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역사 인류의 역사

오늘날 우리가 처한 노동현실, 그저 그 현실에 매몰되어 우리는 ‘왜 이렇게 허덕여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과 함께 그 현실로부터 조금 거리를 둔 채 질문의 뿌리를 더듬어가다 보니 좀 더 거시적이고 근원적인 여러 문제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노동행위는 생존을 위한 지극히 현실적 문제이지만, 한편으론 복잡한 구조적 문제들이 함께 설명되어야 하는 철학적인 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가치, 삶의 가치와 함께 인간의 노동을 성찰했던 학자들(마르크스, 베버 등)의 논리를 깊이 들여다볼 기회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이라는 한 시점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있는 현상들의 구조를 이해함에 있어 거창한 이론들이 자칫 논리의 기형적 상황을 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론들 중 일종의 상식처럼 일반화된 부분을 기반으로 그저 ‘오늘날 노동의 모습이 왜 이렇게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게 하는지’에 대한 현상부터 따라가 보기로 했다. 비록 근본적이고 체계적 접근에 미흡할지라도 암담한 현실에 놓인 한 노동인격체로서 막연하게 순응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지의 질문에 그 단초라도 인식하고 이끌어내는 것에 나름 만족하면서.

앞서 ‘[Ⅰ]노동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통해 노동력을 생산해내는 주체인 인간이 노동의 과정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어 [Ⅱ]에서는 오늘날 인간이 만들어내고 있는 노동임에도 그에 대해 주체적이지 못한 채 구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산업의 발달 과정 에서 그 구속의 강도와 형태가 어떻게 강화되고 구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Ⅱ-1  노동에서 직업으로

오늘날 노동은 대체로 ‘직업’의 형태로 존재한다. 「노동」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또는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로 다소 포괄적 개념이다. 그에 비해 「직업」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라는 다소 제한된 범주의 개념이다. 즉 직업이란 ① 적성, 능력이라는 자신의 능력 중 일정 부분을 활용’하여 ② ‘일정한 기간만’ 종사하게 되는 어떤 프레임 안에서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결국 직업으로서의 노동이란 생계 유지를 위해 무작정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1) 자신의 소질이나 능력에 맞는 부분(적어도 대의적으로는)을 선택’하여(분할된 어느 한 분야의 일부) (2) ‘일정한 기간 동안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만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는 다시 말해 (1)사회화로 분할된 어느 한 분야의 부속으로 일할 수밖에 없으며 (2)내가 원하면 ‘언제든지’가 아니라 ‘자본과 약속된 기간 동안’만 그 ‘계약을 통해’ 일을 할 수 있다는 ‘조건부 노동’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노동이 자신의 생존을 위한 직접적인 행위가 아니고 누군가 다른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타인을 위한 행위이고, 그 노동을 제공한 자신은 노동력에 대한 대가(임금, 급여 등)를 지급받은 뒤에야 비로소 시장에 나가 자신에게 필요한 생필품(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진)을 구매하여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과거로 거슬러 가보면 채취나 경작 수준의 물자들을 공개된 시장에서 서로 교환하기 시작하면서 시장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장은 단순히 물물교환으로 그치지 않고 집단적 제조과정에 대한 관심과 함께 노동력의 교환으로까지 확장된다. 이처럼 시장의 요구와 함께 규모가 커지면서 점차 자본이 개입되고 정책(법과 질서 등)도 입혀지면서 시장 구조는 더욱 견고해졌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①노동시장에서 요구되는 적성, 능력이 충족되지 못한 개인은 어떻게 생존해야 할까. 그리고 ②근로계약 기간이 종료되는 순간 이 프레임의 작동에서 제외되는 기간(잠깐이든 지속적이든) 근로자는 어떤 심리상태를 경험하게 될까. ③왜 우리는 이런 불안정한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효율적 생산이라는 이름 하의 노동 통제는 촉매제로서 작용하는 기술의 발달과 함께 더욱 심화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직업의 의미는 더욱 강조되었고 자본의 끝없는 이윤추구 동기와 맞물려 움직일 수 없는 견고한 체계로 자리 잡게 된다. 생존을 위한 인간의 행위가 왜 이렇게 복잡해졌을까. 그리고 우린 도대체 왜 이런 불편한 시스템을 선택하게 된 것인지 새삼스럽지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노동의 사회화 이후(대체로 산업화 이후) 노동의 형태와 위치는 많은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사회화 이전의 노동이 전적으로 노동을 행사하는 사람의 것이었다면 사회화된 이후 노동은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상품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상품구매자(자본)에게로 구속된다.

이처럼 개인의 노동이 어떤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상품화된 계기는 또한 무엇이었을까. 노동의 상품화는 과거 신분사회에서의 종속노동 형태로부터 새로운 자본가 그룹이 주도한 산업화 과정에서의 노동 사회화와 함께 시작된다. 사회화의 기반인 자본(생산시설을 소유한)에 의해 구현되기 시작한 효율성, 생산성이라는 의미엔 이미 노동의 상품화와 함께 노동 착취의 가능성도 내포되어 있었음을 우리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계급사회의 전인격적 종속노동이나 삶과 노동이 일체로서 가까이 있었던 자급자족 노동에서는 노동이 그 생산물에 대한 직접적 주체였지만(그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을 뿐), 이후 사회화 과정에서 노동은 한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무한경쟁의 장으로 나오게 된다. 평등하고 독립적인듯한 외형과 달리, 노동은 자본에게 상품화, 종속화 되면서 선택(노동의 질, 제공의 기간)의 대상이 되었고 자본의 이익실현 수단으로 이용된다.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것은 그 이익추구행위의 과정일 뿐인 것이다.

오늘날 노동은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그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까지 찾게 되었다. 직업이란 생계를 위한 생산의 과정을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나누어 수행하기로 한 일종의 공동생산에 대한 약속에서 시작된 것임에도 그러한 ‘직업’에서 정체성을 찾게 되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Ⅱ-2  자본에 종속되는 노동의 속성

1.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이 질문에는 두 가지 보편적인 답이 있다.

첫째   ‘그래야 하니까’    둘째   ‘일하고 싶기 때문에’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 Kathi Weeks>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의 삶을, 우리의 노동을, 우리의 정체성까지를 이러한 프레임(규칙, 형식) 안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사고하고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케이시 윅스」는 이 질문에 대한 첫째 답(그래야 하니까)에 대해, 일부의 사람들은 어디서 일할지 선택할 수 있겠지만, 임금노동에 기반한 경제에서 구체적 고용조건의 상당 부분을 직접 결정할 힘이 있는 사람은 드물며 일을 할지 말지 자체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보다 더 드물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조에 대해 칼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했다.

예전의 화폐 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서가며, 노동력 소유자는 자본가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의미심장하게 웃음을 띠우면서 바쁘게, 후자는 머뭇머뭇 마지못해서 마치 자기의 가죽을 팔아버리고 이제 무두질당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처럼.           <자본 Ⅰ-1, 칼 마르크스>

 

일할 의지를 강조하는 두 번째 답(일하고 싶기 때문에)에 대해서는, 일단 일은 수입뿐 아니라 삶의 의미, 목적, 짜임새, 사회적 결속, 그리고 인정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그렇게 긴 시간 정체성까지 쏟아 붓는 요구에도 갈등을 느끼지 않는 것)을 구조적 강제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면서, 수많은 사람이 어떻게, 왜, 무엇을 위해 이런 의무를 받아들이고 지키며 살아가는지에 대한 납득할만한 동인이 있어야 하는데 노동윤리라는 공식적인 도덕률이 그 중 하나라고 말한다.

즉 자본주의 정신의 근간이라고 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종교개혁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서 노동에 새롭고도 강력한 지위를 부여해 주었는데 이 새로운 윤리는 무엇이 일이며 일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인식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일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독특한 개념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이전에는 ‘본래 노동자는 더 많이 돈을 벌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지내온대로 살고싶어 하고 그런 목적에 필요한 만큼만 벌고 싶어 하는’ 보수적인 노동특성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막스 베버」는 이를 '전통주의’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이 전통주의적 태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대체되면서 일 그 자체를 절대적인 목적, 즉 소명으로 여기고 헌신하게 되었고 오늘날 일 자체가 우리 삶의 중심적 의미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흥미롭기도 하다.

많은 학자들은 근대 유럽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생을 프로테스탄티즘 특히 칼뱅주의의 교리 하에서 금욕(禁慾)과 책임감과 같은 종교적 생활태도와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으로 인해 비로소 노동과 이윤추구 행위가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고 이러한 금욕적 생활과 저축 관념의 토대는 근대적 자본축적에 유리하게 작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축적되어 온 자본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점차 고도화되어 왔고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노동윤리, 노동의 구속형태도 변화하게 된다.

노동 효율성을 위해 근로자의 근로의욕을 높이고 능률을 증진시키는 작업관리의 방법으로 등장한 테일러시스템(Taylor system)은 포드주의시대에 널리 활용되기 시작한다. 시간연구와 동작연구를 기초로 하며 임금을 작업량에 따라 지급하는 등 합리적 작업과정을 연구하는 과학적 관리법은 인간 행동이 표준화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당시 노동의 구속은 주로 인신에 대한 것이었다.

이후 포스트 포드주의, 즉 제조업의 전형적 작업관리 형태에서 서비스 산업으로의 이동과 함께 이행된 탈산업화 시대의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노동윤리는 육체적 구속만이 아닌 감성, 창의성, 헌신 등 보다 전인격적인 부분에까지 확대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오늘날 일(노동)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거나 인생(커리어, 프로페셔널, 성공 등) 자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려면 노동이 자본의 요구에 어떤 식으로 구속되어 왔고 노동의 급부인 임금, 그리고 소비의 과정과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종교 개혁의 시기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출현과 함께 탄생한 노동윤리가 어떻게 근대사회를 노동사회로 만들어냈으며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서 노동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것 말이다.

 

2.  노동의 종속은 속성인가, 프레임인가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인간에게 새로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프로테스탄트 윤리, 인간이 가져야할 보편적인 자세로 인식되기 시작한 이 윤리가 산업사회의 과정에서 일(노동)에 대한 태도에 어떻게 내면화하게 되었는지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

프레임(Frame)은 인간이 성장하면서 생각을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생각의 처리 방식을 공식화한 것으로, 인간은 어떤 조건에 대해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프레임을 '마음의 창'에 비유되곤 한다. 이는 어떤 대상 또는 개념을 접했을 때 어떤 프레임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이 바뀌기 때문이다.     <위키백과>

 

미국의 언어학자 레이코프는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며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우리가 짜는 계획,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 행동이 좋고 나쁜 결과를 결정하며 정치에서 프레임은 사회 정책과 그 정책을 수행하고자 수립하는 제도를 형성한다.”면서, “~ 합리적인 사람들은 모두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인간의 두뇌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데, 이는 한번 자리 잡은 프레임은 웬만해서는 내쫓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앞서 인간에게 불리하면서도 복잡한 노동 조건으로의 상품화를 당연시해온 우리의 노동과 노동윤리 역시 이러한 프레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도 세력은 그들이 원하는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견고한 장치를 개발해 왔듯이 노동의 구속을 이 프레임 안에서 이해한다면 어떨까.

오늘날 자본(기업)의 이윤창출과 그 극대화를 위한 노동자(직원)에 대한 프레임 개발은 지속적이다. 그들의 직원을 회사의 주인처럼 생각하도록 만들기도 하고(삼성맨, 엘지맨 등), 성과 경쟁을 통해 성공한 영웅으로 만들어 내기도 하며, 일은 곧 인생이라는 프레임으로 개인들을 오로지 일에 매진하게도 만든다. 해고되거나 은퇴하는 어느 순간 그러한 모든 지위라는 것은 한낱 모래위의 성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왔던 현실을 늘 목격해 왔던 그들을 말이다.

그렇다면 그 프레임 속 자본과의 관계에서 노동이 항상 약세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인간은 자신의 기본 생존권을 담보하고 자본은 자신의 잉여 소유분(자본)을 가진 채 담판을 하게 되는(고용계약, 근로계약 등) 구조적 한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은 그 기본적 프레임을 의심하기보다 여전히 내면화된 노동윤리(책임감, 소명의식)에 안주해 왔고 때로 그 안에서 위안 받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3.  노동의 종속 프레임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그 종속성 프레임 안에서 노동하고 생산하고 소비하는 패턴을 당연시 하고 있다. 이는 구조에 대한 오해도 오해지만 이러한 형식의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견고한 자본주의 속성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 노동의 상품화 의미는 그 노동이 거래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내포한다

산업사회는 형식상 노동력을 인격체로부터 따로 떼어 상품화하는데 성공했다. 즉 과거의 생산주체와 달리 현재의 노동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채 그 소속(직장)을 선택하는 독립적 형태를 띠게 된다. 그러나 그런 독립성은 시장에서 선택되지 않으면 홀로 이 사회 시스템 밖으로 소외될 수도 있다는 항시적 두려움의 상황도 함께 내포하고 있었다. 즉 외형상 노동력 제공여부는 온전히 개인의 선택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노동 강도, 노동제공 수단, 노동력 제공 형태 등 모두 우리의 선택 영역 밖에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자본이 가진 경영권이라는 포괄적 고유권한만이 행사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균형성을 보완하기 위해 집단적 노사관계를 설정했지만, 근로조건의 소극적 방어에 그치고 있을 뿐 노동력 제공의 동등한 주체로서의 지위는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경영부분에 근로자가 참여할 수 있는 선진적 제도의 하나로 알려진 독일의 노사공동결정제도 역시 노동이 시장에서 거래된 이후에나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2) 선택된 노동은 자본의 생산시설로 귀속된다

노동력을 가진 개인이 그 노동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자연이 아닌 자본이 만든 가공된 물적 기반위의 생산요소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과거에도 노동자는 지배계급이 만든 제도 아래 놓여 있었지만 지금의 구조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인간이 경제시스템의 구성원자로서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시스템 밖으로 나오게 되면(해고, 실업 등 상태) 폐품처리 되고 철저히 버려지는 구조이다.

상품은 시장에서 가치로 설명된다. 그 가치의 증식을 위해 자본은 차별보상을 통한 노동자들간 경쟁을 유도하여 새로운 노동계급을 형성하였고, 이 어마어마한 임금격차는 곧 그 계급의 공고함을 말해주고 있다(미국의 경우 노동자간 임금격차가 380배). 즉 노동자의 최고 위치에 전문경영인(노동법상 근로행위는 아니지만 생산활동을 총 지휘하는 위치로서)과 같은 자본가의 대리인 계급이 생겨났는데, 이는 노동의 위치가 갈수록 취약해져가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들간 알아서 관리체계가 형성되고 자본가는 결과물만 가져가게 되는 이 성과경쟁체제가 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임금은 물론, 저임금 지급 체제에 대한 합리적 근거로 오늘날 널리 채택되고 있다.

(3) 잉여가치 생산을 위해 과잉노동은 필연적이다.

과거 생산자와 소비자가 일치하던 시대에는 전적으로 본인의 결정으로 본인이 소비하고 싶은 양만큼 일하고 생산했다. 그러나 이후 생산자(기업)와 소비자(개인)가 구분되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양 이상을 생산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시장은 전체적인 필요 소비량을 예측해야 하고 그에 맞는 생산량을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생산과 소비 사이의 시간적·공간적 간극의 상황을 예측하는 과정에서 자본은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더 많이 팔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된다. 이에 판촉, 광고 등이 동원되고 더 많은 상품을 팔기 위해 새로운 소비패턴까지 주도하게 된다. 즉 판촉, 광고 등은 기본적인 필요소비량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새로운 소비패턴 역시 소비량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

즉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적 소비량 이상을 소비시키기 위한 새로운 산업의 등장, 그리고 상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한 새로운 소비 형태의 창출 등 복잡한 과정으로 이행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위해 더 많은 노동의 희생이 필요했으며 개인 역시 필요이상의 소비를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에서의 잉여생산의 가치는 자연히 부의 이동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즉 과거 우리에게 필요했던 이상의 과잉노동이 불가피한 구조적 상황에 있는 것이다.

최근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AI로봇의 출현으로 인간의 노동력 상당부분이 불필요해질 수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과잉노동을 대체할 인공지능 로봇시대, 인간은 이 과잉노동에 짓눌려 삶 전체를 노동에 바쳐버렸지만 그마저도 로봇에게 빼앗길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인간 삶의 근간이 되어 있는 이 자본주의 프레임과 그 프레임 위의 삶의 패러다임을 하루빨리 전환해야 할 상황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실험적 생산 조직은 필요한 생산물을 스스로 공급할 수 있는 체제에 대한 긍정적 시도로 보인다. 다양한 삶의 가치와 패턴이 가능한 사회에서는 AI 로봇의 출현에도 일부 자본이 인류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극단의 상황을 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Ⅱ-3  이윤추구 동기와 성공의지의 만남

1.  자본은 노동력을 어떻게 구속·강화해 왔는가

자본의 속성인 더 많은 이윤추구 동기로부터 노동에 대한 착취는 설명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성공하려는 동기는 단순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윤추구 동기와 성공의지는 서로 만나 무한 경쟁이라는 괴물을 낳았고 오늘날 경쟁에서 도태되거나 뒤처지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능력 부족에 대해 자책감까지 갖게 되었다.

오늘날 경제활동은 엄밀히 말하자면 생존을 위한 활동을 넘어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한 활동으로 변해왔다. 물론 자본은 처음부터 더 많은 소유에 대한 동기에서 출발했고 소유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경쟁이 필요하였으며 경쟁에서 이기려면 타인을 통제할 수준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자연히 계급이 형성되었고 오늘날 노동은 자연히 계급 형성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자본의 힘, 경쟁관계, 이는 이미 단순한 소유의 개념을 넘어 이미 계급(계층) 사회를 예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간접민주주의(대의제)에서 대중은 투표행위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듯이, 직접 생산소비의 시대로부터 간접 생산소비 사회가 되면서 우리가 경제활동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철저한 자본의 논리 하에 개인이 관여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개인이 고려되지도 않는다. 소비시장이 대중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는 그럴듯한 해석과 달리 실제로는 자본이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필요한 생산량을 스스로 예측했던 직접 생산시기와 달리, 오늘의 경제사회에서는 내게 필요한 소비량을 화폐가치로만 대략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화폐의 가치는 전체 생산물량에 따라 등락하는 속성이 있어 안정적이지 않기까지 하다. 경제활동의 과정에서 개인들이 겪는 실업, 저임금 문제, 원하지 않는 소비(자본이 만들어낸 각종 물품이 이미 우리 생활을 점령하고 있음) 등 상황도 우리 개인들 영역 밖에 있으며 경제생활에서 우리는 주인인듯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2.  종속 노동은 어떤 형태로 변하고 있는가

노동의 종속은 크게 산업 유형에 따라 세 가지 패턴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생산이 산업화되기 이전 생산자와 소비자가 일치하는 시기가 그 첫째 유형인데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물자의 규모와 생산을 스스로 결정하고 소비하던 시대이다(물론 생산력이 주로 자연에 의존적인 시기이기도 했지만).

이후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이 자본의 통제 아래 놓이기 시작하는 수공업(공장제) 시대는 분업의 개념이 처음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작업장에서 사업주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게 되는 두 번째 패턴이 된다.

이어 도래하는 공장제 기계공업 형태의 공장 노동체계(이른바 포드주의 형태)는 노동을 컨베이어 벨트 등 기계의 매커니즘에 맞추면서 노동 시간, 생산 과정 전반에 걸친 노동과정 통제를 통한 생산성 증대가 주요 목표인 시대로 두 번째 패턴이 더욱 견고해지는 시기에 해당할 것이다.

세 번째 패턴은 기존의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체제로의 이행과 함께 노동에 대한 요구에도 급격한 변화가 시작되는 시대(포스트 포드주의라고도 함)의 노동이다. 즉 기존 노동의 구속이 인신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 시대의 노동에 대한 요구는 창의적이고 보다 주체적인 노동이기를 원하게 되는데 이는 무한경쟁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산업 구조(상품의 다양화, 파생의 무한 확대)로 인해 요구되는 새로운 노동상인 것이다.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의 확장으로 생산의 다양화는 물론 소비 패턴의 다양화로 이어져 왔고 노동 제공의 형태 역시 시간제, 기간제, 하청, 도급, 용역, 파견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면서 팽창해가고 있다(우리나라 비정규직 비율 32.8%, 통계청). 그렇다면 왜 이처럼 비정규 형태의 고용이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 동일한 수준의 노동력을 원하면서 사업주로서의 법적 책임에서는 자유롭기를 원하는 자본에게 이러한 저임금 구조는 이윤극대화에도 공헌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자본주의 이윤추구라는 것 자체가 무한성장을 전제로만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지속적일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비용절감을 위한 고용형태가 필요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시간제, 기간제 등 고용형태는 생산의 번한에 노동력을 맞추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는 만큼 근로자의 여가를 대가로 하는 구조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용역/파견/하청과 같은 노동력 제공형태도 역시 직접 고용에 따른 자본의 부담을 약자인 중소기업에 떠맡기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심지어 갈수록 늘고 있는 1인 사업자(특수고용의 지입차주, 학습지 교사, 보험 판매원 등)에서 사내하도급(같은 일을 시키면서 반대급부인 근로자에 대한 의무는 면하려는)으로까지 자본의 노동을 통한 이익 극대화 노력은 끝이 없다.

 

향후 AI, 사물인터넷 등이 실현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보다 편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한계비용 제로사회로 가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과연 현실이 그렇게 흘러가게 될지는 여러 문제들로 인해 여전히 예측하기 어렵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산업현장이 기계로 대체되면 인간 삶이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기대가 멋지게 빗나간 경험이 우리에게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펴낸 <2016년 국민 인권의식 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인권침해비율 중 노동권 침해 비율이 제일 높다는 응답결과가 나왔다고 한다(한겨레신문, 2017.2.8).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노동 문제가 유독 취약하다는 점은 노동을 단순히 직업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이어지는 [Ⅲ]에서는 노동(일)이 성공의 도구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과 노동인권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진희 주주통신원  kimjh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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