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우리 것] 마광남 주주통신원

금골산(金骨山)은 진도(珍島) 읍내서 서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데, 중봉이 가장 높고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바라보면 옥부용(玉芙蓉)과 같다. 서북은 바다에 닿고, 지맥(地脈)이 물구거리며 남으로 달려 2마장쯤 가서 간점(艮岾)이 되고, 또 동으로 2마장쯤 가서 용장산(龍莊山)이 되어 벽파도(碧波渡)에 이르러 그쳤다.

산의 주위는 모두 30여 리인데, 아래는 큰 절터가 있어 이름은 해원사(海院寺)다. 9층의 석탑(石塔)이 있고 탑의 서쪽에 황폐한 우물이 있으며, 그 위에 삼굴(三窟)이 있는데 그 맨 밑에 있는 것은 서굴(西窟)이다. 굴이 산의 서쪽에 있는데 창건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근자에 일행(一行)이란 중이 있어 향나무로 16나한의 소상을 만들어 그 굴에 안치하였고, 굴의 곁에 별도로 고찰(古刹) 67칸이 있어 중들이 거처하고 있다. 그 맨 위의 것이 상굴(上窟)인데, 굴이 중봉 절정의 동쪽에 있어 기울어진 비탈과 동떨어진 벼랑이 몇 천 길인지 알 수 없으니, 원숭이같이 빠른 동물도 오히려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다.

동쪽에서는 무엇을 더 쉬 잡아 발붙일 땅이 없고, 서굴을 경유하여 동으로 올라가자면 길이 극히 위험하다. 비탈을 타고 돌에 굴러서 한치 한치 전진하기를 1마장쯤 가면 석봉(石峯)이 우뚝 솟아 앞에 있는데, 그냥 건너뛸 수 없어 돌을 포개서 13계단의 층층 사다리를 만들었다.

내려다보면 밑바닥이 없어 심목(心目)이 모두 현기증을 일으킨다. 거기를 올라가면 절정이 되고, 절정으로부터 동쪽으로 돌아 내려가기를 30보쯤 가면 마루턱 바위를 파서 오목하게 만들어 발을 붙이고 오르내리게 되었는데, 오목한 군데가 12군데 있는데 거기서 10여보를 내려가면 상굴이 나온다.

또 거기서 북쪽 바위로 두어 걸음 나가면 또 마루턱 비탈을 파서 허공이 베개를 매 놓았다. 동으로 향하고 곧장 내려가기를 8ㆍ9보쯤 가면 동굴(東窟)이 나오는데, 앞 칸의 주사(厨舍)는 모두 비바람에 퇴락되었다.

굴 북쪽 비탈을 깎아서 미륵불(彌勒佛)을 만들었는데, 옛날 군수(郡守) 유호지(柳好池)가 만든 것이다. 불가에서 전해 오기를, “이 산이 옛날에는 영검이 많아서 매년마다 방광(放光)을 해서 신기한 점을 보이고, 유행병이나 수한(水旱)의 재앙에도 기도를 드리면 반드시 효과가 나타났는데, 미륵불을 만들어 놓은 뒤부터는 산이 다시 방광한 일이 없었다.” 하며, 그 유씨가 만약 외도(外道)꾼 김동(金同)과 같은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산 귀신을 누르는 사람일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이 황당하나 역시 들을 만하다.

무오(戊午)년 가을에 이주(李冑) 나는 죄를 짓고, 이 섬으로 귀양살이 와서 그해 겨울에 이 산을 둘러보고 이른바 삼굴(三窟)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음에 기억해 두었었다.

4년이 지난 임술년 가을 9월에 왕세자(王世子)를 책봉(冊封)하고, 이날에 국중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는데, 유독 무오년 한때에 죄를 입은 진신(搢紳)의 선비는 용서해 주는 줄에 끼이지 못했다. 나는 혼자서 자탄하여 사군자(士君子)가 이 세상에 나면 반드시 충효(忠孝)로써 스스로 기대하는데, 지금 나는 죄악이 지중하여 성조(聖朝)에서 버림받는 물건이 되었으니, 신하 노릇을 하고 싶지만 임금에게 충성할 수도 없고, 자식 노릇을 하고 싶지만 부모에게 효도할 수도 없으며, 형제ㆍ붕우ㆍ처자가 있지만 또한 형제ㆍ붕우ㆍ처자의 낙을 가져 보지도 못하니, 나는 인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이 세상을 살아갈 뜻이 없었다.

하루는 동자에 술 한 병을 들리고 외로이 행하여 서굴에 들려 중 언옹(彦顒)ㆍ지순(知純)을 끌고 곧장 상굴에 당도하니 굴과 아울러 불전(佛殿) 재주(齋厨)가 모두 2칸인데, 비어둔 햇수가 너무도 많고, 사는 중도 없어 낙엽이 문을 메우고 먼지와 모래가 방에 가득하여, 산바람이 부딪고 바다 안개가 스며들어 남장(嵐瘴)이 다북히 쌓여 거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먼지를 쓸어내고 벽을 바르며 나무를 베어 부엌에 불을 때고, 문을 열어 공기를 통하게 하며, 한낮에 밥 한 사발을 먹고, 아침저녁으로는 차 한 잔씩을 마시며, 닭의 울음을 들어 새벽인줄 알고 앞바다의 밀물을 살펴 때를 짐작하며, 침식(寢息)을 마음대로 하고 동작을 편한대로 따랐다.

그리고 다섯 가지 게(偈)를 지어 지순(知純)으로 하여금 밤마다 나누어 외우게 하고, 새벽 4시까지 누워서 들으니 역시 하나의 승사였다. 이렇게 하여 반달을 지나니, 군의 태수(太守) 이세진(李世珍) 씨가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며, 또 말하기를, “이 땅이 지극히 위험하니, 속히 내려가도록 하라. 만약 중들과 더불어 소견하고 싶거든 서굴이 적당하다.” 하였다. 최탁경(崔倬卿)ㆍ박이경(朴而經)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듣자니 그대가 상굴에 가서 예측 못할 위험을 겪고 있다니 명(命)을 아는 군자의 행위가 아니다.” 하였고, 손여림(孫汝霖)이 서울로부터 어명을 받들고 와 백성의 정상을 살피면서 서울 친구 2ㆍ3명의 뜻을 들어서 나는 몹시 나무랬다.

나는 말하기를, 친구끼리는 선의로써 책망한다는 것이 헛말이 아니다. 내가 어리석어서 당초에 명리의 길이 구절반장(九折半膓)보다 험한 것인 줄을 모르고 그대로 쉬지 않고 가다가 내일 겨냥되었는데, 지금 또 이 굴에 거하며 험한 줄을 모르니 만약에 한 번 차질이 있어 부모의 유체(遺體)를 손상한다면 이 이상 더 큰 불효는 없겠다. 하고, 지순ㆍ언옹 두 스님에게 이별을 알리고 산을 내려가니 두 스님이 나를 전송하여 해원사 석탑 아래까지 와서 하는 말이, 산승(山僧)의 종적이란 구름같이 방향이 없는데, 어찌 일정한 주착(住着)이 있겠으며, 후(侯)도 또한 멀지 않아 임금의 은혜를 입어 떠날 터이니 어찌 이 금골산에 다시 처하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한 말을 써서 후일의 면목이 되게 하지 아니하려는가.”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스님의 말을 들어서도 쓸 만하거니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상고해 보니 이 섬의 명산 가운데 금골산은 들어 있지 아니하고, 절에 있어서도 삼굴이 빠졌으니, 이는 성성시대에 판적(版籍)의 잘못된 것으로 금골산의 큰 불행이다. 지금 두 스님의 말에 따라 금골산을 기록해서 뒷날 이 기록을 보는 자로 하여금 이 섬에 금골산이 있는 줄을 알게 하고, 이 산속에 삼굴이 있는 것을 알리며 또 두 스님과 노부(老夫)와 함께 굴에서 거처한 줄을 알게 하면, 장차 오늘로부터 옛일이 되지 않겠는가.” 하니, 두 스님이, “그렇겠다.” 하여, 날마다 지은 시 약간 편을 아울러 기록하여 드디어 금골록(金骨錄)을 만들어서 굴에 보관하게 한다.

산에 있는 적이 모두 23일 동안이다. 홍치(弘治) 임술년 겨울 10월에 철성(鐵城) 이주(李冑)는 기록하다.

 

마광남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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