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두 번째 날에 국립고궁박물원(National Palace Museum)에 가기로 했다. 대만에서 제일로 가고 싶었던 곳이다. 고궁박물원은 영국 대영 박물관,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함께 세계 4대 박물관 중 하나다.

고궁박물원에는 중국 신석기시대부터 청나라까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송, 원, 명, 청 등 4왕조 황제들이 소장했던 유물과 황실에서 제작한 중화문물 최고 명품들이다. 어떻게 이 유물들이 중국에 있지 않고 대만에 와 있을까?

1924년 청나라가 망한 후 청 황실이 자금성에 소장하고 있던 유물은 1925년 중화민국이 설립한 베이징 고궁박물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자 유물의 안전을 위하여 1933년 상하이로 이전했다가, 이후 난징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귀주(貴州, 구이저우)와 사천(四川, 스촨)등지로 분산해서 보관한다. 장개석은 유물이 중요함을 알았다. 일본과 싸우면서도 유물만큼은 이리저리 옮기면서 잘 보관했다.

1945년 일본과 전쟁에서 승리한 국민당 정부는 잠시 유물을 난징으로 옮겨두기도 하지만, 1948년 공산당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 가면서 모든 유물을 군함에 실고 중국을 떠난다. 공산당은 유물과 국민당 정부 관료들을 실은 미국 군함이 떠나는 것을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군함은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대포로 군함을 포격할 수도 있었지만 중국 최고 국보급 유물까지 바다 속으로 가라앉게 할 수는 없었다. 모택동은 언젠가 그 유물을 중국으로 갖고 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배를 떠나보냈다고 한다. 그때 장개석이 유물을 대만으로 가져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유물은 제대로 잘 살아남았을까?

장개석은 이 유물에 대단히 집착했다. 오죽하면 도망 나올 때, 미국이 자국 군함에 피난민보다 유물을 더 많이 실었다고 비난을 했을까? 유물은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 정부에 맞서 그 정통성을 주장하는데 꼭 필요한 존재였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미국이 이 유물 절반만 주면 중국으로부터 100년 동안 대만을 지켜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거절했다. 중국이 공격을 하더라도 유물이 대만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만큼 고궁박물원 유물은 대만에게는 물론 중국에게도 최고 재산인 것이다.

1965년 타이베이 근교에 국립고궁박물원이 완공되면서 유물들은 전시되기 시작한다. 장개석이 가져온 것과 수십 년간 대만에서 구매하거나 기증받은 유물까지 합쳐서 약 69만6천 점이다. 주요 항목을 보면 청동기, 도자기, 옥기, 칠기, 칠보자기, 회화, 서예, 법첩, 자수, 희귀도서 등이다. 69만점을 일시에 다 전시할 수 없어서 3개월에서 6개월마다 돌아가며 전시하고 있다. 그 전시품을 다 보려면 30년이나 걸린다고 하니..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고궁박물원에 갔다. 전철을 타고 사림(士林, 스린)역에서 내려 버스를 탔다. 가는 길은 쉬웠다. 오후 1시부터 관람을 시작해서 관람마감시간인 6시 30분까지 구경했지만 제 1전시관도 다 못 봤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적어도 이틀은 구경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아쉬운 점은 아래 지도 13번 즈산웬(지선원)과 14번 즈더웬(지덕원)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다.

▲ 그림 출처 : 국립고궁박물원 (https://www.npm.gov.tw/ko/Article.aspx)

지선원은 약 7000평인 중국 고대식 정원이다. 지덕원은 3000평 대지에 오솔길과 화초와 연못이 어우러진 산책길이다. 다음엔 이 두 곳을 먼저 보고 전시품을 봐야겠다. 유물을 구경하다 보면 그 아름다움에 놀라 다른 생각이 없어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마감시간이 오는 것을 아쉬워 할 정도니...

집중적으로 관람한 곳은 서화관, 옥기관, 상아관, 도자기관, 각종 공예전시관이다. 전시관에서는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으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사람도 많은 데다 왠지 사진 찍기가 미안해서 많은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서화작품>

▲ 송(宋) 양해(梁楷, 12세기 후반-13세기 초반에 활동) 발묵으로 그린 선인 (潑墨仙人)
▲ 원(元) 예찬(倪瓚, 1301-1374) 용슬재도(容膝齋圖)

아래 두 그림은 재미있다.

닭의 해라고 닭을 그린 작품도 특별히 모아 전시했다.

특별전시회에서는 Fu Chuan-fu 그림을 전시했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대만 풍광에 반해 대만으로 이주했다. 중국에 있을 때와 비교해서 대만 이주 후 그림이 많이 다르다. 초기 정통 산수화 기법에 매이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를 추구한 화가라고 한다. 자식들이 아버지 유품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고궁박물원에 기증했다. Fu Chuan-fu 작가 그림을 보는데 긴 시간을 투자했다. 멋진 그림에 반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다시 들어가 볼 정도다. 특별전시회라서 담 기회는 없을 듯...

 

 

 

 

 

 

 

 

<옥 공예품>

중국에서는 아름다운 돌을 전부 玉이라 불렀다. 중국 고대에 옥기는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었다. 점차 발달하여 개인 장식물인 빗, 비녀, 팔찌, 노리개에서 문방구, 도장, 술잔, 술병 등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 초기 옥공예

 

▲ 초기 옥공예

 

▲ 초기 옥공예

고궁박물원에서 가장 유명한 옥 공예품은 ‘취옥배추’다. 천년에 하나 얻을까 말까 정도로 정교한 조각품이라 한다. 백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옥 색을 잘 조화해서 만든 작품으로 청나라 어느 왕비 혼수품이었을 거라 추정한다. 취옥배추는 신부의 순결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자손을 많이 낳아 황실 혈통이 이어지길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 취옥배추

 

▲ 옥 배추와 옥 잔

 

▲ 옥 조각품

 

▲ 옥 문방구

 

▲ 옥도장
▲ 비취병풍. 더운 여름에 병풍을 통해서 바람이 들어오면 공기가 차가와진다고 한다. 또 빛의 색도 조각문양에 따라 달리 들어온다고 한다.

 

 

▲ 각종 옥 공예품

 

<상아 조각>

상아 조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상아공(상아투화 운룡문투구)이다. 3대에 걸쳐 만든 작품으로 가장 큰 겉 상아 공속에 상아를 깎아 만든 16개 작은 공이 들어있다. 16개 공 두께가 1mm로 이 공을 잘 돌리면 일렬이 된다. 상아 속 공은 갖고 놀기 위한 노리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현재 기술로도 재현될 수 없다고 하는 중국 유물 중 최고 작품이다.

 

▲ 정교한 상아 잔. 큰 잔에 작은 잔들이 순서대로 모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도자기와 칠보 공예 등은 2부에서 계속 ->>

참고 문헌 : 고궁박물원 그 정수를 만나다(출판 : 국립고궁박물원)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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