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어느 여름날

와 ! 우리가 양돼지잖아 !

 
지금 어린이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가 여러분만큼 어린 나이로 아직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습니다.

1967년 여름이 기울어 가고 있었습니다. 유난히도 무더위가 극성을 부렸고, 가뭄으로 미처 모내기를 못한 논들에서는 어쩔 수 없이 벼 대신으로 심은 메밀이 싱그러운 바람을 일으키며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메밀이란 원래 산골짜기나 아주 메마른 등성이 땅에 심는 것인데, 이렇게 기름진 논에다가 심어 놓았으니 얼마나 잘 자라는지 모릅니다. 메밀은 산등성이의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아주 끈질긴 작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당시의 우리 형편으로는 어떻게든지 먹고 살 식량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미국은 우리나라에 자기나라에서 생산된 식량중 남은 식량을 다른 나라에 원조하는 법률인 미국잉여농산물처리법 480호에 따라 많은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를 원조하여 주었습니다.

아직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우리나라는 이 식량의 원조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 두 끼를 먹는 것도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긴긴 여름을 아침에 죽 한 그릇을 먹고서 저녁까지 기다리자면 기운이 없어서 운동장에 나가서 뛰어 노는 것조차 귀찮아하고 있었습니다.

q6.jpg

“당번! 얼른 가서 죽을 타오너라!”

선생님은 넷째 시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당번을 재촉하였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미국에서 원조해준 사료용 옥수수를 잘 골라서 가루를 만들어서 국민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죽을 쑤어 먹이게 한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커다란 솥을 걸고 전교생이 먹을 죽을 쑤는 것입니다. 600명에 가까운 어린이들에게 먹일 죽을 쑤는 일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조금만 불을 세게 때어도 죽은 솥바닥에 눌어붙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불을 때면서 또 한 편으로는 부지런히 저어 주어야만 이렇게 눌러 붙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쑤어 주는 죽이나마 제대로 얻어 먹이지 않으면, 6학년이라서 해가 기울도록 공부를 해야 하는 어린이들이 지쳐서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선생님은 언제나 다른 반보다 먼저 가서 죽을 타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아직 남아 있어서 중학교에 들어가기가 지금 대학에 들어가기만큼이나 어려웠던 때이었습니다. 6학년이 되면 요즘 고등학교 3학년과 같이 밤이 되어서 칠판의 글씨가 보이지 않아야만 겨우 어린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물론 그중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전기도 없는 교실에서 석유호롱불을 켜놓고 앉아서 밤 11시가 되도록 밤공부를 하고 교실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그러니 이 점심시간의 죽 한 그릇은 어린이들에게 뿐 만아니라, 선생님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q5.jpg

이렇게 죽을 쑤어 먹이던 점심이 날마다 죽을 태워서 제대로 먹일 수가 없고 또 그 죽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더 정확하게 어린이들에게 먹일 것인가를 연구하던 사람들이 이젠 죽보다는 빵을 만들어 먹이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자 훨씬 번거롭지 않고 아이들도 즐겨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부판과 같은 빵틀에다가 옥수수가루의 반죽을 부어놓고 김을 들여서 빵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말이 빵이지 옥수수 개떡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기운이 약한 아이들은 그만 힘센 아이들에게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야! 안기욱! 이리 나와!”

선생님이 덩치가 커서 우리 학급의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기욱이를 불렀습니다. 기욱이가 곁에 앉은 영길이의 빵을 빼앗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커다란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면서 앞으로 나오는 기욱이는 어느새 빼앗았던 영길이의 빵은 슬그머니 영길이 책상위에 놓고 있었습니다.

“그걸 가지고 나와!”

선생님은 어느새 보셨는지 벌써 눈치를 채시고 또 호령을 하셨습니다.

“네.”

q2.jpg

기욱이가 기가 팍 죽은 모습으로 앞으로 나오자 선생님은

“안기욱! 배고프지?”

“네.”

“그래, 넌 배고프고, 영길이는 배부를까?”

“아닙니다.”

“그래? 다 같이 배가 고플 텐데, 너만 배 부르자고 친구 것을 빼앗아 먹어?”

“잘못했습니다.”

“좋아, 잘못 한 것을 알았으면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

“예.”

점심시간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어느 교실이나 거의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생님이 교실에서 이렇게 지키고 있는 교실은 괜찮지만 정말 기운이 센 아이가 남의 것을 빼앗아 먹는 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게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제과점에서 파는 옥수수 빵과 같이 가루가 고운 것을 가져다가 맛있게 구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료용의 옥수수 가루를 가지고 빵을 만들면서, 너무 비싸서 설탕을 타서 쓸 수도 없어서 요즘엔 먹지도 못하게 하는 사카린을 타서 단맛을 내어 찐 것입니다. 한입 베어 물면 입속에서 모래알처럼 꺼칠꺼칠한 것을 간신히 씹어 삼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이 빵을 더 먹으려고 아귀다툼을 하였습니다.

이 빵을 찌는 원료가 되는 옥수수가루는 두 주일에 한 번씩 큰 트럭이 실어다가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배달되어 오는 날은 아이들이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릅니다. 그 트럭에서 수많은 옥수수 포대를 날라 가는 일이 재미나서가 아닙니다. 자기들은 만져보지도 못하는 옥수수가루를 마음껏 만질 수 있고, 또 터진 포대에서 가루를 한 움큼 집어 담아서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옥수수가루가 도착하는 날입니다.

아이들은 ‘언제쯤 트럭이 도착할까?’ 하고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다섯째 시간에 체육시간이어서 운동장에 있던 우리 반의 아이들이 옥수수 포대를 나르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저마다 나르겠다고 덤볐습니다.

선생님이 “자! 키가 크고 힘이 센 기욱이,영길이, 상민이, 철규, 영진이 그리고 경래 이렇게 여섯이서 좀 날라다 드려라.”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뽑힌 아이들은 의기양양하게 트럭으로 다가 갔습니다.

“자, 조심해서 가져가라.”

학교 아저씨가 차에서 받아 내린 포대를 아이들의 어깨에 올려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신바람이 나서 옥수수포대를 걸머지고 숙직실 옆의 창고로 달렸습니다.

q4.jpg

“조심해! 넘어질라.”

다른 선생님들도 소리를 치셨습니다. 저마다 한 포대씩 걸머지고 창고로 달려가고 나자 아저씨는 부지런히 옥수수포대를 받아 내렸습니다. 아이들은 창고에 가서 포대를 내려놓고서 빵을 찌다가 둔 옥수수가루를 한주먹 집어서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그렇지 않아도 체육시간에 뛰고 나서 힘이 드는데, 포대를 걸머지고 달려 와서는 가루를 한입 털어 넣었으니, 목이 메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캑, 캑.” 목이 메어 낑낑거리면서 창고에서 나왔습니다.

이 모습을 본 선생님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시며 “야! 이 녀석들아. 너희들 그게 뭔 줄이나 알고 먹고 있니? 이건 미국에선 돼지 사료야. 사료! 인석들아 알고나 먹어!” 하고 꾸지람을 하시면서도 화가 나신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 반에서 가장 짓궂은 짓을 잘하는 철규가

“와아! 그러면 우리가 양돼지다. 양돼지!”

이 순간에 우리들은 물론 짐을 내리던 아저씨도 곁에 서 계시던 선생님들도 모두 한꺼번에 “와 하하하하하.” 웃음보따리를 풀어 놓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목에 가루가 막혀서 숨을 헐떡이던 아이들은 그만 목을 움켜쥐고 웃지도 숨을 쉬지도 못하고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숨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래 이 양돼지들아 실컷 먹고 어서 자라라.”

선생님은 어쩔 수 없는 아이들이라는 듯이 바라보면서 한마디 하셨습니다.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모두들 웃음을 웃기는 하였지만 마음속에서는 

'우리나라도 어서 부자 나라가 되어서 이 따위 사료를 얻어먹는 나라가 되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저 하늘 복판에서 조금씩 기울어 가는 여름 해를 바라봅니다.

 

편집: 이미진 객원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