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인연

장양왕 이인도 재위 3년 만에 죽고 태자 정이 13살에 왕위에 오르니 바로 진시황입니다. 승상 여불위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상국(相國)이 되고, 작은 아버지란 의미의 중부(仲父)로 불립니다.

여불위는 아직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게 됩니다. 당시 집안 하인만 일만 여명에 식객도 3천을 두었다고 합니다. 제가 여불위를 높게 평가하는 일 중 하나가 당시 석학들을 모아 현재의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책 ‘여씨춘추’를 편찬한 점입니다.

중국역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사상을 연구 검토하여 서술한 책으로 유가를 위주로 도가, 묵가 사상 그리고 천문, 지리, 음악, 농학, 의술 등에 대한 다양한 논설을 모아 장차 통치의 지침으로 삼고자 기획하여 편찬했다고 합니다. 전체 161편으로 20만자에 해당하지요. 이런 경험과 기록이 있었기에 사마천은 ‘사기’라는 인류의 보물을 남기지 않았을까요?

여불위는 이 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상인출신으로 상국의 자리에 오르니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학식을 구비한 재상들에 비해 열등감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덕분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고, 이렇게 편찬된 여씨춘추는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지요.

그는 수도인 함양(서안) 성문에 이 책을 펴놓고 만약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뺀다면 천금을 주겠노라고 하지요(一字千金의 고사). 여담이지만 고려대의 김모 교수님이 당시 제가 다니던 대학에 오셔서 대만 학생들을 상대로 여씨춘추에 대한 특강을 하셨는데 뿌듯한 마음으로 경청을 했었습니다.

사업수완과 학문의 가치를 알아본 여불위에게는 많은 추종자들이 따랐고, 입신양명을 바라고 그의 집으로 찾아온 식객들 또한 부지기수 이었습니다. 그중에는 후일 진시황을 도와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루는 데 공헌을 하는 승상 ‘이사’도 식객으로 들어오지요.

세상에 더 이상 바랄게 없어보이던 여불위! 운명은 그 정점에서 소리 없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왕의 어머니인 태후 조희, 조태후가 남편인 장양왕이 죽고 홀로되자 그 옛날 모셨던 여불위를 부릅니다. 중국인들이 색을 밝히는 여자 혹은 강한 여자의 캐릭터로 자주 올리는 여자가 진시황의 어머니인 조태후입니다.

비록 중부라 불리고 섭정을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고 해도 왕의 어머니와 불륜은 결코 용납이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여불위. 궁 안의 여러 눈도 부담스럽지만 나날이 장성하는 왕의 존재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여불위가 섭정을 한 지 만 5년이 지나고 진시황이 18살 성년이 되자 섭정에서 물러나고 진시황이 본격적으로 친정을 합니다.

그래서 묘책을 찾지요. 남근이 크기로 소문이 자자한 노애란 사람을 찾아 가벼운 오동나무로 만든 수레를 끌게 하고, 그 소문이 조태후의 귀에 들어가게 합니다. 조태후는 노애를 거짓으로 궁형을 받은 것처럼 속이고 내시로 위장시켜 곁에 두게 됩니다.

그러다 조태후는 임신을 하게 되고 ‘옹’땅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뭐에는 파리가 꼬이듯, 권력이 있는 곳에는 출세를 노리는 속물들이 꼬이지요. 가짜 내시 노애를 통해 뭔가 이익을 얻으려는 무리들이 수천 명에 이르고, 벼슬을 얻고자 모여든 식객도 천여 명에 이르게 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노애의 간도 부어만 갑니다.

아들을 둘이나 낳은 노애는 진시황 사후 자신들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자고 조태후와 모의를 하기에 이릅니다.

본분을 망각한 노애가 대신을 모욕 주는 사태가 일어났고, 결국 세상 다 아는 사실을 혼자만 몰랐던 왕도 노애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진시황이 관리를 파견하여 조사를 하자 노애는 군사를 소집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진시황의 군에 제압이 된 노애는 거열형에 처해지고, 두 아들과 노애의 삼족은 모두 주살이 됩니다.

▲ 사진출처 : 中時電子報 극 난세영웅여불위(亂世英雄呂不韋)

지혜의 눈을 가리는 것은 언제나 욕심이지요.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에는 오르지 말고, 설혹 오른다 하여도 물러날 줄 모르면 그 종말은 더욱 비참할 뿐입니다.

노애를 궁안으로 들이는데 여불위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 진시황은 여불위도 처형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왕을 받든 공로와 식객 및 여러 신하들의 탄원으로 처단을 못하고 파면만 시켜 하남으로 내려 보냅니다.

비록 지방으로 내려갔어도 여불위를 찾는 사람들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애석하게도 그들의 발걸음은 오히려 여불위의 명을 재촉하게 되지요. 1년도 안되어 그 수가 점점 불어나자 진시황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자리가 높아질수록 배신의 공포는 커지는지 여불위가 역모를 일으킬까 두려워졌지요.

여불위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을 세웠는가? 친족도 아니면서 왜 중부라고 불리는가? 가족들을 대리고 촉으로 떠나라.’

‘촉!’ 한 번 들어가면 죽어서야 나온다는 험지. ‘파’라고 하는 나라와 더불어 중원의 서쪽, 즉 수도인 함양의 왼편입니다. 두 나라를 합쳐서 ‘파촉’이라고 하지요.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기도 힘들지만 공격을 하기도 어려운 곳입니다.

한고조 유방이 초패왕 항우와 자웅을 결하던 중, 목숨을 겨우 구하자 다시는 항우에게 도전을 안 하겠다며 부하들을 거느리고 들어간 땅이 바로 ‘촉’입니다. ‘서쪽의 파촉 즉 함양의 왼쪽으로 떠난다.’는 표현이 좌천(左遷)의 어원이기도 하지요.

여불위는 자신의 시대가 지나감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결을 하지요. 그의 나이 55세.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불위의 결말은 그렇게 끝이 납니다.

‘촉’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단어입니다. 한민족의 정한과도 잘 어울리는 서정주의 시 귀촉도(歸蜀途)는 여름 철새 소쩍새의 다른 이름입니다. 또한 많은 설화를 지닌 접동새, 두견새, 자규 등의 다양한 이름이 있는데, 깊은 밤 소쩍새의 서글픈 울음소리는 한 많은 여인의 피 빛 한숨과도 같았지요.

어수선한 정국과 실업의 고통 속에서 잠을 못 이루는 많은 이들에게 관련된 시 한 수 이조년의 다정가로 위로를 드립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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