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최운산 장군과 할머니 김성녀 여사는 모두 열한 명의 자식을 낳으셨다. 최운산 장군은 매번 충분히 산후조리를 할 수 있도록 아내를 보살폈고, 김성녀 여사에게 그 시간은 행복한 재충전의 기회였다고 한다. 그래선지 할머니는 유난히 자식 욕심이 많으셨다. 하지만 얼굴이 예뻐 고분네라고 불렀던 딸을 포함해 모두 넷을 어려서 잃었다. 그리고 위로 청옥부터, 영옥, 옥순, 옥순과 연년생으로 첫아들인 아버지 봉우(鳳羽)와 둘째아들 봉학(鳳鶴), 그리고 막내딸 계순과 많은 막내아들 호석까지 딸 넷과 아들 셋, 7남매가 남아 성장했다.

그 중 막내고모와 막내삼촌이 아직 살아계신다. 연변에 살다가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국적을 취득해 한국에 정착한 두 분 덕분에 내가 할머니와 아버지께 들었던 집안 이야기와 두 분의 어릴 적 이야기를 보태어 가족사의 퍼즐을 맞추고 있다. 85세의 계순고모는 노환으로 귀가 들리지 않아 필담으로 대화해야 한다. 자신의 삶과 집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전해주려고 노력하는 고모와 삼촌의 모습에서 강직함과 고지식한 성품이 우리 집안 내력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 분의 기억을 통해 열어보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한 자락은 여느 대하드라마 못지않다.

최운산장군과 김성녀 여사, 두 분이 모두 강하고 대담한 분들이라 그런지 그 자녀들도 모두 겁이 없고 어떤 싸움에서도 지지 않았다. 죽기 살기로 덤비는 강한 성격들이었다고 한다. 호석 삼촌은 큰형님인 우리 아버지도 젊은 시절엔 물러서는 법이 없는 청년이었다고 하셨다. 마치 중요한 비밀을 전해주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막내삼촌의 세월을 건너 온 기억은 장군의 아들 아버지 최봉우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기도 했다.

큰고모 청옥은 할머니를 닮아 자그마한 체구였다. 그러나 겁이 없어  숲이 울창하고  호랑이, 멧돼지, 사슴 등 야생동물이 자주 출몰하는 봉오동 뒷산으로 나물이나 약초 등을 캐러 자주 올라갔다고 한다. 어린아이였던 막내삼촌은 낫 하나만을 들고 혼자 숲으로 들어가는 큰누이가 정말 대단해 보였다고 기억한다. 지주 집안이라 청산 맞아 형편이 어려웠지만 대담하고 강한 성격의 청옥에게 동네사람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20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큰고모는 부모를 잃은 막내삼촌과 막내고모에게 엄마와 같은 존재였다. 청옥은 공산화로 모든 것을 빼앗긴 몰락한 집안의 큰딸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6살과 12살의 늦둥이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특히 중국이 문화 혁명기를 지나던 1960년대에는 지주 집안의 맏이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마을 조회 때면 주민들 앞에 끌려 나가 조리돌림을 당했다. 머리에 고깔을 씌우고 때리며 비판을 했는데 그 때 맞은 상차가 흉터가 되어 오래도록 몸에 남아 있었다. 봉오동에서 더 이상 살기가 힘들어진 고모들과 호석 삼촌은 봉오동을 떠났다. 개산툰이라는 지역에  숨어 살면서 청옥 큰고모는 이름도 정옥으로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숨겼다.

1983년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했다. 모든 국민들이 방송을 보며 울고 웃었다. 당시 우리 식구들도 그랬다. 방송이 보여주는 절절한 사연들이 우리 가족의 이산의 아픔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함께 울었다. 할머니 김성녀 여사와 부모님이 어린 큰오빠를 데리고 피난을 오셨는데 할머니와 어머니 두 분은 이미  돌아가신 뒤라 마음이 더 아팠다. 몇 번이나 이산가족 방송 신청을 망설이던 아버지는 결국 신청을 포기하셨다. 혹시 방송을 통해 당신이 남쪽으로 넘어온 것이 알려지면 북한의 옥순고모와 중국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피해가 갈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국과 수교가 되기 전인데도 KBS는 연변에 가서서 헤어진 가족을 찾는 사연들을 받아왔고 “중공에서 찾습니다.”란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송했다. 연변에 살던 고모들과 막내삼촌이 "연변 봉오동 출신, 평양방송국 아나운서였던 최봉우가 6.25 때 사라졌는데 전쟁 중에 죽지 않았으면 혹시 남한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사연을 담아 한국으로 보냈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상황이 어쩌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는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던 순간이다. 마치 기적처럼 방송을 통해 연변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확인한 아버지가 청옥 큰누이에게 당신이 남한에 살고 있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큰고모가 정목으로 개명해  그 편지가 주인인 최청옥을 찾지 못해 1년 가까이 연변을 돌아다니다가 가까스로 최정옥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한국에 살고 있다는 소식은 당시 함흥 외곽에 살면서 연변의 형제들과 왕래하고 있던 셋째고모 옥순에게도 전해졌다. 서른 살에 헤어진 연년생 오라비의 소식을 일흔이 넘어서야 들은 것이다.

▲ 학창시절의 옥순고모

아버지 보다 한살 위인 옥순고모는 봉오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몰래 일본으로 떠나 동경에 도착한 뒤 소식을 전해온 동생 봉우가 극적으로 허락 받는 과정을 지켜본 뒤 자신도 공부를 더 하기로 결심했다.  얼마 뒤 동생처럼 혼자서 집을 떠나 서울에 도착해서 편지를 보냈다. 평소 "사내자식은 소 궁둥이를 때리면서 키워도 딸들은 책상 앞에서 키워야 한다."는 지론을 자주 펼치셨던 최운산 장군은 용감한 옥순의 유학도 허락했다. 일찍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여자가 중심이 되어야 그 집안이 편안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던 최운산 장군의 모습에서 시대를 앞 선 페미니스트의 면모를 발견한다. 셋째고모 옥순은 서울에서 이화여전을 졸업했다. 

그런데 동생 봉우가 이화여전을 졸업한 옥순에게 함께 동경에 가서 공부를 더 하자고 설득했다.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옥순고모는 봉우를 따라 다시 일본 유학을 떠났다. 당시 서울에는 옥순을 짝사랑했던 기자가 한 명 있었다고 한다. 그는 옥순고모가 서울을 떠나던 날 아침, 눈물로 꽃다발을 전해주며 떠나지 말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기를 바랐다. 언론운동 분야 시민운동 활동가로 기자들을 많이 알고 지내는 탓인지 이제는 고인이 되었을 그 기자가 누구였을지 몹시 궁금하다. 옥순고모에게 그저 지난 추억으로 남아있던 사연을 고종사촌 동생을 통해 전해 들으며 이름 모르는 그 젊은 기자의 마음이 헤아려지는 것은 그 이후 옥순고모가 살아내신 삶의 신산함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 봉우는 일본에서 공부할 때  당신보다 한 살이 많은 옥순고모를 동생이라고 주변에 소개했단다. 낯선 땅에서 누이를 아꼈던 오라비의 마음이 느껴지는 결정이다. 그런데 유학시절 아버지의 친구인 공산주의자 심종운이 미모에 성격도 좋은 고모에게 반했다. 유학중이었으나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막내삼촌 호석은 당시 고모와 결혼하기 위해 봉오동의 처갓집을 찾았던 매형이 참 바보 같아 보였단다. 자기 평생에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봤다는 고모부의 순정어린 고백이 어린아이였던 삼촌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의 만남은 예쁜 누이를 기억하는 추억의 한 장면으로 막내 동생의 가슴에 그렇게 그림처럼 남아있었다.

▲ 셋째 옥순고모가 평양에 살 때 찍은 사진, 1950년대 중반으로 추정

당시 많은 젊은 엘리트들이 사회주의에 기울었다. 고모부 심종운은 평양에서 공산당 간부가 되었고 안정된 생활을 했다. 평양으로 시집 간 옥순고모는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간첩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을 당하다 구사일생으로 봉오동을 탈출한 아버지가 평양방송국에 취직하고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공산당 간부인 매형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젊은 공산주의자 심종운은 김일성에 충성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과 거리를 두었던 집안분위가 탓이었는지 아버지는 아나운서로 일하면서도 김일성의 통치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공산주의자들의 일처리가 지나치다는 생각에 친구에게 좀 더 인간적으로 처리할 것을 충고하자 고모부 심종운은 처남만 아니면 당장 끌고가 처단했을 것이라고,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아버지의 피난 결정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1.4후퇴 때 평양을 떠난 아버지는 당신이 전쟁 중에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길 원하셨다. 당신의 탈출이 공산당 간부 가족인 누이의 삶에 피해를 주지않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러나 고모는 전쟁 중에 행방불명된 오라비 탓에 남편이 공산당의 간부임에도 평생 공산당원이 될 수 없었다고 한다.

6.25 후 고모부 심종운은 평양기계공장 지배인(사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많은 북한의 엘리트들이 그랬듯이, 고모부도 숙청을 당했고 함흥 근처의 탄광으로 쫓겨 갔다. 탄광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절치부심하던 고모부는 얼마 후 오해가 풀렸으니 평양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김일성의 복귀 명령을 받았다.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날 기쁜 마음으로 냉수마찰을 하던 고모부는 뇌출혈로 사망했다. 40대에 홀로된 고모는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함흥 근교 시골에서 세 아이를 키우며 오래도록 빈곤한 삶을 사셨다. 

북한의 옥순고모는 다행히 연변의 형제들과는 서로 방문하고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던 80~90년대에는 오히려 중국의 형제들이 옥순고모에게 도움을 주었다. 1992년 둘째 아들 철용과 함께 동생 계순의 집을 방문해 6개월 정도 지내고 돌아간 것이 옥순의 마지막 중국 방문이었다. 당시는 막내고모 계순과 막내삼촌 호석이 모국방문단으로 한국에 와서 아버지를 만났고, 막내 호석은 이미 한국에 나와 정착한 후였다.

옥순고모는 아버지가 남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에 정말 기뻐하셨다. 언젠가 중국에서 만나자며 서로 다짐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1997년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봉오동을 방문하셨을 때 옥순고모가 중국으로 건너오지 못하셨다. 시간이 지난 후 옥순고모는 중국방문을 쉽게 허락 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담은 편지만 도착했었다. 귀국 후 아버지의 건강이 점점 나빠졌고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으셨다. 

국경을 넘나들며 검문을 통과해야 하는 탓에 한국 소식을 편지에 그대로 담을 수 없었던 옥순과 계순 자매는 마치 암호를 쓰듯이 한국을 왕청이라 부르고 아버지를 왕청 오라비라 칭했다. 남한과 북한의 남매는 그렇게라도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2001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아픈 마음을 전하셨던 옥순고모의 편지를 끝으로 연락이 끊어졌다. 아버지보다 한 살 위의 옥순고모가 80대 중반까지는 충분히 살아계셨으리라 짐작하지만 2005년 ㄷ오생인 계순고모가 한국으로 영주 귀국한 이후에는 더 이상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어지고 말았다.

▲ 1992년 연변을 방문한 옥순고모와 자매들. 왼쪽이 셋째 옥순 고모, 오른쪽에 첫째 청옥고모, 뒤에 서있는 계순고모 가운데 아이는 사촌 동생 선숙(막내삼촌 호석의 딸)

연년생으로 함께 일본유학을 떠날 만큼 가까웠던 오누이, 옥순과 봉우 남매는 생전에 다시 만나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8년, 이제 북한의 고모도 돌아가셨으리라 짐작만 한다.

먼저 떠나신 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옥순고모를 만나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당신 때문에 서울이 아니라 평양으로 시집가서 살게 되었던 예쁜 누이, 공부를 좋아했던 인텔리 누이가 끼니를 걱정하는 시골아낙으로 살았던 그 긴 세월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정말 미안했다고 말씀하셨을 것 같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든 긍정적이고 주변사람을 편하게 했다는 성격 좋은 옥순고모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모두 다 내 선택이었고 내 삶이었으니 아무런 후회가 없소! 나는 오라비의 사랑만 기억하오!”라고 웃으며 답하셨으리라 짐작해본다.

막내 삼촌은 내가 나이가 들면서 얼굴이 옥순고모를 닮아가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옥순이모를 여러 번 만났다는 고종사촌들은 옥순고모와 내가 성격이 닮은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셋째고모가 오래전부터 내 가슴에 따뜻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옥순고모를 만날 수는 없지만 남북이 소통하게 되면 고종사촌 심정애, 심철호, 심철용을 먼저 찾아보리라 다짐한다.

 

[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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