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회 송년기

 허창무

 

한겨레신문 주주모임인 한주회가 창립된 지 벌써 2주기가 되었다. 그전에는 이름뿐이었던 단체가 <한겨레: 온>이라는 의사소통 매체를 만듦으로써 다양한 의견 발표를 할 수 있는 마당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럼으로 한주회는 실체를 유지해오고 있다. 나는 처음부터 그곳에 이런 저런 글을 게재했는데 그 중에서도 한양도성해설기를 2년에 걸쳐 53회 연재했던 것이 독자들의 상당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그저께 저녁 한겨레주주센터 이동구 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허 선생님이 모레 한주회 2주기 송년회에서 상을 받게 되었어요.”

“무슨 상인데요?”

“그동안 <한겨레: 온>에 기고한 필자 가운데서 가장 공이 많은 네 사람을 선정하여 주는 특종상입니다.”

“아무튼 영광입니다. 그런데 또 누구누구가 받게 되지요?”

“김미경 주주통신원, 이미진 주주통신원, 고봉균 주주통신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모레 뵙지요.”

 

특종상에 관하여 나중에 한겨레 온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올라왔다.

창간 2주기를 맞아 빛나는 업적을 남긴 기사 네 건을 선정하여 특종상을 시상한다.

먼저 쌀 수입개방 반대시위 중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숨진 백남기 농민 사인에 관하여 지난 10월 1일 '병사가 아닌 외인사' 서울대 현직의사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답하다' 란 기사로 국내 인터넷 매체 중 가장 먼저 서울대병원 발표의 부당성을 알린 김미경 객원편집위원이다. 이 기사는 누적 조회 수 31만 건을 기록했다.

둘째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어쩔 수없이 발목을 잘라야 했던 어머니의 충격적인 사연을 고백해 위안부할머니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피해자와 그 가족의 상처를 드러낸 '정신대와 나의 엄마'를 올린 이미진 편집위원이다.

셋째는 우리 사상을 기반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심고 세상 보는 시각을 바꾼 '서학에 반하는 동학혁명의 타이밍'을 쓴 고봉균 주주통신원이다.

끝으로 한양도성에 얽힌 역사문화이야기를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을 구사하여 지난 해 1월부터 금년 8월까지 53회에 걸쳐 연재한 허창무 통신원이다.

나는 앞의 두 사람은 몇 번의 한주회 모임에서 대화를 나눠 안면이 있다. 그러나 고봉균 주주통신원과는 면식은 있지만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 도올 김용옥 교수가 쓴 「중국일기」와 「도올, 시진핑을 말하다」등 그가 기증한 몇 권의 책을 받은 것 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 특종상 시상

이날 저녁 경주에 사는 이미진 주주통신원은 상경하지 못하여 6시 30분경 세 사람만 한겨레신문 정영무 사장으로부터 수상하였다. 그리고 수상자 각자 수강소감을 말하라기에 “역사는 과거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늘 살아있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되새기지 못하는 민족과 국가는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오늘날 대통령 탄핵정국으로 시끄러운 것도 위정자들의 역사인식의 몰지각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외세에만 의존했던 구한말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무엇이 다른가?”라고 나는 짧은 소감을 전했다.

송년회에는 모두 30여명이 참석했다. 80객으로부터 20대에 이르기까지 두루 모였으나, 주류를 이루는 층은 역시 5~60대였다. 그러므로 70대인 나는 나이 많은 순서대로 세어야 빠른 차례가 되었다. 한겨레와 한주회가 추구하는,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이 열망하는 탄핵정국이 바라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인지 회의장인 <문화공간: 온>의 분위기는 들떠있었다고 할 정도로 흥겨웠다.

오랜만에 한겨레주주센터 이병 이사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 온화한 얼굴은 언제나 포근하다. 개중에는 80대의 파파노인으로 한양도성 낙산구간의 해설을 들으러 나에게 왔던 원광대학 한의학과 명예교수도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분의 인사를 받고 긴가민가했으나 그가 도올 김용옥의 스승이라고 자기소개를 했을 때에야 재작년 여름에 일곱 명의 친구들과 함께 도성탐방에 참여했던 정우열 선생에 대한 기억이 새로웠다. 그때 우리들은 해설이 끝나고 동대문 밖 진고개라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나누었다. 세월은 2년 반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백설 같은 콧수염이며 구레나룻이 그의 온 얼굴을 뒤덮고 있어서 쉽사리 알아볼 수 없었다. 마치 옛날 중국 이야기책에 나오는 도인과 같은 모습이었고, 예의 회색 도리우찌만이 그때나 지금이나 선생의 간판이었다.

사회는 외환은행 지점장 출신으로 60대 초반인 심창식 한주회 수도권 운영위원장이 맡았다. 그는 내가 봉직했던 하나은행의 지붕 밑으로 들어간 외환은행의 전직 지점장이었기에 동지애를 느낀다. 또 한주회가 주축이 된 협동조합 <문화공간: 온>에서 나는 감사이고, 그는 이사이기도 해서 동류의식이 남다른 친구이다. 그의 유려하고 해학적인 언변은 시상식에서부터 여흥의 시간까지 내내 장내를 유쾌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참석자 각자의 특징을 찾아내어 찬사와 농담을 건네고 또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대로 불러내어 소감을 발표하도록 하는 등 모두가 소외감이 들지 않고 참여의식을 높이도록 배려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앞자리에 앉은 종친 허익배씨와 이런저런 정담을 나누고 있는데, 사회자는 또 나를 불러내어 기어코 몇 마디 발언을 하게 했다. 나는 사실 그날 별로 남 앞에 나서서 발언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나로 인해 분위기를 깨트리고 싶지 않아서 몇 마디 했다. 첫째 <한겨레: 온>을 활성화시키려면 기사쓰기의 빈도수를 늘이자. 둘째 그러면서 동시에 기사의 질을 높이도록 노력하자. 셋째 초기주주들은 노령화되었으니 이제는 주주구성을 청장년층으로 넓혀 한겨레의 초기 이상이 중단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도록 젊은 주주 모시기 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했다. 내 말에 동의하듯 앞에 앉은 협성대학 여대생 두 명이 미소를 보냈다. 그들은 오늘 참석자들 중 제일 젊은이들이었다. 말을 마치고 그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들의 출현이 누구보다 고무적이었기 때문이다.

▲ 미소를 보낸 두 명의 협성대 여대생, 이다혜, 천예은 객원편집위원

그러는 사이에도 이동구 부국장은 동영상기기를 조작하는데 여념이 없고 한주회 전국위원회 김진표 위원장은 전후좌우를 살피며 분주히 움직였다. 그는 늘 헌신적이고 다재다능하다. 분위기를 고조시키려고 정병길 경기위원이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르자 합창을 하고, 대만에 체류하다 귀국했다는 회원이 중국노래를 부를 때는 또 그 노래를 유창하게 따라 불렀다. 이러면서 송년회의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허익배 종친이 나에게 노래 한 곡조 부르라고 권유했으나 그만두었다. 어쭙잖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찰스 램의 ‘제야의 밤(New Year’s Eve)'이라도 읊고 싶었으나 그것도 분위기에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나서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고 소심해졌다.

남들이 즐겁게 노는 걸 보다가 귀가하려니 어정쩡한 마음은 곧 겨울밤의 한파처럼 썰렁해졌다. 그래도 인사동 대로상에는 시대의 우울을 멀리하고 시시덕거리는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놀이가 부럽지는 않았다. 그들의 청춘 유희에 눈을 주기에는 나의 내면이 너무나 삭막해진 것은 아닐까?

1950년대 초 이 부근 어딘가에 있었을 박인환의 ‘마리서사’에서는 샹송풍의 ‘세월이 가면’이 행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을 것이다. 세끼 밥을 제대로 못 먹을지라도 폐허 위에 낭만의 꽃은 피었던 시절! 아, 그 감미로운 노래라도 들린다면 나는 추위에 떨면서도 두 귀를 쫑긋 세울 것이다. 그러나 음악은 없고 늦은 밤거리에 을씨년스러운 겨울바람이 내 귓불을 때리고 퇴색한 능수버들 잎새만 포도 위를 하염없이 구르고 있었다.  

2016년 12월 29일

 

편집: 양성숙 부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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