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5개월간 긴 시간의 대장정을 이어왔다. 그리고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선고로써 그 진실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한다.’

너무도 당연한 진실이었지만 우리는 우리의 일상조차 마치 저당 잡힌 듯 뒤로한 채 탄핵을 향해 오늘까지 달려왔다. 살아간다는 의미는 역사를 써 내려간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된 삶을 추구해 왔고 그 진실이 묻히지 않길 바라면서 때론 저항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우리가 겪어온 4.19, 5.18, 6월 항쟁에서 그랬고 많은 나라들이 거쳐간 시민혁명의 역사가 그랬다.

그 원초적이면서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진실’이라는 낱말이, 진박(진실한 친박)이라는 천박하고 처참한 말로 나뒹구는 듯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진정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 하는 회의마저 들었었다. 하기는 인격이라는 것 대신 무지스러운 탐욕으로 버무려진 듯한 그들도 나름의 ‘진실’이라는 개념을 가지고는 있었을 것이다. 단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절대적 가치여야 할 ‘진실’의 개념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자신만의 유아적 가치로 변질된 채 말이다.

진실을 되찾기 위해 모든 걸 뒤로 한 채 광장으로 뛰쳐나가는 것이 대다수 국민들의 일상이 되어갔던 어느 날, 피로감이 진실을 향한 열망을 넘나들며 우리에게 드리워져갔던 순간을 우리는 경계했었다. 이 악당들의 방해, 교란 공작이라는 저급한 저항까지 겪어내야 했던 우리에게 재판관 전원 합의 인용이라는 오늘(3.10)의 명확한 선고가 없었다면 어찌했을 것인가. 선고가 확정되기 전까지 헌재 재판관의 성향을 걱정해야 했고 되지도 않는 법리 분석에까지 몰두하면서 지켜왔던 불안한 시간들을 어찌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 긴장된 순간은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뒷머리에 헤어롤이 말려 있었던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출근하던 이정미 재판관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우리도 잠시나마 미소로 그 긴장감을 이완시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정신없이 헌법재판소로 출근하던 그 모습에서 국민들은 불성실의 상징이 된 박 전 대통령의 올림머리와 달리 ‘아름다운 실수’라며 오히려 격려를 보내기도 했다.

‘진실’은 항상 ‘진실’인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 일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임을 공감했던 하루였다. ‘진실’이라는 가치를 향한 우리의 민주주의 열망 속에서 많은 사람들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던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어느 날 다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마주해야만 했던 우리는 망연자실했었다. 과연 우리 역사에 발전 법칙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하면서.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눈과 관심이 다시 그 ‘진실’에 대한 가치로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촛불로 활활 타올랐고, 시작일 뿐이지만 오늘 ‘진실’의 승리를 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 의미가 행복과 평온함만은 아니라는 것과, 한 때 다른 동물들처럼 포식자로부터의 끝없는 위협 속의 삶을 살았던 우리가 그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대신 우리는 끝없는 도전으로부터 우리 사회의 공유가치, 진실의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몸소 경험하였다. 그리고 야생에서의 삶 자체가 그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시간이었듯이 지금 우리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에도 ‘완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음도 경험하였다.

흔히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는 그 사회의 도덕적 가치로 유지되지만, 극단적 이기주의가 박근혜식 폭력적인 형태로 분출되는 사회에서는, 법이라는 경계선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흔히 목격되곤 한다. 그들은 실제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조차 지키지 않고 있었다. 마치 법을 의식하고 있다는 듯 위장의 가면을 쓴 채 법체계를 들먹이는 가증스런 연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이미 저 멀리 범죄의 수렁에 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국회의 탄핵 결정 이전부터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박근혜는 그 아버지 박정희의 역사적 과오만으로도 다시 역사에 등장하지 말았어야 했던 인물이었고 우리가 그 등장을 허용해서도 아니 되었을 것이었지만, 그들이 보란 듯이 내팽개쳐 왔던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이 법치주의 기본원리를 빌어 다시 화려하게 우리 앞에 등장했었다.

세상은 그렇게 아이러니했다. 우리가 피 흘려 이룩한 이 민주주의 법질서의 혜택을 민주적 법질서를 무시해온 세력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써 잘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인권, 인간의 가치 등에 무지몽매한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그 인간에 대한 가치의 배려 하에 보호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그래도 그 가치를 지키고 실현해내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멈출 수 없는 것을. 적어도 그러한 가치를 악용하려는 끊임없는 세력들로부터 다음 세대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가야 한다는 것을.

세상이 사나워질수록 법이라는 경계선에서 줄타기하는 무리들이 많아진다. 그러다가 여의치 않으면 결국 그 선을 넘어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도, 무력 통치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구한말 친일 매국행위나 군부독재 하에서 보았듯이 줄타기는 위험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줄타기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최소한 법의 경계선이라도 견고한 동아줄로 묶어 지켜내려는 것인지 모른다. 그 애타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헤어롤의 동그라미 부분조차도 예사롭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고 이를 '탄핵 인용’이라 해석하는가 하면 '8:0'으로 인용될 것이라는 추측까지 갖가지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오늘 우리는 그 질긴 악의 세력들에게 법적 잣대로 파면을 선고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닐 것이다. 이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서 누구보다 앞서 지켜냈어야 할 도덕적 가치는 압살 된 채, 그들은 자신들을 건전하게 비판하는 국민에게까지 이 최소한의 기준일 뿐인 법을 만능인양 들이대며(소송) 공격했었다. 그런 치졸한 방법으로 쌓아 올린 온갖 위법의 결과들을 청산해야 하는 작업들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다.

국민이나 당사자들 누구에게도 동의나 설득조차 거부한 채 결과랍시고 위세까지 등등했던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4대 강 녹조 사업에서부터 외교 무대의 주요 거래 도구로 사용했어야 할 우리의 카드 패(牌)들조차 적절한 활용은커녕 그저 예쁘게 봐달라며 갖다 바치는 식의 저급했던 외교적 결과들까지, 새로운 정부는 새로운 정책을 펼쳐가기보다 그들이 쌓아 올린 이러한 적폐들을 치우는 청산작업에 온통 시간을 보내야 할 판이다.

그래서 헌법재판소 선고 전후 흘러나오는 ‘화합’이라는 말은 다소 당황스럽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교훈을 이번에도 놓치는 우를 범해서야 되겠는가. 온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지금 제대로 된 적폐 청산까지 마친 후에야 화합을 논할 일이 아닌가.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대통령으로서 직위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선서한다.”라는 말만 믿고 따라간 그 국민을 철저히 자신의 사익만을 위해 이용했던 대통령의 행위를 보면서, 그녀에겐 그 부모로부터 배웠던 교훈을 너무도 착실하게 잘 실천해왔던 당연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반복해도 된다. 』는 체험의 교육으로부터.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진희 주주통신원  kimjh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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