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벌판의 밀림속에 독립군 기지를 만들기 위해 개간하고 농장 만들어

4. 백서농장에서 새로운 출발

비록 경학사가 해체는 되었지만 그는 어떻게든지 만주사람들로부터 우리 동포들을 지키자면 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만주지방으로 옮겨온 우리 동포들의 생활은 그들 자신이 못 배워 무식한 탓도 있었지만, 만주 벌판을 주름잡고 다니는 마적단의 약탈의 대상이었고, 원래 이 고장에 살아온 만주 사람들이 떠돌이로 생각하여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등 핍박을 받아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만주 벌판에서 떼 지어 다니면서 우리 동포들을 괴롭히는 마적들의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 왔었다. 너른 벌판에 흩어져 있다가 외딴집이나 주로 우리 동포들의 집을 습격하여 목숨을 빼앗기도 하고 재산을 몽땅 털어가기도 하는 것이었다.

“조선 사람들 돈 많이 가지고 있어 해, 우리가 마음 놓고 빼앗아도 말할 사람 없어해. 우리 마음대로 해도 돼.....”

이렇게 떠들기까지 하는 그들이었다. 우리 동포들은 피난민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습격하여 재산을 빼앗는다 하여 어디서 누구하나 아는 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약탈을 하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특히 중국 당국에서도 자기 나라 국민들의 일도 아닌데 신경을 쓸 일이 아니라는 자세였다. 이런 모습을 본 그는 어떻게든 우리 동포가 흩어지지 않고 한데 모여서 그들에게 약탈을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 교포 끼리 서로 돕고 안정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산업을 진흥시키고, 생산을 증가시키며, 교육의 발전을 도모하는 등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는 동포들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선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들이 뜻을 모아 단체적인 힘으로 협동을 통해서 해결 해가자는 자치기관으로 조직한 것이 '부민단'이었다. 부민단이란 ‘부여의 옛 영토에 부여의 후손들이 부흥결사를 세운다.'는 뜻으로 통화현 합니하에 본부를 두었다. 이 부민단은 유하현을 중심으로 해서 서간도지방을 관장하여 중앙, 지방, 구, 패의 4단계로 조직하고, 중앙에 서무, 법무, 학무, 재무, 검무의 부서를 두었다. 김동삼은 서무부장의 직무를 맡아서 교포의 자치활동과 독립운동의 기지를 확보하기 위한 실제의 어렵고 힘든 일을 처리하였다. 부민단의 초대 단장에 허혁, 2대 단장에는 이상용을 추대하고, 자신은 실무관리 책임을 맡아서 우리 동포들이 억울한 일이나,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힘을 썼다. 이 부민단의 활동은 1919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자치 활동과 교육 사업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무렵에 남만주에 이주해온 우리 동포는 수십만 명이나 되었고, 이곳에서 양성된 학생은 800여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어버이 노릇을 하다시피 한 김동삼은 부민단의 운영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그 중에서 중국인이나 만주인들이 우리 동포들을 대할 때 마치 떠돌이나 거지같은 대접을 하는가 하면, 자기들의 땅에 들어와서 자기들 몫을 빼앗아가는 불량배들이나 되는 것으로 여겨 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제가 만주 벌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살펴보니까, 우리 동포들이 모여서 삶의 터전으로 가꾸어 낼만한 땅이 몇 군데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바로 그거요. 우리들도 김동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소. 장백산 줄기의 깊은 산속이나 북만주의 취원장 들판 같은 곳을 우리들이 힘을 모아 개척을 한다면 아마도 우리 독립군 수십만을 기를 수도 있을 것 같으오.”

“제 생각도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동포들이 흩어져 있어서 마적들의 습격을 받고 만주 사람들의 핍박을 받으면서 일본인들에게 쫓기는 신세이니, 그들을 설득하여 흩어지지 말고 한데 모여서 살 수 있는 곳으로 모읍시다.”

“좋은 생각이오. 김동지가 그 일을 책임져 주시오.”

이상룡선생의 적극적인 후원을 얻은 그는 만주 동삼성 일대에 흩어져 사는 우리 동포들을 취원장으로 집단 이주시켜서 한인촌을 만들어 나갔다. 우리 동포들의 장래를 위해서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하여 황무지를 개척하기로 한 것이다.

1913년 새봄의 기운이 퍼지기 전에 그는 유랑민 같은 우리 동포들과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헌신 하겠다는 각오로 나선 이탁, 김창무 등 여러 동지들을 이끌고, 우리 민족의 영산이자 우리의 상징인 장백산(백두산)기슭의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 통화현 합니하 소북분이라는 곳에 스스로의 힘으로 땅을 일구어 농장의 주인으로 살길을 찾기로 하였다. 그는 이런 외진 곳에 터를 잡아 '백서농장'을 세우면서

“내가 이렇게 깊은 산골에 백서농장의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깊은 산골에 자리를 잡으면 적군의 눈에 띄지 않고 견딜 수 있으며, 임자 없는 땅이 끝없이 널려 있는 이곳은 우리들의 노력만 기울이면 얼마든지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어서 우리 동포가 살길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적의 눈을 피해 독립군을 훈련시키는 기지로도 훌륭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고, 동포들을 설득 하였다. 우리 동포들은 중국인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일본의 감시의 눈길 속에서 날마다 불안하고, 쫓기는 듯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수십 명의 청년들은

‘중국 사람들의 미운 꼴을 보지 않고, 일본의 눈을 피해서 산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좋으냐?’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깊은 산골짜기 속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걱정을 하면서 그를 따라서 백서농장으로 모여 들었다.

“아니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따라 가겠다는 거여? 호랑이가 우글거리는 곳에 가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알기나 하고 가야 할 거 아닌감.”

“그렇다면 여긴 우리가 마음 놓고 살수가 있는 곳이에요? 일본놈들의 눈길이 따라 다니고, 중국놈, 만주놈들의 따가운 눈총도 못 견디겠어요.”

“그렇담 어쩔 수는 없는 것이제.....”

이렇게들 자신의 갈 길을 결정하면서도 자신감이 없이 그저 눈길을 피해서 들어가 보겠다는 식으로 모여든 것이었다.

이곳은 너무나도 깊은 산골이어서 누구나 가기를 꺼려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밀림속이라 차라리 독립운동의 기지로는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산속에서 마음 놓고 소릴 치면서 군사훈련도 하고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곳으로는 가장 알맞은 곳이었기 떄문 이었다. 김동삼은 피나는 노력으로 앞장을 서서 하늘을 가린 우거진 나무숲의 바다를 헤치면서 길을 만들고 농토를 만들어 가는 동안에 때로는 맹수들과의 싸움이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무를 베어서 울타리로 온 마을을 둘러막고서도 무서워서 밤에는 밖에를 나다닐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정도의 어려움에 무릎을 꿇고 말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농지 개간과 군사훈련을 통하여 독립의 일꾼을 양성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이곳은 너무 깊은 산골이어서 산짐승들의 공격이 끊이지 않아 일본군의 악착같은 추격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조국을 빼앗기고 멀리 타국까지 피난 온 그들은 아무리 짐승들이 극성을 부려도, 일본의 착취와 감시 밑에서 사는 것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보람찬 나날이었다. 그래서 산짐승이 무서워서 버려져 있던 이 고장은 우리 동포들에게는 자유로운 신천지나 마찬가지였다.

동포들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로 뭉쳐서 숲을 베고 땅을 일구어 농토를 늘리고 식량을 생산할 농작을 심어 가꾸었다. 우리 동포들이 땀 흘려서 개간한 농토는 차차 늘어나서 이제 중국인들에게 도움이나 지원을 요청하지 않고도 자급자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 부지런하고 알뜰한 우리 동포들이 이곳에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각오로 농토를 일구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농토를 일구면서도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 독립을 위하는 일이고, 산짐승과 싸워도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 또한 이것이 곧 자신과 가족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누구하나 게으르거나 꾀를 부리는 사람이 없어서 더욱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여러분의 노력으로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살아 갈 수 있는 땅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들이 힘을 길러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에 큰 몫을 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땅을 파는 것도 우리나라를 위하는 일이요, 싸우는 것도 또한 나라를 위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 나라를 위해서 큰일을 하려면 몸을 단련하고, 무술을 익히는 일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왜놈들을 우리나라에서 쫓아내고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는 다른 단원들보다 더 먼저 일어나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밤늦게까지 병법과 전술을 익히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단원들은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산짐승과 싸우고,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서 무술을 익혔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장차 우리 독립운동이 만주지방에서 무력투쟁을 중심으로 전개 될 때 가장 용감하게 싸운 독립군 용사가 되어 싸울 수 있도록 양성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무렵에 이곳의 우리 교포들은 민족정기를 이어받기 위해서 대부분이 대종교(우리 민족종교로 라철선생이 창시했으며 단군을 믿는 순수 민족종교이다. 지금도 서대문구 홍은동에 본산이 있음)를 믿었는데, 김동삼도 대종교에 입교하여 참교(대종교를 믿겠다는 서약을 한 후 6개월 만에 정식 교인으로 인정함), 지교(참교 후 1년이 지나 받는 교인의 지위), 상교(지교가 된 후 4년이 지나서 받는 지위)등을 지냈는데, 이렇게 대종교의 교인이 된 것은 종교를 믿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대종교의 단군을 모시는 신앙에서 민족정신을 배우고 길러가기 위해서였다. 이 대종교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이미 널리 알려진 서일이란 분이 계셔서 종교활동을 빌어 우리 동포들을 한데 모아 '중광단'이란 조직을 만들어서 무력으로 일본에게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그는 서일을 찾아가서 군자금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중광단이 운영하는 「사관연성소」의 지도자 김좌진장군과 이범석장군이 대종교와 서일이 지도하는 중광단의 넉넉한 자금지원을 받아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이 자랑하는 만주의 정규군 2개 연대를 전멸시키는 큰 승리를 하도록 해주었던 분들이었다.

“선생이 장백산의 밀림 속에서 젊은이들과 힘을 모아 백서농장을 개척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과연 거기에 우리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 할 만하였습니까? 한 가지 일도 벅찬데 농사지어 동포들을 먹여 살리면서 군사를 길러 독립운동을 하겠다니 과연 멋진 계획입니다. 정말 좋은 결과를 얻을 수있겠습니까?”

서일은 김동삼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그 동안의 노고에 대해 칭찬과 경과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가만히 서일을 바라보면서

“아직은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선 당장의 눈앞의 일에만 정신을 쏟을 것이 아니라, 먼 앞날을 내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일본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우리의 기지를 마련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불타는 듯한 눈으로 서일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에서는 신념의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선생의 말이 옳소. 우리가 지금 필요한 것은 백서농장과 같은 요새를 가지는 것이오. 이 너른 만주 벌판이지만 우리가 독립운동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안전한 곳에 우리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것은 나도 동감입니다. 다만 사정이 허락 될는지.....”

“고맙습니다. 백포 선생!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동의를 해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사정이 허락해야 한다는 말씀에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나라를 잃고 쫓겨나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투쟁을 하는 마당에 사정이 허락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떤 난관이 닥치더라도 개척을 하여 우리의 기지를 마련해 나가야지요.”

백포 서일은 일송선생의 투철한 투쟁 정신이 남다르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든든하여지고, 참으로 옳은 지사를 만났다는 기쁨이 백포 서일의 가슴에 차오르는 것이었다.

“그렇소! 일송선생의 말이 옳소. 일송 같은 투사가 열 명만 있다면 우리의 독립은 한발 앞서 다가올 것만 같으오.”

서일은 무릎걸음으로 일송에게 다가앉으면서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상당한 자금을 쥐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선

“우리 서로 힘을 합쳐 우리의 독립운동을 승리로 이끕시다. 우리 중광단도 앞장서서 나설 것입니다. 우리 서로 힘을 합쳐 싸워 나갑시다.”

“그래야지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동포 모두가 한 덩어리로 뭉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만주뿐만 아니라 연해주의 동포들까지 모두 힘을 합친다면 우리는 결코 작은 힘이 아닐 것입니다.”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고 놓을 줄을 몰랐다. 한동안을 이렇게 동지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조국의 광복이 다가서는 것을 느끼는 듯하였다. 뒷날을 약속하고 작별을 나눈 일송은 서일에게서 받은 군자금으로 총과 탄약들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드디어 우리도 무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일송 선생의 이 한마디로 백서농장은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와아, 백서농장 만세!”

“일송 선생 만세!”

까지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반가왔으면 임금에게도 안하는 만세를 일송 선생에게 보냈겠는가? 이때까지 우리나라는 중국을 큰 나라로 섬기는 버릇이 있어서 중국의 천자에게는 만세를 부르지만 우리나라의 임금님께는 '천세'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는 호랑이도 마적들도 무섭지 않다. 이젠 나타나기만 해봐라. 우리가 본때를 보여주고 말테니까!”

말로만 배우던 총을 직접 쏘아보고 총을 들고 총검술을 배우는 젊은이들의 가슴에는 용기와 기어이 독립을 되찾고 말겠다는 결심이 물결치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 동포들은 4년 동안에 낮에는 많은 농토를 일구고, 밤에는 독립군을 훈련시키는 일을 계속하여 우리 동포들이 자신이 지은 농사로 식량을 해결하고 또 모두가 체력을 기르고, 무술을 익혀서 독립투사로서 모자람이 없게 되는 등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때 그는 벌써 마흔을 바라보는 장년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한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 이었다. 그는 땀과 피로 얼룩진 이 어려운 일을 사람으로서 해낼 수 없을 만큼 남다른 노력으로 온갖 시련과 난관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고 있었다.

*출처 :  전자책 [일송정 푸른 솔은(저자 김선태)] 원본 파일    http://www.upaper.net/ksuntae/1078147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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