극히 무난한 것 같네, 진짜!(고음으로 억양을 올리며 동의를 구하듯 남편을 바라본다) 신랑이나 애들 때문에 속 썩은 것은 없지. 일하다 손님한테 스트레스 받는 거는 있어도… (남편) 손님한테 스트레스야 많이 받지.

○ 손님한테 스트레스 받는 거라면?
우리 집은 손님들이 좀 수준이 있는 손님이다. 진짜! 세탁소는 그런 게 있다. 옷을 바꿀 때 옷이 없으면 옷을 찾으러 와. 우리 집엔 없는데, “여기다 맡겼는데 안 가져갔네.”, 뭐 이런 거. (남편이 받아서) 옷은 지저분하게 입고 와서 깨끗하게 해달라는 거.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옛날에는 정말 그랬다. 그러면 우리도 빼는 게 한계가 있는데, 그런 걸 이해를 못하고 싹 빠지는 줄 알고… (아내, 시비가 적음을 강조하며) 뭐, 그런 건 흔한 건 아니고.

○ 수탁보관증이나 영수증을 주고받지 않는 것이 고객 불만 사항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거의 그렇다. 동네 장사니까, 또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니까 믿고 맡긴다. 우리 같은 경우는 장부가 있으니까, 들어온 날, 나간 날, 옷 가짓수, 색깔 등이 적혀 있으니까 손님들도 그걸 잘 믿던데… 저거 보여드려봐(장부를 집어 들추어 보여준다). 들어온 날짜, 찾아간 날짜도 다 적어야 된다. 그래야 우리도… (아내)예를 들어 봄에 맡긴 걸 가을에 찾으러 왔는데, 우리 집에 안 가져온 걸 가지러 왔다고 하면 곤란하잖아.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적지만, 나도 많이는 나 자신을 믿지를 못하지만, 거의 옷을 맨 날 올렸다 내렸다 올렸다 내렸다 하니까 나는 어디에 어떤 옷이 얼마큼 있구나, 가져가는구나, 안 가져가는구나 거의 난 알지. 우리 아저씬 안 걸으니까 모르지만 난 거의 안다. 아, 이 사람이 가져갈 때가 됐는데 안 가져갔구나 하면, 그 사람이 담에 올 때 가져가라고 하면 가져가는 사람도 있고, 놓을 때 없다고 놔두라는 사람도 있고, 좀 전에 한 얘기는 극히 드물게 1년에 한두 번 있는 얘기. 그러니까 우리 집은 어찌 보면 고급손님들만 오시는 거다. 매너 있고. 거의 손님들이 믿는다. “난, 몰라요, 아주머니가 다 챙겨주시니까 아주머니가 맞을 거예요.”, 이런 사람이 대부분이다. 우리집은 한번 두 번 오시는 분도 있지만, 몇 년에 걸쳐서 이사를 가도 몇 달에 한번이라도 오시는 분이 오시니까.

○ 이 동네에서 몇 년인가? 결혼하면서 여기서 살았나?
아니다. 결혼해서 주안4동, 주안2동에서 살다가 여기 와서 세탁소하려고 왔다. 여기서 28년이다.

○ 그럼 터줏대감이라 해도 되겠다. 동네 변화를 다 알겠다.
그 때는 이 집(지금 세탁소를 운영하는 거주지)도 없었고 저기(앞에 새한병원을 가리키며)도 공터였고, 신라아파트 올라가는 곳도 길이 없었고 돌산을 넘어가야 했다. 우리가 왔을 때 여기 사거리(승하사거리인 듯)가 종점이었다. 안국아파트 올라가는 횡단보도 거기가 27번 종점이었다. 그러니까 도로는 거기가 끝이었다. 광명아파트도 없었고, 주변 집터를 가리키며 여기가 다 논이었다. 바로병원자리는 밭이었다가 카센터, 새한병원도 원래 밭이었다.

○ 내(김유경)가 사는 집은?
그 쪽으로는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그 끝의 빌라는 밭이었다.

○ 그런 동네 변화가 세탁소에 미친 영향이라면?
하나 둘 동네가 형성되면서 사람들이 이주해 오는데, 거기에 터줏대감이 없는 거다. 그러다보니까 단합이 안 되고, 개성이 강하다고 그럴까, 그런 식으로 되고. 양복점을 하다가 세탁업을 하니까 처음에는 가격 차이가 많다. 옛날에는 세탁소하면 인식을 안 해줬다. 도로 청소부처럼 밑으로 봤다. 손님들이 싸게 하는 거 안 했고, 손님들을 처음부터 구분해서 받았다.

○ 구분이라면?
싸게 해달라는 사람은 안 받고 정가대로만 했다. (동네 변화가 세탁소에 미친 영향을 묻는 취지에 어긋난 남편의 대답을 답답해하며 여러 차례 끼어들려던 아내가 이어받아) 이 동네가 변하면서 도움이 된 거는 별로 못 느꼈다. 외지 손님이 많아서. 반 이상이다. 양복점 하다가 여기에 왔는데 여기까지 따라 와서 옷을 맞춘 사람이 있어서 처음에는 바빴고, 그 당시는 세탁소가 많이 형성이 안돼서, 사람들이 집에서 물빨래 하는 옷이 많았지, 세탁소 올 옷이 많지 않았다. 30년 전 그 당시에는. 그러니까 그 때는 특별한 사람만 세탁(세탁소 이용)을 해 입었다. 쉽게 말하면, 공무원들, 양복 입고 다니는 화이트칼라 등. 양복입고 오버 하나 달랑 입지. 옛날에는 고급스럽다고 해봤자, 오버 입고 앙골라 쉐타 정도 나왔을 땐데. 그 때는 옷이 다양하질 않으니까, 특별한 사람만 세탁물을 맡기게 되니까 자기네가 우쭐하는 게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양복을 하다가 오니까 그 쪽에서 양복을 맞추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찾아오면서 양복을 맞추면서, 그리고 이 동네에서 살다가 다른 데로 가면서도 세탁물을 가지고 오더라고. 그래서 살던 사람이 멀리서도 오고, 소개도 해주고 그래서 우리는 외지 손님이 많았던 거다. 지금은 드라이 하는 옷이 많으니까. 지금은 (손님)수준이 보통이 된 거다. 옛날에는 서민들은 와봤자 누비는 것, 짜깁기 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는 동네 변화로 덕을 본 건 없는데,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요 근래 바로병원이 생기고 나서는 바로병원 덕을 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옷 매장 같은 데서 수선을 대놓고 했다. 양복 매장에서 손님들에게 팔려면 소매 줄여주고 옷을 맞게 해줘야 되는데 그걸 우리가 맡아서 했다. 그렇게 큰 데서 옷을 맡아 하니까 우리는 됐지(돈을 벌었지), 동네만 봤을(상대했을) 때는 어렵다.

○ 그럼 전업을 후회한 적이 있는가?
(이구동성으로)지금은 후회 안 한다. (남편)처음에는 그랬다. 왜 그랬나~ (아내) 양복점을 할 때는 보통 액수도 크지만, 직업 자체가 그렇게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양복점을 하다가,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세탁소를 하는 게 내가 생각해도 웃기는 거야. 그래서 이걸 못하겠다, 다른 걸 찾아야겠다, 안되겠다, 그 단계 쪼끔 그거에 대한 것은 있었다. 지금은 잘 했다고 생각한다.

○ 내가 전혀 생각 못했던 부분이다. 그런 무시가 있었다니.
그 사람들이 무시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 사람들 속을 모르니까. 내가 느끼는 게, 양복점할 때는 그런 걸 못 느끼다가, 세탁소를 하다 보니까 아까 얘기했듯이 수준들이 우리보다 나니까, 그것 차이. 지금은 대학 나온 사람들도 세탁소를 하니까, 중산층이나 서민층이나 어차피 다 맡겨야 하는 거니까. <2회로 이어짐>

김유경  newcritic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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