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소리에 가슴이 시리다

겨울의 끝자락... 햇살이 따뜻한 날 약속시간보다 일러 종묘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차가운 대리석 의자에 보던 책을 깔고 앉습니다.

모처럼 따뜻한 햇살 때문일까요? 여기저기 노인들이 모여 장기도 두고 얘기들도 한창입니다. 그런 쇠락한 풍경은 아직도 비호감이지만 뭔 얘기들을 나누나 싶어 슬금슬금 궁딩이를 옮깁니다.

"저런 쳐 죽일 놈들, 안즉도 그런 빨갱이 놈들이 지천이니 큰일이여....... "

"아 그러게 빨갱이 잡으라고 뽑아줬더니만 맴이 그렇게 약해 가지구, 되잡이를 당하지 않았어?"

"그저 착해 빠져 가지구. 애비 따라갈람 안즉 멀었어. 그 냥반만한 대통령이 어디 있간? "

"그 문가 놈이 다 꾸민 일이람서?"

"그 놈이 빨갱이 괴수여... 그 놈부터 잡아 죽여야 혀"

더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 쪽 옆에 놓인 태극기가 처량하게 나를 올려다봅니다. 그러게 여긴 뭐 하러 와서 앉니? 하고 힐난하는 것만 같습니다.

버스 정류장을 돌아 나오는데 한 쪽에 '독거노인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하는 표어가 붙은 모금함을 들고 젊은 청년 하나가 나를 쳐다봅니다. 그 촛불스러운 청년이 말하는 독거노인이, 태극기를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 바로 그 노인들 일 겝니다.

먼 훗날... 나 역시 그런 몰골로 무료 급식을 받아 연명하며 그곳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자를 한 번 흔들어 보이며 웃는 청년에게 눈으로 말합니다. 독거노인이고 고독사고 간에 그대로 죽게 두세요.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그네스러운 인간들의 발치 아래에서.

햇살은 눈부신데 바람은 여전히 날카롭고, 빨갱이 소리에 시린 가슴은 독거노인 사랑 따위에 콧방귀입니다. 곧 봄이 올까요?

사진 : 권용동 주주통신원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유원진 주주통신원  4thme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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