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척 하고 내 맘대로 읽어보는 노자 도덕경 <1> 도가도 비상도

‘도덕경’은 기원전 4세기경 중국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老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이다. 약 5,000언(言),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道經)',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德經)'이라고 한다. ‘도덕경’의 사상은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이라고 한다. 무위(無爲)는 ‘도는 언제나 무위이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의 무위이고, 자연(自然)은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天法道道法自然).’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도덕경’의 사상은 모든 거짓됨과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이다. [편집자 주]

다시 도덕경을 읽고 싶어졌다. 도덕경은 모두 81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가 처음으로 도덕경을 읽은 것은 대학교 4학년이었던 1992년 23살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나는 한문강독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고, 동아리 선배님들이 대부분 국문학과, 사학과, 철학과 대학원생들이었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 도덕경은 노자(老子)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도가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노자(老子)》로도 불린다. 81장  5,000자로로 쓰였다.

 

'도덕경' 번역본은 숱하게 많이 나와 있지만 당시에 '도덕경'을 읽으면서 가장 좋아했던 번역본은 도올 김용옥의 <길과 얻음>(1989, 통나무) 였다. 그렇지만 선배들이 입에 닳도록 이야기했던 '왕필'의 <노자주>도 중요하게 여겼다. 왕필(226~249)은 23년을 살고 간 중국의 천재학자로서 <노자주>를 언제 썼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6~20세 사이에 쓰였다고 하는데 적어도 죽은 나이가 23세이니 그 이전에 썼을 거라는 건 확실하다.

 

▲ 왕필(王弼, 226년 ~ 249년)은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관리이자 사상가이다.

그런데 문제는 23살의 내가 읽었던 왕필의 <노자주>는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땐 그 문제를 내가 부족해서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제 48세의 아줌마가 되어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아마도 23살이라는 나이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또한 도올 김용옥 선생이 <길과 얻음>을 출간했던 시기도 1989년으로서 1948년생인 선생의 나이를 감안하면 40세 안팎으로 책을 썼으리라 생각한다. 더욱이 왕필의 <노자주>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데에는 다시 한글로 번역해야 했지만, 도올의 노자 해석은 비슷한 시대를 살고 있으며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우리나라 석학에 의해 쓰였기에 더 우리 마음에 와 닿았을 것이다.

고전의 가치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 시대에도 메시지를 전해준다. 최근 격렬하게 동요하는 시대의 흐름을 지켜보며, 다시 도덕경을 읽고 싶어졌다. 왕필과 도올의 생각을 깊이 참조하되, 원문 자체에 더 많이 관심을 가지며 1970년에 태어나 현재로 47년째 살고 있는 한국 아줌마인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읊어볼 예정이다. 즉 원문의 번역이나 강독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자유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려는 것이다.

앞으로 81일 동안 가끔 빠질 수도 있겠지만 여름이 오기 전까지 도덕경을 읽으며 단상을 남길 것이다. 파란만장한 병신년을 보내며 정유년을 맞이하는 이 즈음에 미친 척하고 시작하는 연재다. 무엇보다도 나는 동양철학 전공자가 아니라서 학문적 부담이 없으니 매우 좋다. 대길大吉이다.

 

▲ 노자는 춘추시대 초나라의 철학자로 전해지고 있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시호는 담(聃)이다.

 

<도덕경 1장>

道可道,非常道;

세상에 허다한 약장수들이 "이게 도야!"라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장황하게 떠들어대는데,

그렇게 떠들어 대는 순간 도가 아닌 걸?

名可名,非常名.

세상에 허다한 명분쟁이들이 보란듯이 명함을 내밀면서

"이게 내 이름이야"라고 말하지만,

글쎄 그 자리 언제까지 가려나?

無名,天地之始;

사실 하늘과 땅의 첫 시작에는 어디에도 이름이 없었어.

有名,萬物之母.

만물의 어미들이 아이들을 줄줄이 낳아놓고서야

헷갈리지 않으려고 이름을 붙였지.

故常無欲以觀其妙,

그런 까닭에 항시 뭘 억지로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어야

세상 진리의 오묘함을 볼 수 있고,

常有欲以觀其徼(순행할 요)

항시 뭘 억지로 열심히 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결국 내뜻따윈 상관없이 일이 돌아가는 이치를 보게 되는 법.

此兩者同出而異名.

그렇지만 이 두 가지는 본래 출생이 같고 이름만 달라.

뭐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이 아니야.

같이 붙어 다니는 것들이지.

同謂之玄, 玄之又玄,衆妙之門.

물론 서로 성질은 전혀 다르지.

굳이 두 가지를 한 이름으로 부르자면

빨간 물감과 파란 물감을 섞은 것처럼 검다?

그래서 오묘하다, 신묘하다, 심오하다?

생명의 신비함이 늪같이 검고 깊은

그 심연에서 생겨났거든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조정미 주주통신원  neoech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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