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 독립운동을 위한 정부를 만들어 우리 동포끼리 뭉쳐야 한다 외쳐

이듬해(1919년) 3.1운동의 물결이 만주까지 불어 닥치자, 만주에 있던 우리 동포들도 모두들 독립을 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만세 운동이 온 만주 벌판으로 마른 벌에 불 번지듯이 퍼져 나갔다. 그는 일개 지역의 한인 자치단체인 부민단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해서 부민단를 해체하고 좀 더 큰 조직을 만들었다. 1919년 4월 유하현 삼원보에 모인 만주 일대 각 현(통화, 흥경, 환인, 즙안)에서 모인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들은 만주는 물론, 소련과 연해주지방 모든 지역을 한데 묶는 한인단체 총연합인 ‘군정부’를 설치하였다. 이는 독립선언을 한 우리 민족이니까 이제는 우리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름을 ‘군정부’로 한 것은 우리들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으려는 각오로 ‘군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을 정부’가 되겠다는 결심을 나타낸 것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비록 작은 부분이나마 우리 겨레끼리 모여서 활동을 함으로써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작은 조직으로 만족하지 말고 우리 겨레가 모두 똘똘 뭉쳐서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가 뭉쳐서 한인의 모든 단체를 한데에 묶어 봅시다.”

이제 까지 만주지방 교포들의 자치단체였던 ‘부민단’을 ‘군정부’로 대신하기로 하고, ‘부민단’에서 하던 모든 일을 군정부에서 맡아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치단체의 힘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한족회’를 조직하는 일을 시작 하였다. 한족회는 만주지방에 사는 우리 민족의 정부로서 우리 민족의 힘을 모아서 한 나라로 만들어 가는 계획의 실천 이었다. 부민단에서 하던 조직과 사업을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늘리고 더 보충한 것으로, 중앙에 서무, 법무, 학무, 재무를 두고 각 지방에 책임자로 총독을 두기로 하였다. 이것은 그 이름을 총독으로 해서 일본이 우리나라에 파견한 조선총독이라는 지위가 아주 형편없이 조그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한족회에서의 총독은 한 지방의 면장 정도의 벼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조선총독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보면 일개 면장 정도의 보잘것없는 지위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앙기관은 삼원보에 두고 총장에 이탁, 김동삼은 서무부장을 맡아 그 운영에서 실지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처리하고 회의 책임을 거의 맡다시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동포들을 위해서 우리 동포들의 소식과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일제의 압박 이야기를 알리는 ‘한족신보’를 발간하여 우리 동포들에게 조국의 소식과 아울러 애국정신을 불어 넣어주는 등 새로운 활동들을 하기 시작 하였다. 이 기관지는 나중에 ‘새벽달’로 이름을 바꾸어 발행이 되었으며, 항일혁명운동의 지도서가 되었다. 또한 한족회에서는 우리의 힘으로 조직된 군정부의 재정을 부담하기 위하여 남만주 일대의 교포들에게서 의연금을 거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돈을 내어서 독립운동을 돕게 된 것은 3.1운동 등으로 만주에 있는 동포들도 독립을 위해 힘을 합해야 한다는 새로운 분위기가 이루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일송정<구글이미지 캡쳐>선구자의 대표적인 유적지

군정부'의 조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독립을 위해서 직접 나서서 싸우는 일을 맡아서 일본군에게 무력으로 항쟁하는 군정과, 교육, 산업 등을 지도하여 동포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일을 맡은 민정이 있었다. 석주 이상용이 독판이 되고 일송은 참모장 겸 서무부장을 맡아서 역시 실제적인 일은 거의 그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4월에 접어들자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차지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나라를 되찾아서 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부터 정부를 만들어 저들을 물리치는데 앞장을 서야 한다’

이것이 임시정부를 만든 목적 이었다. 우리 민족의 앞날을 위해 해외에서나마 독립을 선언한 우리의 정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지도자들은 상해에 임시정부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첫 돌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등의 이름으로 일본에 전쟁을 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하고 나선 임시정부는 모든 민족지도자들의 동의를 얻어 출발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각 지역의 대표들을 뽑아서 추천을 하여야 하였고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나라의 모습을 갖추어야 했다.

만주에서 군정부를 조직하여 우리 동포들의 힘을 한데 모으고 있던 만주의 지도자들은 만주지역의 대표로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조성환, 그리고 일송선생을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시키기로 하였다.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에는 각 지역에서 모인 대표들 가운데 29명의 의정원 의원을 뽑았다.

이 때 뽑힌 의정원의원의 명단은

김대지, 김동삼, 김 철, 남형우, 백남칠, 선우혁, 손정도, 신석우, 신익희, 신채호, 신 철, 여운형, 여운홍, 이 광, 이광수, 이동녕, 이시영, 이영근, 조동우, 조동진, 조성환, 조소앙, 조완구, 진희창, 최근우, 한진교, 현 순, 현창윤 (가나다 순)

이렇게 뽑은 초대 의정원의원들은 4월 10일부터 회의를 열어 국무총리와 각부 장관을 뽑는 투표를 하여 정부의 조직을 완성하였다. 이때 뽑은 우리나라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 일송정 표지석<구글이미지캡쳐>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차장 신익희,

외무총장 김규식 차장 현 순

재무총장 최재형 차장 이춘숙

법무총장 이시영 차장 남형우

군무총장 이동휘 차장 조성환

교통총장 문창범 차장 선우 혁

국무원 비서 조소앙

그러나 이렇게 힘들게 조직된 임시정부가 각 지역의 대표들 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서 점차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 첫째 원인은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뽑혔어도 상해로 오지도 않고 미국에서만 주로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이라고 명함을 찍어가지고 돌리는 등 독자적인 활동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이 있었다. 거기다가 나이가 많은 지도자 이동휘가 소련 공산당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등 공산당을 따르는 지도자가 있어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꼴을 보고 있던 일송은

“여기서 이처럼 허송세월만 보낼 수는 없소. 나는 차라리 만주로 돌아가서 무장독립군을 조직하여 일본과 맞서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오.”

하고, 곧 만주로 돌아갔다. 많은 동지들은 그에게

“만주에 가서 할 일도 있겠지만 이곳에 남아서 우리와 같이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잡고 일합시다. 동지 같은 사람이 필요하오.......”

하고 한사코 만류를 하였으나, 일송은

“내 자신이 할일은 이곳보다 만주에 있다고 생각하오.”

하고 뿌리치고 만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가 할 일은 만주에서 흩어진 우리 동포들을 한데 모으는데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동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모두 한데 뭉쳐서 저 악독한 일제의 압박을 이겨내고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을 성취하도록 까지 굳게 뭉쳐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가 가기 전에 차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상해 임시정부에서

“우리나라 주권의 대표적인 존재가 임시정부이므로 군정부가 세워져 두 개의 정부가 되어 서로 힘을 합하지 못하면 도리어 일본에게 도움을 주는 결과가 될까 염려 되니, 단독행동을 중지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가 모두 단결해서 임시정부의 이름 아래 활동을 해야 한다.”

는 요청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만주에서 따로 단체를 만들기 보다는 임시정부의 지도 아래 모두 힘을 모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만주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운동을 벌여온 투사들이 하는 일에 대해 임시정부의 일부 국무위원들이 이를 시기하는 마음을 엿 볼 수 있는 지시였다. 그렇지만 적군을 앞에 두고 서로 싸운다면 우리의 힘만 빠질 것이라고 일송은 생각을 하였다.

*출처 : 전자책 <일송정 푸른 솔은(저자 :김선태> 원본 파일 /http://www.upaper.net/ksuntae/1078147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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