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역사 인류의 역사

(1)  드라마 ‘미생'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

(2)  드라마 ‘미생'

이기고 싶다면, 충분한 몸, 체력을 먼저 만들라.
세상이 불공평해서 실패한 것 아니다. 내가 열심히 안 해서 실패한 것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반복,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취한다.

(3)  스티브 잡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  

(1)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구조, 우리가 노동력을 제공하는 일터인 ‘회사’ 즉 자본의 그늘을 벗어나는 순간 곧 우리의 생존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상황에 우리는 항상 심리적 압박감을 갖는다. (2) 이 단단한 사회 구조에서 이도 저도 할 수 없으니 결국 자신을 조직에 적응시키면서 순응해가 가기 위한 끊임없는 자기 암시만이 할 수 있는 전부인 우리들. (3) 그러나 부정적, 대립적 상태에 노출된 괴로운 인격체의 노동으로는 원하는 생산성을 담보할 수 없음을 간파한 그들이 곧 노동 효율성을 위해 ‘일이란 즐거운 것’이라는 새로운 공식을 들고 나오기에 이른다. 우리의 노동환경으로부터 느끼는 감정, 정서 등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적나라한 눈앞 현실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노동력이 자본에게 판매되어 하나의 생산요소로 이용되는 종속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한편 다른 생산 요소들과 달리 여전히 그 이용이 간단치만은 않음을 시사하는 측면(3)은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된다고 할까.

우리는 늘 행복한 미래의 삶을 꿈꾸면서 그 행복을 가져다줄 수단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돈을 벌기 위해 오늘을 기꺼이 내놓는다. 그런데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그 돈을 벌기 위해 우리가 제공하는 노동은 그 기회, 보상, 강도 등 측면에서 다시 우리를 불행하게도 행복하게도 한다. 특히 노동력 제공 기회가 박탈되거나 충분하지 못한 보상의 문제로 인해 인간이 향유하는 그 많은 가치 중 오직 생존 본능으로 내몰리는 현실에서는 행복 담론 자체가 사치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분명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감이 생존 본능으로 내몰린 환경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가치일 텐데 말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노동이라는 것을 노(勞)와 사(使)의 대립적 관점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현재의 노동 상황들이 과연 관련 노동법에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법리해석의 측면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그런 오랜 습성에 우리는 어느 순간 갑갑증을 느끼곤 한다. 과연 삶의 본질과 떼어낼 수 없는 이 노동이라는 것을 그렇게 좁은 범주에만 가두어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인간으로서 누리는 어떤 가치라도 이 사회에서 타인과의 관계에 놓이게 되는 한 불가피하게 어떤 기준(법이나 도덕 등)의 범주 안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때로 인간 존재에 대한 중요한 문제에 너무도 단순한 어떤 잣대가 판단의 전부가 되어버리게 되는 경우 우리는 스스로 그 존재감에 대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Ⅰ- 1 우리의 노동력, 주인은 누구일까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돈’, 이는 대체로 노동(일)의 대가로서 교환되어 주어지는 것이다 보니, 주로 그 대가로서 충분한 기회와 보상을 받고 있는지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그러다 근본에 대한 질문은 잦아들고 둔감해지면서 결국 지엽적인 문제만이 덩그러니 우리 앞에 놓이게 되곤 한다.

‘케이시 윅스(Kathi Weeks)’는 그의 저서「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 것인지, 즉 일을 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이유와 그런 상태에 맞서 더욱 적극적인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면서 오늘날 일에서의 문제는 그 양과 질, 모두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크게 2가지인데, ①오늘날 우리는 노동의 주체로서 대체로 필요한 노동 이상으로 부당하게 강요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②부당하게 강요당하고 있다면 왜 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 처음에 노예는 자신의 군주가 권력을 누린다는 사실에 불평하지 않고, 다만 군주의 폭정에 불평할 뿐이다.”라고 말한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주어진 제도, 현실 자체에 대한 의문은 미룬 채 그 제도 운영의 문제점만 파고드는 습성이 있다. 물론 그런 습성으로 문제 해결이 부분적, 일시적으로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 문제가 오늘날 ‘헬조선’과 같은 보다 근원적인 현상으로 드러나게 되면 영원히 그 문제의 해결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위 ‘미생’에서처럼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켜 제도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노력 말고는 마땅히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과로조차 고용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특권적인 형태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는「케이시 윅스」의 말을 곱씹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날마다 직장으로 출근해 노동을 하고 임금을 받는다. 즉 회사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누군가의 통제를 받아 우리의 육체(신체이건 정신이건)를 이용해 일을 완성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제공하는 노동력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노동력을 행사하는 나 자신인가, 노동력의 대가로 임금을 지급하는 회사의 사장인가?

노동력을 통제할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또는 누구여야 하는지)와 같은 논의는 노동력을 사고파는 노동시장의 상황과 맞물려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기업은 인간의 노동력을 그 질적 측면을 포함하여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인간은 자신의 노동력이 적어도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거래되지 않기를 갈망한다. 이처럼 노동력에 대한 통제와 통제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양 당사자가 대립하는 절묘한 지점에서 자본은 인간의 생존 본능을 자극함으로써 노동력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어쩌면 이와 같은 구도의 심화로 인해 우리는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보다는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리게 되는 오늘을 맞이하게 된 것은 아닐까. 즉 노동에 대한 기본적인 세력균형의 관계가 깨지는 순간 주도권을 가진 세력에 굴복하게 되고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그들로부터 더 많은 베풂을 기다리는 것 외에 없을 테니 말이다.

실제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 역시 이러한 힘의 불균형으로부터 유발될 수 있는 제반 불이익(해고, 강제근로, 취약한 보상 등)의 가능성에 초점이 맞추어 법 조항들이 구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최소한의 기준은 불이익이 현실화할 경우 단순한 불이익 차원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연결될 수 있는 현실을 고려한 나름의 안전장치인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개별 인격체의 독립적 지위에서 비롯된다는 일반적 속성과 달리, 노동은 행위 주체가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곤 한다. 오늘날의 법체계 하에서 인간이 누군가에 예속될 수 있는 것인지, 예속되어 있다면 온당한 것인지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예속되어 있다면 독립적인 인격체를 중요시하는 오늘날 법체계와 맞지도 온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예속의 징후들이 물리적, 직접적 방법이 아닌 간접적인 방법으로 은밀하고 가혹하게 진행되고 있다면 문제는 간단치 않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 정신세계, 감정의 세계가 노동이라는 이름하에 통제당하게 되는 경우처럼 말이다.

Ⅰ- 2 노동과 여가, 그 중심 추는 어디쯤이어야 할까

1509년 로마, 미켈란젤로는 유쾌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뒤틀고 목을 길게 뺀 기괴한 자세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그리고 있었다. 물감이 얼굴에 뚝뚝 떨어지는 고역을 참아가면서.

“이 덫에 갇혀 있는 동안 갑상선종이 악화되었네. 몸 앞쪽 피부는 팽팽하게 늘어나는 느낌인데, 뒤쪽은 구겨지고 접혔어. 나는 지금 시리아 활처럼 휘어 있다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나는 화가도 아니라고.”

“그의 불평은 우리에게 익숙한 반면 놀랍기도 하다. 자신의 일터가 빠져나올 수 없는 덫으로 느껴지는 우울한 날을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5백여 년 전의 위대한 인물도 요즘 사람들과 다름없이 자기 일에 불만을 쏟아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열정 절벽, 미야 토쿠미츠)

노동이란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즉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며 통제하는 한 과정으로 자연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사용될 수 있는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다리·머리·손 등을 운동시키게 되는데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자기 외부의 자연에 작용하고 이것을 변화시킴으로써 나아가 잠자고 있는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킨다(자본Ⅰ-1)라고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말한다.

이처럼 노동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 스스로의 육체를 이용해 운동하는 과정에서 외부(자연)를 변화시키거나 스스로가 변해가는 보다 종합적인 의미의 것으로서, 단순히 시장에서 거래되는 제한된 가치의 상품으로 치부될 수 없는 것이다. 시장에서의 상품가치는 그 내구년수를 다함으로써 그 가치도 함께 소멸하지만, 인간의 노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미래의 세계까지 변화시켜가는 주체적이고 전체적인 의미로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노동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재화를 얻기 위한 기본 행위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듯이,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이며 그러한 의미가 때론 우리 삶 전체를 규정하기도 한다. 물론 시장 경제가 대두되기 이전, 삶 자체가 노동이었던 때와는 달리 오늘날의 개인적 삶의 반경에는 노동 이후의 휴식, 즉 여가라는 영역(취미 등)의 개념이 들어오게 되었고, 제공되는 노동의 형태와 질적 측면은 곧바로 현대인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더욱 중요한 영역이 되었다.

우리 삶을 규정하게 되는 이 노동의 역사와 노동의 구조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으며 피동적인 상품 제공자가 아닌 주체적인 노동으로서 거듭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처럼 인간의 삶과 본질을 이루는 노동이 오직 식량을 구하기 위한 상품으로서의 노동이 되는 것은 우리가 피해야 할 가장 극단의 상황인 것이며, 그래서 오늘의 현실이 더욱 심각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아한 것은 이렇게 일해야만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기꺼이 일을 위해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일이 그토록 고귀하게 여겨지는 이유를 이해하기는 쉽지만, 일이 다른 취미나 여가활동보다 가치 있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렇게 명백하지 않다.”는「케이시 윅스」말은 노동의 변천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감해 볼 필요성을 강하게 자극한다.

지금까지는 일(노동)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형태를 중심으로 그 경제학적 가치와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주 연구대상이었고 그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시스템의 근간으로 돌아와 도대체 “일은 왜 해야만 하는가.”의 문제부터 돌아보자는 것이다.

물론 자본이 노동생산성이라는 이름하에 잉여가치 생산에 열을 올리던 산업혁명기를 전후하여 칼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자본론’에서 이미 이런 근원적인 문제들과 자본의 정체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하였듯이 이런 문제에 대한 관심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이론은 자유시장경제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한낮 고전으로만 취급되고 있는 현실처럼, 오늘날의 시장경제 자체만이 절대적인 시스템이라 전제하는 한 노동의 본질에 다가가기는 요원할 것이다.

노동과 여가(휴식), 양쪽의 추 사이에서 우리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지탱하는 중심축이 어디쯤인 것인지 고민할 때가 아닐까. 단순한 소망의 수준이 아니라 자연인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를 중심으로 말이다. 누가 보아도 생산물의 편중(부의 편중으로 나타남) 현상이 심화된 채 자본·노동·삶 모두가 길을 잃고 신음하는 상태에선 더욱 그렇다.

 Ⅰ- 3 타인의 노동력으로 생존하는 사람들

그렇다면 왜 오늘날 부의 편중현상이 이처럼 심화되었으며, 한편 우리는 매 순간 휴식과 여가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바로 그 ‘부의 편중현상’이 강화되려면 ‘휴식(정당한 보상 하에서의 휴식)’의 축소가 불가피하듯이 이들은 서로 반비례 관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경제활동 등을 살펴보면 과연 이런 행위를 노동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즉 비노동(非勞動) 부분이 그것인데 개인의 생존이 스스로의 노동에 의하지 않은 부분이 갈수록 광범위해져가고 있다. 이를테면 권력을 좇는 사람들(박근혜 사건을 보면 권력의 파동을 따라 하급관리 부분까지 깊숙이 뻗쳐 내려가고 있음), 각종 영역의 브로커, 광범위해지는 투기세력들, 노동이 아닌 비정상적인 사기행위로(우리나라의 사기 범죄율은 OECD 최고) 먹고사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 삶의 구조가 심히 왜곡되어 가고 있음을 의미하며, 노동의 사회화와 함께 잉여 노동, 잉여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시작된 현상이다.

인간은 초기의 동물 상태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나 그 노동 자체가 이미 사회화되었을 때 비로소 어떤 사람의 잉여 노동이 다른 사람의 생존조건이 되는 관계들이 나타난다.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이 증진됨에 따라 이 비율은 절대적, 상대적으로 증대한다. 더구나 자본관계는 기나긴 발전과정의 산물인 경제적 기반 위에서 발생하며 자본관계가 발생하는 데 바탕이 되는 기존의 노동생산성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수천 세기를 포함하는 역사의 산물인 것이다.  < 자본Ⅰ-2 / 칼 마르크스 >

비노동 부분이 이처럼 확대되었음에도 여전히 전 국민이 어찌됐든 생존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은 이러한 비노동자들까지 먹여 살리고 있을 정도의 잉여 생산 능력이 어딘가에 존재하며 잉여 생산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력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좋게 말해 능력이지 일하는 그룹이 일하지 않는 그룹을 위해 그들의 여가를 희생해가며 과잉노동으로 착취당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비노동 부분은 인류가 오늘날과 같은 인간의 역사를 일구어온 원동력으로 오래전부터 작동하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로마의 문명 등에서 권위적 산물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그 시대 수많은 노동들, 산업혁명으로 인한 부의 축적 과정에서 자본 형성에 기여한 노동들, 식민지 개척으로 현지인들을 부려서 이룩한 부의 축적 과정에서의 노동,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 불균형 상태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로의 발전 등 역사적으로 노동 착취 사례는 무수히 많았으며, 이는 대부분 인간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여가를 희생시켜 과잉노동으로 이끌어낸 산물일 것이다.

비노동 부분은 오늘날 다소 모호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비노동 부분이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하나의 형태나 요소로서 인정되기까지 한다. 대표적으로 투자(자본투자, 주식, 채권 투자)라는 이름의 자본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현대사회는 이 투자와 투기가 범벅되어 있어 정확히 구분해내기 어려울 정도다. 투자라는 것 자체가 외부로부터의 자본조달 방법이므로 오늘날 자본주의를 숙성시킨 근간이 되기도 하지만 노동활동을 왜곡시킬 가능성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기타 임대수익, 부동산 매매차익, 소득 수익 등 그러한 요인들은 도처에 있다.

Ⅰ- 4 노동의 종속성과 계급의 형성

노동의 예속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생긴 독특한 특징이 아니다. 과거 토지소유자에 구속된 노예노동, 소작농이 그러했듯이(이 시기에는 종속노동이 합법적으로 가능한 제도) 이후에도 노동은 항상 그 시대 계급구조를 견인하는 역할을 해왔다. 왜 그럴까?

일의 공간은 의사결정의 장으로서는 권력과 권위의 관계에 따라 구조화되며, 위계화 된 조직으로서는 동의와 복종이라는 문제를 드러내고, 배제의 공간으로서는 구성원의 자격과 의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비개인적 동력이 사람들을 일하도록 몰아붙이지만, 일터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사람들은 통치자와 피통치자라는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로 말려들어 간다. 실제로 직장은 대부분이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가장 직접적이고 명료하며 실체적인 권력관계를 흔히 경험하는 곳이다. 일은 단순히 경제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온전히 정치적 현상으로서 탐색할 여지가 많은 대상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 Kathi Weeks >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은 개인의 의지로 시장(시장 거래라고 하면 우린 일단 공정한 조건의 환경으로 오해하곤 한다.)에서 거래되는 상품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런 형태는 외형상으로 노예노동의 신체적 종속으로부터 해방된 듯 보이지만 노동이 제공되는 실질적 구조에 이르면 과거 계급사회에서 전인격적 종속의 형태처럼 종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마주치게 된다. 이는 노동이 임금의 대가로 교환되는 한 노동자와 노동을 따로 떼어낼 수 없는 노동 제공의 형태상 불가피한 측면에서 오는 현상이며 그래서 악용될 소지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시장에서 공정하게 거래되는 듯하지만 생산시설을 소유한 자본에 대해 상대적 약자의 지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노동에게 계약자유의 원리인 시민법 체계는 오히려 불공정한 기준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에 시민법 원리를 수정하여 각종 노동 보호법을 만들어 보완하였지만, 오늘날 그 종속성은 과거와 매우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즉 개별 인격체가 주체로서 노동을 제공하는 듯이 보이지만 여전히 그 종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구조적 이유들이 있으며, 형태도 간접적인 것이어서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1) 노동의 상품화 의미 속에는 그 노동이 거래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내포한다

(2) 선택된 노동은 자본의 생산시설로 귀속된다

(3) 잉여가치 생산을 위해 과잉노동은 필연적이다.

노동이 종속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한 충분한 고민도 허락되지 않은 우리에게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다가오는 새로운 패러다임에서의 노동을 생각케 한다는 것이 더욱 부담이기는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숙제인 것은 분명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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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의 시작으로 먼저 ‘[Ⅰ] 노동의 주인은 누구일까’를 살펴보았다. 이어지는 논고에서는 오늘 제시한 개괄적인 논제들을 토대로 [Ⅱ] 노동의 형태는 시대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으며 어떤 형태로 구속되어 왔는가. [Ⅲ] 노동(일)이 성공의 도구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과 [Ⅳ] 정신세계까지 지배당하게 된 오늘날, 과학의 발전에 따라 노동의 위치는 어떤 관계로 발전되어 갈 것인지를 중심으로 이어가려고 한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진희 주주통신원  kimjh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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