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공부는 그렇게 적응을 했는데 친구관계는 어땠을까?

뉴질랜드 학교에서는 군대식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학생들은 2명씩 큐브라는 작은 방에 배정된다. 큐브는 방문이 없이 복도가 바로 보이는 공간이다. 복도를 방 끝에 두고 나란히 있는 10개의 큐브에서 2명씩 생활하므로 최대 20명까지 지낼 수 있었지만 아들이 있는 기숙사는 13명이 지냈다. 아들은 비교적 친구들과 빨리 어울린 것 같다. 친구 사귀는데 준비기간이 많이 걸리는 아들이 어떻게 아이들과 빨리 어울렸을까? 아들은 자기 성격을 버렸다고 했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용기를 내어 웃고 떠들었다고 했다. 다행히도 친구들이 대부분 친절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에 나중엔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하지만 상처도 있었다. 정확한 기록을 위해 아들에게 큐브에 대하여 문의하던 중 아들은 사실대로 써야한다며, 뉴질랜드 기숙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들이 카톡에 써준 말이다.

"7월 중순에 도착한 뉴질랜드 기숙사는 첫날밤부터 끔찍했다. 늦게 도착해서 시간이 없어서 그런지 교복은 받았는데 이불은 받지 못했다. 그날 밤 겨울 잠바를 이불처럼 덮고 잤다. 7월이 한겨울인 뉴질랜드라서 여름에 적응된 내 발가락은 동상에 걸릴 것 같았다. 수족냉증이 있는 내 발이 더 원망스러웠다 숨을 쉴 때 찬 공기가 코 안으로 들어올 때는 코에 털이 있음을 새삼 알게 해줬다. 내 코털은 마치 바다 깊숙이 있는 해초처럼 물결(숨결)에 의해 앞뒤로 움직였다. 첫날밤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그때를 떠올리며 몸을 둥글게 말고 추위와 싸우며 잤다. 

며칠 지나, 두 학년인가 한 학년 위인 일본인 친구가 갑자기 한국말을 하면서 다가왔다. 엄마가 한국 사람인 일본인이었다. ‘너 어디서 왔냐?’는 말을 하면서 친해졌다. 이후 같은 학년 친구들에겐 먼저 다가가서 말도 걸면서 친해졌지만 고학년 선배들과는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 한 번은 같은 학생 중 한명이 나를 모함했다. 오해를 풀기 전까지는 놀림을 당했지만 누명을 벗고 나서는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있었다. 물론 나에게 누명을 씌운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상대해주지 않았다. 가자마자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곧 깨달았다. 아.. 내가 인종차별을 당한 거구나...

시골에 있는 학교라 시골 아이들이 다 순진하고 착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뭔가 차별을 당한다고 느꼈고, 아토피 때문에 건조한 피부에 크림을 바르면 메이크업을 한다고 놀림도 받았다.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당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그 때 이후로 마음이 독해졌다. 

어느 날 세탁실 내 빨래 칸에 ‘go home’이라고 써있었다. 바보 같은 나는 처음엔 한국에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내가 집에 돌아간다고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교환학생 빨래 칸 모두에 ‘go home’이라고 쓴 걸 보고 인종차별이구나 하고 알았다. 독일, 스페인, 태국, 중국, 일본 등 자기들과 다른 모국어를 가진 모든 아이들에게 썼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적히지 않은 아이는 미국학생, 아마도 같은 모국어를 가졌다고 인종이 같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기숙사 스태프 중에는 독일인들이 많았다. 군 입대 대신 다른 나라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는 거였다. 뉴질랜드 시골 청년들은 가끔 자기들끼리 독일인을 나치라고 부르며 낄낄거렸다. 내가 안 보이는 곳에선 얼마나 아시안 욕을 할까 눈에 훤희 보였지만 근육덩치 고학년이라 무서워 따지지도 못했다. 

뉴질랜드 아이 중에 저희들끼리도 자주 놀리는 친구가 있었다. 착한 친구였고 키는 컸지만 생김새가 나무늘보를 연상케 하고 행동도 좀 어리숙해서 놀림을 많이 받았다. 한번은 지나가다가 부츠로 아시아 친구 뺨을 때렸다. 진짜로 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 실수로 친 것 같았다. 아시아 친구는 그 친구의 뺨을 때리고 밀치면 화를 냈다. 그때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평소에는 이 친구를 더 놀리던 뉴질랜드 아이들이 갑자기 이 친구의 수호천사가 되어 쫙 나타난 것이다. 그 친구를 옹호하고 아시아 친구를 비난했다. 그때 들었던 건 'Fucking arrogant Asian'"

이전에도 인종차별을 겪었다고 들은 적은 있지만 아들이 이렇게 세세히 말한 적은 없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인종차별’, 엄마가 상처 받을까봐 말하지 못했다는 인종차별 때문에 아들은 뉴질랜드에서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캐나다에서는 홈스테이로 갔기 때문에 역시나 친구를 사귀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처음 4달 동안은 친구가 없어 많이 외로워했지만 크리스마스를 지나면서 베프가 생겼다. 그 때 이후로 캐나다 생활에서 아플 때 빼고는 쓸쓸하다는 말을 거의 한 적이 없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바빴다. 주로 같은 영어수업(ESL 코스)을 듣는 아이들과 어울렸는데 아프리카에서 온 난민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람들은 따뜻한 것 같다. 가족 간에 정이 끈끈하고 친구를 가족 같이 생각해준다. 친구가 어려움을 겪으면 자기 일같이 나서준다. 마음이 훈훈한 아이들이라서 아들이 덜 외롭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인종차별도 겪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없었다. 시내의 큰 쇼핑몰 같은 곳에서 지나가듯 들었다. 몇 번 되지 않았고 가만히 있지 않고 친구들과 합세해서 대응했기 때문에 뉴질랜드처럼 상처가 되진 않은 것 같다.

여학생에 대한 접근도 많이 발전했다. 처음에 캐나다에 가서 마음에 쏙 드는 여학생에게 속만 끓였지 한마디 말도 걸지 못했는데 2년이 돼가면서 여학생들에게 말걸기는 선수(?)가 되었다.

11학년 2월에 국제학생들끼리 겨울캠프를 갔다. 처음 보는 멕시코 여학생이 한명 왔다. 혼자 와서 어색한 여학생에게 다가가 말도 걸어주고, 함께 스노우보드도 타면서 친해져, 자신의 학교에 1일 체험학생으로 오라고 초대까지 하고 연락처도 받았다. 아들을 친구같이 대하는 국제학생 관리자 선생님께서 전화번호 따는 아들을 보고 짓궂게 웃으면서 “Animal~” 이라고 했다고 하니 이제 아들이 능글능글 짐승남이 된 건가?

 

아들이 보는 캐나다 교육의 최고의 장점

아들이 캐나다 학교에서 늘 최고의 장점으로 꼽은 것은 뭘까? 바로 ‘체벌금지’였다. 체벌에 유난히 민감했던 아들은 선생님의 체벌뿐만 아니라 학생들끼리의 폭력도 완전히 금지된 교육을 최고의 교육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들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 : 왜 캐나다에 도로 가고 싶어?

아들 : 한국이 캐나다 교육 같으면 여기서 학교 다니지.

나 : 캐나다 교육이 뭐가 좋아?

아들 : 안 때려서

나 : 다른 건 없어?

아들 : 음~~ 학교가 일찍 끝나서

나 : 또 없어?

아들 : 공부가 할 만 해서.

 

공부가 어떻게 할 만한 지 물었다. 아들은 세 가지로 답했다.

첫째, 자신이 하고 싶은 과목을 선택할 수 있어서

둘째, 시험을 많이 치르지 않아서(보통 6-7과목 수강에 시험은 4-5과목)

셋째, 이해가 잘되게 가르쳐줘서. 모르면 알 때까지 물어봐도 혼내지 않아서

아들이 처음 뉴질랜드에 가자마자 그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다고 한 이유도 바로 체벌이 없어서였다. 캐나다 교육의 최고 좋은 점도 역시 ‘체벌금지’를 들었다. 그만큼 한국 학교에서 당했던 체벌은 가장 뜨거운 상처였던 것이다. 체벌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도 거부했지만 다행히 선생님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렇게 말했다.

“나만 맞은 것이 아니라 아이들 모두 같이 맞았는데 뭐. 불공평하게 맞은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맞은 거잖아.”

선생님이 체벌을 공평하게 집행했으니 원한이 맺힌 것 같진 않았다. 체벌은 확실한 폭력이다. 선생님께서 그 폭력을 당당하게 사용하는데 아이들은 어떨까? 학교 현장에서 허용된 폭력은 친구와의 갈등상황에서 서슴없이 사용해도 문제가 된다 느끼지 않아 가책을 받지 않는다. 아이들이 선생님의 당당한 폭력을 전수받는 것이다. 아들은 특히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진 폭력에 민감했다. 자신이 당하는 것에도 괴로워했지만 그런 폭력이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아주 힘들어했다. 그래서 늘 한국학생들이 없는 곳을 고집했던 것이다.

예전에 미국에서 살던 사람이 해준 이야기가 있다.

“제가 시애틀에 있을 때, 조카 두 명을 시애틀 지역 사립학교에 입학시키고 잠시 데리고 있은 적 있는데요. 아시다시피 학교 숙제 중에 작문(에세이) 써가는 게 많잖아요. 근데 왜 그리 한국 학교에서 몽둥이로 맞은 이야기가 많은지... 제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해서 ‘얘. 뭐 좀 다른 쓸거리는 없니?’ 하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아이 왈 ‘맞은 기억밖에 안 나요. 아~ 나요. 욕설난무. 단체기합.' 그게 다라고 하니... 아....“

그동안 체벌이라는 폭력을 교수방법으로 택했던 많은 선생님들. 지금은 어떠실까? 2010년 2학기부터 곽노현 교육감이 회초리 1대만 때리는 체벌까지도 금지한다는 방침을 밝혔었는데... 교육감이 바뀐 지금 그 방침은 계속 유지되고 있을까? 전 세계적인 흐름이 학교체벌금지로 가니까 한국도 그렇게 갈 수 밖에 없을 거다. 아쉽다. 곽노현교육감이 한 5년만 일찍 나타났어도 아들을 멀리 떠나보내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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